46-8.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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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용병대장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머리 위로 총탄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익숙한 일이고, 이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미클라크는 오히려 이만큼 적진과 가까운 곳에서 부하들과 함께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가슴을 쭉 폈다.
지금 그는 휘하 병력들을 이끌고 엘랑키아 군이 장악한 전선의 남부, 브레세른 마을을 공격하고 있었다.
파앙! 퍼퍽! 팍!
타타탕! 타탕! 탕!
“끄아아악!”
“우욱! 맞았어···.”
“대열을 채워라! 반격해야지!”
“사격 준비! 준비이잇!”
적의 선제 사격을 뒤집어 쓰고도 조금도 투지를 잃지 않은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반격한다.
타타타탕! 타타탕!
따당! 타타타탕!
“재장전! 재장전!”
“후열 앞으로!”
“모두 침착해라! 전진!”
총병들은 적의 화망에 몸을 드러낸 상태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침착하게 장전을 하거나 후열 부대와 자리를 교체해준다.
빽빽한 창날 벽을 세우고 대기하는 창병들 역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퍼펑! 파각!
“끄아아아!”
“흐으윽!”
“버텨라, 어차피 적 포대도 무한이 아니다!”
“내 뒤로 서라! 우리 부대에 겁쟁이는 없겠지?”
이따끔 떨어지는 포탄 세례에도 겁먹지 않고 조용히 동료들이 쓰러져 빈 자리를 채워 나간다.
두렵지 않다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충분히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다 대답한다면 이는 진실일 것이다. 그런 부하들이 미클라크는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언제라도 진격 명령이 내려온다면, 거침없이 나아가 적 창병 대열과 창대를 뒤섞으며 겨룰 것이고, 적 창병의 견제가 없다면 그대로 전진해 적진을 돌파할 기세였다.
현재 미클라크가 이끄는 병사들은 현재 엘랑키아 군과 싸우고 있는 그룬발트의 10만 대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원군으로 온 다른 가문의 병력들과 달리, 이들은 폴름스 선제후령 남부 출신들로 폴름스 선제후를 섬기는 영주들이 보낸 군대이다.
때문에 남들과 달리, 사악한 엘랑키아의 침략군에 포위 당한 주군을 구하고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폴름스를 향해 빨리 달려가야 한다는 당위가 있었다.
그 때문인지, 마침내 공격 명령이 내려오자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측면은 아군 연대가 지켜주고 있지만, 언제 적의 반격이 있을지 모른다! 아군에게 의존하지 말고 지경선을 살피도록.”
“옛, 알겠습니다.”
그 열의를 느낀 미클라크는 누구보다도 꼼꼼하고 조심스럽게 지휘하고 있었다.
이럴 때면, 얼마 전 미터스하임 전투에서 누적된 피해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당시 휘하의 4개 연대는 결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결과적으로 현재는 대규모 야전군이 격돌하는 전장에서 독자적으로 승패를 결정할 정도의 역할을 하기에는 전력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 전투가 대단한 전술적 가치를 가졌던 것도 아닌, 단순히 ‘폴름스의 전장으로 오는 길’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분한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자다가도 생각이 나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게다가 짧은 전투였지만, 사실상 두 차례에 걸친 연이은 패배를 경험했기 때문에 부하들의 사기도 말도 못할 정도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선두에서 저격당해 쓰러진 장교들도 많아 부대에 대한 통제가 걱정되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하들에게 참 미안한 일이지만, 과연 휘하의 병력, 폴름스 남부군이 전투 수행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조차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병사들은 빠르게 원래 모습을 되찾아 전선으로 복귀했다.
게다가 미터스하임에서의 뼈저린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는지 각 부대 내부는 물론, 연대간의 유대가 깊어지고 병사들의 움직임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용병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농담처럼, 역시 신병들에게는 석 달의 훈련 보다 단 하루의 실전이 더 큰 발전의 계기가 되는 모양이다.
물론 그 ‘발전’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희생이 너무나도 커서 결코 선택하고 싶은 길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미 벌어지고 수습까지 끝나버린 일이다. 차라리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에 별 문제 없이 미터스하임 마을을 통과해 로델베르크나 폴름스를 향해 행군했다면, 오히려 생각보다 빨랐던 엘랑키아 군에게 차단당했을 것이다.
결국 다시 우회에 우회를 거듭해 간신히 폴름스에 입성은 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대로 성에 갇히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도 성 안에 갇혀 있는 동료들 처럼 말이다.
그 자신도 폴름스의 선제후를 섬기는 신하인 만큼, 선제후령의 본성인 폴름스에는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알현이나 보고, 혹은 회의를 기다리며 며칠, 혹은 한 달 이상이나 대기하는 일은 흔히 있었다.
성채도시를 방문한 용병으로서 시간이 날 때면 도시, 정확히는 도시의 방어 체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결론은 폴름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함락될 도시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성 안에 1만을 훌쩍 넘는 수비군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다만 이게 ‘장점’이 되는 것은 엘랑키아 군이 성을 공격하는 경우에나 그렇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애매하다.
그리고 지키기 쉽도록 성채를 봉쇄하기 좋다는 것은, 반대로 나가는 길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걸 엘랑키아 군은 겹겹이 방벽을 쌓아 포위망을 만들고 외부에서 틀어막기까지 했다면 방법이 없다.
아마 이 전투가 끝나도록, 성 안의 폴름스 선제후군은 외부와 연계해서 싸우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엘랑키아 군이 결정적인 피해를 입어서 퇴각하거나, 구원군의 선봉이 도시를 둘러싼 포위망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외부에서 폴름스를 구하기 위해 싸울 기회를 얻은 것은 군인으로서 다행인 점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분명 그렇겠지···.”
“예? 대장님, 방금 하신 말씀은 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 아니다. 내가 혼잣말을 했네. 그보다 추가 물자는 도착했나?”
“공격 개시 시점에 도착한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 외에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흐음··· 그거라도 받은 게 다행이군.”
그들이 속한 좌선봉, 브레세른 공격군의 지휘관은 영 껄끄러운 상대,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후계자인 세두시온 공이었다.
미터스하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지만, 어쨌거나 위에서 정한 것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관장하는 병력이 많아지자 소수인 미클라크 휘하의 병력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보급부대가 도착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플로리안이라는 이름의 참모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덕분인지, 전투 직전에 총병 당 10발 정도는 추가 배급할 수 있을 정도로 탄약을 수령하기는 했다.
그도 반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용병인 만큼 자이드리츠 전쟁관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는다.
최소한 세두시온 혼자서 이곳을 지휘하게 두는 것 보다는, 유능한 참모라도 옆에 붙여서 함께 싸우도록 만들었다는 데서 사령부에 대한 신뢰도가 올라갔다고 할지.
처음부터 이만한 전력이 집결했다는 점에서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무모하게 그룬발트로 뛰어 든 엘랑키아의 국왕의 운명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설령 본국으로 도망치더라도 다시는 전쟁 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리라.
결국 전방에서 연대급 부대들을 지휘하는 중견 지휘관 입장에서는 얼마나 수월하게 이기느냐, 또 얼마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느냐가 관심사였다.
승리의 대가로 막대한 양의 피가 흘러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군인으로서, 전장에 선 이상 감수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별다른 계획도 없이, 그저 소수의 그릇된 판단과 고집에 휘말려 부하들이 개죽음 당하는 꼴을 보는 것은 이제 피하고 싶었다.
···마치 미터스하임에서처럼 말이다.
쾅 콰쾅! 퍼엉! 뻥!
이번의 힘찬 포격은 아군 포대에서 쏘아낸 것이다.
미터스하임 전투 마지막 날, 졸전에 졸전이 겹친 끝에 브라우나인 선제후군이 자랑하던 포병대는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었다.
엘랑키아 경기병대의 기습으로 인해 포대 자체가 점령당했었고, 포가가 부서지거나 점화구에 나무 못이 박히는 등 모조리 파손당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간이 상당히 흐른 지금은 대부분 복구되어, 다행히 이곳 브레세른 전선에서는 아군 포대 수가 적보다 훨씬 많았다.
오전 동안은 요새화 된 브레세른 마을을 흙더미로 만들어 버릴 기세로 포탄을 때려 넣더니, 지금은 진격하는 우리 야전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비록 세두시온 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선제후 본인과 원로회에서 화약무기 양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브라우나인의 화력은 솔직히 고마웠다.
미리 준비된 포격 계획에 따라서 차근차근 적의 밀집 대형을 부숴나가고 있었다.
쾅! 파각!
“으아악!”
“끄악!”
엘랑키아 군 창병 대열 한귀퉁이에서 흙먼지가 엄청나게 일어나더니, 창대가 와르르 쓰러진다. 잘려나간 창 끝이 마치 제비처럼 하늘로 치솟았다가 땅에 떨어진다.
나머지 창들도 마치 겁먹은 오리떼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제대로 한 방 명중한 모양이다.
저 정도라면, 모서리를 책임지던 장교와 부사관들이 우르르 사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만약 자신에게 3개 중대 이상의 기병이 있었다면, 저곳을 노리고 돌격을 명령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예비대로 재빠른 산악병 중대가 있긴 하지만, 역시 보병을 통한 강습으로 저런 약점을 노리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이런 전술적 우위가 차근차근 쌓여 승리를 만든다. 지금은 평범하지만 효과적인 힘싸움에 집중할 때였다.
“어··· 창병이? 미클라크 경! 좌측으로 인접한 아군이 창병을 진출시켰습니다!”
“흐음··· 너무 빠르지 않나?”
“아! 지금 명령서가 도착했습니다. 공격 개시 명령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헐레벌떡 뛰어온 전령이 전달한 명령서에는 정말로 공격 개시가 적혀있었다.
우세한 화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창병 밀집 대형 돌입은 늦추는 게 아니었던가?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사전 우세는 충분히 취했다고 사령부에서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전장에서 당초의 계획이 뒤바뀌는 일은 수시로 발생하니까.
“좋아, 우리도 더욱 밀어붙인다! 창병 앞으로!”
“창병 앞으로! 명령 전달하겠습니다.”
“주변이 나선다고 서두르지 마라! 우리는 우리 템포에 맞춰 나아가면 그만이다.”
“옛, 대장!”
이미 폴름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이제는 절대로 서두르거나 전공을 탐낼 생각은 없었다.
특히나 괜히 앞장서서 다른 아군의 총알받이나 되는 것은 절대로 사양이다. 그렇다고 후방에서 구경만 할 생각도 아니었지만.
“전진, 앞으로!”
“앞으로오오!”
기병 돌격과 같은 날카로운 나팔소리와 드라마틱한 함성은 없었다. 대신 전장에 낮게 깔리는 북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보병 대열에는 기병에는 없는 묵직함이 있었다.
“창, 앞으로!”
“계속 전진! 우리가 수가 훨씬 많다!”
“창, 앞으로오!”
“하나, 둘! 하나, 둘!”
타타타타타타탕!
총병들의 보조를 맞춘 지원사격과 함께 미클라크 휘하의 창병들이 나아가기 시작한다.
창병과 총병이 뒤섞인 중대급 밀집 대형 여러개가 모여 하나의 큰 벽처럼 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저기 솟아있는 창날의 벽이 마치 숲처럼 보인다.
명령을 먼저 받았는지, 공격이 먼저 시작된 주변 아군의 진격에 비해 조금 늦긴 했지만, 그 기세는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창 끝이 서로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