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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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하게, 서로 상당한 준비를 한 후에야 시작된 전투는 예상과는 다르게 지엽적인 싸움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룬발트 군은 공격은 꾸준히 하고 있으나, 일부 병력을 추려 거점만을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애초에 교전이 벌어지는 범위는 작았고 대부분의 병력은 구경꾼이 될 뿐이었다.
공격 측인 그룬발트 군이 이렇게 하는 이상, 수비 측인 엘랑키아 군도 주도적으로 나설 수 없다.
적은 ‘당장 공격에 나선 병력’만 소수일 뿐이지, 아슬아슬하게 포격 거리 부근에서 대기하거나 엎드려서 포격을 피하는 식으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부대는 대담하게 사거리 안쪽에 병력을 전개하고 있기도 했다.
쏴 볼 테면 쏴 봐라, 라고 도발하는 것 같았지만, 명중을 보장하기 어려운 원거리이다 보니 엘랑키아 측에서는 포탄을 아끼고 있었다.
단순히 탄약의 총량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급물자로만 따지면 어느 때보다도 충실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반드시 필요없는 표적에 포탄을 낭비한 사이, ‘더 중요한 표적’이 등장하기라도 한다면 방어전 자체가 틀어질 수도 있었다.
도발도 도발 나름이지, 엘랑키아 포병대는 가장 공들여 장전한 ‘전투 첫 사격’의 제물로는 ‘더 먹음직한’ 표적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보유한 카드를 탐색하는 듯한 미묘한 기 싸움은 한참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이 균형 아닌 균형을 깨부순 것은 북쪽, 슈뵈켄 마을을 두고 공방전이 벌어지는 현장이었다.
“안 됩니다, 후작 각하. 사령부의 명령은 분명 정오까지는 제한된 공격만을 진행하라고 하셨었습니다.”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만류하는 참모를 노려본다.
“그래, 분명 그런 명령이었지. 허나 거기에는 단서가 하나 붙어있지 않았나?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이라고 말이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실제로 ‘특별한 일’은 없지 않습니까?”
“지금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나? 사령부에서 준비한 공격이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특별한 일’이 말일지!”
“....”
펠쿠트 백작의 작전참모, 타를라 니케 폰 자이트리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특별한 일’이라는 애매한 단서는 타를라 역시 분명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번 전투에서 총참모장을 맡아 ‘차기 황제’ 디오보르크 공작을 보좌하는 만프레트 그로블 폰 자이트리츠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명령은 언제나 칼 같았다. 해석의 여지 따위 없이, 적확하게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일을 하도록 규정하는 완벽한 명령이란 말이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라니··· 세상에 무엇이 특별하고, 무엇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인가?
솔직히 이번에 타를라가 섬기는 펠쿠트 백작의 말은 궤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초에 애매한 지시가 내려온 이상, 애매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파견된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참모단 중 서열 3위인 그녀의 비상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만약 만프레트 총참모장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존경하는 만프레트 경이 아무 생각 없이 애매한 명령을 내렸을 리가 없다.
어쩌면··· 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일까.
이제 와서 펠쿠트 백작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여기서 사이가 틀어져 버리면 앞으로의 조언은 더더욱 먹혀 들지 않을 것이다.
‘사령관을 보좌하는 입장이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다른 선택지를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젠가 전쟁관에 찾아와 특별히 강의를 해 주었던, 꿈속 인물처럼 아름다웠던 엘프 전략가의 말이 생각났다.
분명 이런 경우를 상정하여 한 말이었겠지. 그것 외에도 그 엘프 전략가의 강의는 대단히 훌륭했지만, 유독 그게 기억에 남았다.
존경하는 만프레트 경은 그 엘프의 직속 제자라고 했다.
평생 자신의 인생은 많은 혜택을 받아왔다 생각하며 어지간하면 부러운 마음을 가져본 적 없는 타를라지만, 그것만은 부럽게 느껴졌던 기억이다.
어쨌거나, 다행히도 그녀는 배운 것은 잊지 않고 항상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등생이었다.
“알겠습니다, 펠쿠트 백작님. 잠시만 시간을··· 3분 만 요청드려도 되겠습니까?”
“3분? 어째서인가?”
“공세를 위한 조언을 정리할 시간입니다.”
“조언? 하! 설마 내가 공격을 고집해서 나서는 경우도 생각해 둔 것인가? 정말 용의주도하군, 전쟁관의 참모들이란···.”
“...군을 다루는 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 소양입니다.”
“좋아! 3분이든, 5분이든 좋으니 기다리지.”
“감사합니다.”
펠쿠트 벨톤 폰 비덴누벨 백작은 겉으로는 대범한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짜증이 나고 있었다.
참모가 자신의 판단을 거스르고 나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도를 바꾸는 모습이 기가 찼기 때문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자신은 이번 전투에서 세 선봉군 중 하나를 이끌게 된 우선봉 사령관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령부는 제일 덜 떨어져 보이는 여자 참모를 자신에게 배정한 것인가!
처음에는 설마 미인계를 쓰려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고지식할 뿐 재미 없는 여자였다.
분명 자신을 얕보았기 때문이 분명했다.
자신도 폰 자이트리츠의 참모들이 훌륭하다는 것은 몇 차례 전장 경험을 통해 알고는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제발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이름이 허명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제 약관의 나이인 펠쿠트는 평생을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하긴, 그룬발트의 젊은 귀족 중에 아닌 사람이 있겠냐마는.
어린 나이에 선대 백작인 아버지를 잃고 폰 비덴누벨 가문의 영지는 멀리 남동쪽에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상습적으로 그룬발트 제국령을 침공해오던 야만 이교도들을 상대로 몇 번이나 승리를 이끌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허나, 펠쿠트의 야망은 제국 영토의 밖이 아닌, 안쪽에 있었다.
자신도 이런 변경이 아니라 군웅의 각축장인 중앙에서 활동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하다 못해 주변을 흡수해 ‘변경의 패자’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문제는 친분과 외교에는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의 ‘업적’이 문제였다.
주변의 크고 작은 가문들은 죄다 동맹 가문이었으며, 서로 서로가 혼인과 맹약으로 얽혀 있어서 말썽이 생길 건덕지가 없었다.
다행히 어린 나이에 맹주 역할을 맡아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한 공적을 인정 받았고, 덕택에 주변 가문들이 상당힌 지원을 몰아 줘서 현재 상당한 병력을 이끄는 주장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불만을 가질 정도의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자신도 중부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그리고 1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황위 계승의 판도는 바뀌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쨌든, 차기 황제는 디오보르크 공작으로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 이의를 제기하거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26년 만에 등장한, 절반 이상의 선제후에게 지지를 받는 후보자였으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황제와 선제후들의 눈에 드는 전공을 세워 누구보다도 빨리 중앙에서의 입지를 굳히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신에게는 일개 야전군을 편성할 수 있는 규모의 병력과 물자가 있었고, 남동부 세력의 지지도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이룰 수 있는 군사적 재능 또한 있었고. 최소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디오보르크 공작도 노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이다. 그리고 애초에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법이다.
어쩌면 다음 대에는 자신의, 폰 비덴누벨의 차례가 올지도 모른다.
“백작 각하, 작전 조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기다렸네! 어디 들어보도록 하지.”
참모 타를라는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의견을 제시해왔다. 펠쿠트 백작은 팔짱을 끼고 듣기 시작했다.
흠··· 제법 괜찮은 조언이고, 백작 자신이 생각하던 계획과도 일치하는 점이 없지 않았다.
허나 자신은 우선봉군의 지휘관, 상대는 외부에서 온 참모이다.
지휘는 자신의 역할이니, 취할 조언은 취하고 그렇지 않은 조언을 거부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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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일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요새화 된 슈뵈켄의 지휘부에 새로운 보고가 들어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배후의 움직임을 보면 아군을 우회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알겠다. 수상해 보이는 적군을 계속 주시하도록.”
“옛, 공작 각하!”
아르밀 드 브라뇰, 팔스부르의 공작이자 그랑다투아 군 사령관, 게다가 왕실군의 또 다른 원수로서 지난 10년 동안 그룬발트 제국과의 최전선에서 싸워온 노장은 당장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속으로는 상당히 기뻤다. 주력군 끼리는 거리를 두고 하나마나한 공방전만 하는 상황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적도 대군에 대한 보급과 정치적 위험 부담을 안고야 있겠지만, 그래도 무작정 장기전으로 가면 결국 힘든 것은 적지에서 싸우는 엘랑키아 군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단기 결전이라 해도 이만한 대군, 이렇게 넓은 전장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하루 아침에 승패가 갈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빠른 승리로 향하는 실마리를 찾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필경 그것은 작더라도 승리를 거듭하고 전선에서 확고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전황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록, 적군은 초조해지고 스스로의 대군이 만든 함정에 빠져들게 되리라.
‘전황을 뒤집을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라는 달콤한 함정에 말이다.
“적군 전진해옵니다! 동쪽, 3개 보병 연대를 선두로 하고 있습니다! 배후에 기병대의 지원입니다!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러지. 망원경을 주게.”
“엣, 공작 각하!”
아르밀 공작은 자신의 지휘부를 슈뵈켄 마을 거점의 배후, 직할 주력 부대의 중앙에 두고 있었다.
그는 불필요하게 앞장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차피 야전군의 사령관이 되면 전장 전체를 자기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욕심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직접 임명한 중견 지휘관들을 신뢰하고, 언제나 신속하게 보고를 받을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그의 방침이다.
최전선을 떠나지 않겠다 공언한 또 다른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지휘관이었다.
엘랑키아 왕국에 단 둘 뿐인 원수는 이렇게나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밀 공작을 겁쟁이라 생각하는 이는 엘랑키아 전체에 아무도 없다.
그는 ‘불필요하게’ 앞장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반대로 필요하다면? 당연하게도 돌격대의 선봉에서 전장을 이끌었다.
약 10년 전, 현재의 엘랑키아 - 그룬발트 간 국경을 새로 그었던 팔스부르 전투에서, 아르밀 공작은 좌익 지휘관이었다.
당시 그룬발트 제국군 사령관 메이플링겐의 공작과 그 친위 기사들의 돌격에 위기에 빠졌던 다고베르 2세의 본진을 구원했던 것이 바로 좌익의 엘랑키아 기사대였다.
그리고 아직 공작은 아니었던 아르밀 드 브라뇰은 신뢰하는 왕실 기사들의 선두에서 직접 메이플링겐의 장남을 기병창으로 꿰뚫었었다.
그런 전공이 없었다면, 엘랑키아 건국 이래 처음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팔스부르 공작위를 받지는 못했으리라.
“...적은 슈뵈켄을 반포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반대편, 서쪽으로 적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흠··· 싸워 보면 답이 나오겠지.”
직접 눈으로 접근하는 개활지 너머의 적을 살핀 아르밀 공작은 적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슈뵈켄을 반포위해서 단번에 몰아붙이려고 한다기에는, 한쪽 날개만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거점을 무시하고 우회 돌파를 시도한다고 하기에는 병력의 수가 적었다.
어쩌면 그저 전진해서 교전을 시도하는 게 적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최초의 교전은 일종의 정찰 행동일 수도 있으며, 소모전이 벌어진다면 수적으로 두 배나 되는 그룬발트 군이 유리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맞서 싸워주기로 한다. 마지막까지 팔스부르 부근의 보급로를 지키던 아르밀 공작은 후위대로 도착해 한번도 적과 교전할 기회가 없었다.
자신도 적이 궁금하던 차였다.
“지휘는 내가 직접 하겠다. 전투 준비 명령을.”
“옛, 전투 준비명령을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