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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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펑!
타타타타탕! 타타탕!
멀리서부터 포성과 총성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몇몇 굉음은 바로 근처에서 들린다. 적 포탄이 호펜로이테 마을 안쪽까지 날아와 건물을 부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포탄은 계급고하를 가려가며 떨어지지 않는다.
“원수 각하, 적의 공격이 격렬해져서 지휘소가 위험합니다. 잠시 후방으로 지휘소를 물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어떻게 지휘를 하라는 건가. 마을을 빼앗겼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럴 수 없네.”
“알겠습니다 각하. 그래도 조금만 주의해 주시면 저희 참모진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렇게 하겠네.”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과 부원수 조뤼크 드 브라셀노 자작의 대화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전장 한 가운데임에도 전혀 급하거나 흥분되는 점 없이 평온했으며, 마치 차 마시자는 제안과 그 거절로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정정하고 젊은 부하들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듯한 열정이 넘치는 노장 프레니히.
그리고 비슷한 또래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군인이라기 보다는 노련한 집사나 행정관 정도로 보이는 조뤼크 두 사람은 전혀 다른 타입으로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벌써 전장에서 몇 차례나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다.
‘프레니히 원수와 조뤼크 부원수께서 함께 지휘하신다고? 그럼 보나마나 우리가 이겼군!’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온 왕실군 베테랑들도 그렇게 말할 정도로, 두 사람이 함께 쟁취해온 승리의 역사는 결코 얕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명실상부하게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전장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두 장의 카드였다.
다만 직급이 올라가고 전공을 인정받을 수록 함께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은 말하자면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프레니히 백작이 왕의 동생인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의 휘하에서 연대장이자, 사실상 부사령관으로서 종군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뤼크 자작은 북부군의 고문으로서 얼마 전 나우데사로부터 할양받은 국경지대 방어선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마 전, 로스니히 마을에 도착한 그룬발트의 선봉을 기습해 대파한 작전에서도 그랬다.
프레니히 백작이 멀리 남부에서 온 참모와 정예군을 이끌고 우회 공격을 하는 동안, 조뤼크 자작은 나머지 왕실군을 이끌고 본대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왕실군의 최고위 장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엘랑키아 왕국 상층부에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나라 전체가 기사의 나라 취급을 받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유서 깊은 군사 귀족의 후예인 왕국에서 군인이 부족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국왕 직속의 왕실군을 책임지는 인재, 다른 논리와 무관하게 오로지 국왕에게만 충성하는 인재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물론 다른 대귀족 출신 국왕군 장교들이 불충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각자 엘랑키아 어딘가에 대영주으로서 영지를 가지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통의 대귀족이 국왕 직속의 군권까지 가지는 것··· 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지는 이들이 많다.
국왕이 아닌 일개인에게 너무 많은 힘이 몰리고, 사실상 2인자가 되어 버리는 격이니 말이다.
때문에 엘랑키아 왕국 전역에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는 뮈르텔 드 생프랑보 재상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는 형제에게 양보하고 왕실의 일원으로서 평생을 바치는 중이다.
일개 병사로 군 경력을 시작한 프레니히 백작 역시, 전공에 전공을 거듭해 왕실군 내에서 인정받고, 원수직위와 함께 백작위를 수여받은 것이다.
드 루블랭 백작위는 말하자면 왕실이 부여하는 ‘명예직’에 가까우며, 딸린 실제 영지나 영향력은 미미했다.
물론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왕실군 원수라는 직위는, 어지간한 대귀족의 작위보다도 빛나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비슷하게 조뤼크 자작 역시, 이렇다 할 재산이나 명성은 없는 한미한 하급 귀족 집안의 삼남으로 태어나 먹고살기 위해서 군문에 들어왔다.
그리고 프레니히 백작처럼 꾸준히 전공을 세우며 승진, 부원수라는 직위나, 드 브라셀노 자작위 모두 자력으로 손에 넣은 것이다.
다만 국왕이 직접 임명하는 왕실군 원수와는 달리, 원수부 내 직위인 부원수는 현 원수인 프레니히 백작이 임명하는 직위였다.
그래서 원수 수준의 명망과 권력을 가지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왕실에서 수여할 수 있는 작위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귀족 반열에 오르지는 못하는 자작위에 그쳤다.
이를 다고베르 2세는 계속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친우이자 상관인 프레니히 백작 역시, 자신의 몫을 떼어서라도 양보할 수 없냐는 식으로 나올 정도였고.
그러나 정작 조뤼크 자작 본인은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이미 자신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듯,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내가 나이가 좀 더 많으니, 내가 죽으면 자네가 원수가 되어 왕실군을 이끌게. 내 유언장에도 써 놓고 폐하께도 단단히 말씀드려 놓겠으니!’
‘하하, 오래오래 사시면서 계속 이끌어 주십시오. 저는 원수 각하 옆자리가 딱 맞습니다.’
두 사람은 실제로 이런 대화까지도 나눈 적 있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 잘 맞는 동료 이상으로 신뢰하는 친구였고, 둘이 모였을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내는 콤비였다.
콰쾅! 꽝! 뻐엉!
타타탕! 따당! 따다당!
“적이 물러난다!”
“절대 추격하지 마! 진지를 지킨다. 소대당 두 명씩 부상자를 옮기고, 나머지는 재장전!”
“모두 수고했다!”
전황은 나쁘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군의 준비는 확실했고, 적의 움직임이나 전력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지휘할 것도 없었다.
다만 적 역시 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서, 처음처럼 우르르 몰려와서 아무 의미도 없이 병력을 소모하지는 않는다.
조심스럽게 대열을 짜고, 그나마 요새의 사각에서 접근했으며, 취약점을 노리고 집중적으로 병력을 투입해왔다.
하지만 사각이라고는 해도 ‘그나마 사각’이었지, 호펜로이테 수비군 역시 그만한 준비를 해 두었다.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거의 절반 가까이 높은 방벽을 가진 ‘약점’ 앞 비탈에는 기어 오르다 실패한 그룬발트 보병들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위험한 순간도 없지는 않았다.
실제로 잡동사니로 쌓은 바리케이드 한쪽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는데, 그룬발트 군의 폭발물이 터진 흔적이었다.
일시적으로 구멍이 뚫렸고, 거의 백 명에 가까운 그룬발트 군이 쏟아져 들어왔었다.
만에 하나라도 불 붙은 화약 통이 바리케이드 안쪽에서 폭발했다면 더더욱 큰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고, 습격해온 적은 절반 정도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격퇴되었다.
“측면 거점을 지키는 병력의 피로가 심하겠군. 교대할 수 있나?”
“예,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치열했던 방어선에서 싸웠던 왕실군 병사들이 소대 단위로 교대하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병사들이, 이제 막 전선으로 투입되는 예비대 동료들과 지나치며 칭찬과 응원, 때로는 악담을 주고 받는다.
여전히 힘이 넘치는 모습으로 여유있게 남은 탄약을 나눠 주거나, 여전히 적의 피나 머리카락 같은 흔적이 남은 백병전용 무기를 넘겨주기도 한다.
이들은 특별히 전설의 용사 같은 이들은 아니다.
하지만 전원이 엘랑키아 내에서 누구보다도 경험이 풍부한 왕실군의 보병들이며, 또 일부는 프레니히 원수가 직접 키운 가문의 정예들이다.
적의 공격 전술이 잘못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호펜로이테는 이런 식으로 ‘효율적’으로 약점만을 노려 함락할 만큼 호락호락한 요새가 아니며, 설령 방벽이 모두 무너지더라도 수비군이 쉽게 무너지지도 않을 것도 분명했다.
아마 적이 이것을 깨닫는 것은 시간과 병력을 상당히 투입한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나저나··· 원수 각하께서 데리고 오신 젊은 참모의 판단이 주효했군요.”
“아아, 에트 경 말인가? 그런 친구가 아군이라 정말 다행이네.”
“예, 에트 경이 데리고 다니는 여자 포술장의 지적도 날카로웠습니다. 덕분에 적 포화가 훨씬 줄어든 것 같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 거의 완성된 방어선을 점검하던 에트와 부관 첼레스티나는 마지막으로 몇 가지 보강작업을 진행했다.
그 중 하나, 조뤼크가 말한 첼레스티나의 지적이란 호펜로이테 마을을 노리고 교차 사격을 준비할 그룬발트의 포병대를 저격하는 것이었다.
교차 사격이란, 정면이 아닌 비스듬한 측면 두 군데에서 한 지점을 향해 공격하는 전술이다. 다른 명칭인 십자포화라고 하기도 한다.
당연하지만 완전 정면 보다는 비스듬한 측면에서 쏴대는 것이 훨씬 위력적이다. 같은 표적일지라도 더 큰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늘어나니까.
심지어 두 장소 이상에서 한 군데의 화집점을 노리고 포격이 쏟아진다면, 실질적인 피해 이상으로 얻어맞는 쪽은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다만 생각만 하면 완벽할 것 같은 이 전술도 명확한 약점, 공격자가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정면이 아니라 비스듬한 측면에서 사격하기 때문에, 최전선에서 가까운 곳에 포대를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포병대를 보호하는 진지를 건설하기도 쉽지 않고, 설령 건설했다고 해도 정말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전선에서 가까운 만큼, 상대 측이 위치를 예상하고 있다면 대포병 사격에 먼저 당할 위험성도 있었다.
리스크를 지고 화력 지원을 위해 포대를 위험 지역까지 끌고 왔는데, 몇 발 쏴보지도 못하고 역으로 적의 포격을 뒤집어 쓰고 포병과 포를 잃기까지 한다면 그런 손해가 또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룬발트 군은 첼레스티나가 예상했던 몇 군데의 후보 지점 중 한 곳에 포대를 건설했다.
결국 몇 발 쏴 보기도 전에, 미리 대응을 준비하고 있던 엘랑키아 포병대의 재빠른 반격을 받고 서둘러 후퇴했다.
적도 후퇴를 선택하는 판단이 빠르기는 했지만 최소한 1문 이상의 야포가 파괴된 것은 확인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손실이 컸는지, 병력 교대시에 떨어지는 적의 포격은 그 힘이 확실히 줄어들어 있었다.
만약 미리 적의 포대 설치 지점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대응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걸렸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런 어중간한 위치를 표적으로 준비하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포를 옮기고, 조준을 새로 하는 시간 동안 적은 이미 포격을 개시했을 테고.
하나의 전장을 담당한 지휘관으로서 상대의 시도를 미리 준비해서 시작도 못하게 했다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이다.
결국 그렇게 또 하나의 카드를 잃어버린 그룬발트 군은 어쩔 수 없이 호펜로이테 마을 측방의 약점에 대한 보병 공격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기묘한 전투로군··· 서로 몇 만이나 대군을 동원해 놓고 대표로 소수만 뽑아서 싸우고 나머지는 구경하고 있는 꼴이니···.”
“그렇군요. 그룬발트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가요?”
프레니히 백작의 눈에 멀리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그룬발트 보병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엎드린 이유는 물론 포격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새까만 꼴을 보니 1만은 훌쩍 넘는 병력이 분명했다.
요새화 된 마을을 두고 벌어지는 전투는 물론 치열한 것이었지만, 그래봐야 1~2개 연대 정도가 고작이다.
기세 좋게 전진해온 나머지 병력은 마을에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엘랑키아 군 역시, 적이 마을을 우회해오는 경우에 대비해 후방에 전투 준비를 마친 주력군을 배치해놓고 있었다.
거대한 야전이 벌어지고, 마을은 그 측면이나 중앙을 지키는 거점이 되는 싸움이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적이 마을에만 집착하는 바람에 나머지 전병력이 놀고 있는 꼴이 된 것이다.
이런 대치를 통해 혹시라도 적이 얻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는 이상, 시간을 끈다고 특별히 유리해질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무리한 공격 만큼이나, 소극적인 대처도 사기에는 악영향을 미치고 말이다.
“일단 다른 마을 방어선은 어쩌는지 궁금하군. 전령을 보내 확인해주게.”
“알겠습니다, 원수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