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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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을 가득 채운 그룬발트 군 보병 대열이 묵묵히 발걸음을 맞춰 나아가고 있었다.
슈왁!
퍼걱!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주먹보다 조금 큰 포탄이 날아와서는 땅바닥을 한 번 튕기고 지나쳐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운 나쁜 선도 부사관 하나가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휘말려 버렸을 뿐.
투구와 함께 목 위가 사라져 버린, 젊은 남자의 잘려나간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고장난 인형처럼 무릎부터 주저 앉는다.
후속하는 보병들에게 기준이 되기 위해 어깨에 바짝 붙여 들고있던 창대가 그제서야 바닥에 떨어진다.
새싹이 자라기 시작한 초원에 뜨거운 피가 점점이 흩어진다.
“흐아아아···.”
“으으으···.”
하필 그 뒤를 따르다가, 죽은 부사관의 피와 더 소름끼치는 찐득거리는 조각들을 뒤집어 쓴 병사들이 몸서리를 친다.
동료의 혈육이 더럽거나 무서워서가 아니다.
만약 포탄이 조금만 더 가까이 떨어졌거나, 바닥을 스치듯 튀는 각도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작은 돌이라도 맞아 옆으로 틀어졌다면···.
방금 머리 위로 지나간 포탄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자신들이었을 테니까.
퍼억! 파가가각!
“끄아아앗!”
“흐어억!”
“안 맞았어! 침착하라!”
그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또 다른 포탄이 옆으로 스쳐 지나간다. 주변 병사들이 일제히 움찔하며 몸을 숙인다.
이번에는 흙바닥의 작은 자갈을 부숴 그 파편을 흩뿌린다.
갑옷에 맞으면 귀가 아플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나고, 맨살이나 옷 위에 맞으면 멍이 들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옆으로 빗겨 갔으니 천만 다행이다. 만약 대열 안쪽으로 떨어졌으면 저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쾅! 퍼엉! 퍼펑!
뻐엉! 콰과광!
물론 그룬발트 군 포병대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아군 지원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아무 보호 수단도 없는 평원에 방열한 포병대가 적진을 향해 포탄을 쏘아 보내는 모습을 보병들이 흘끗흘끗 바라본다.
포탄은 굉음과 매캐한 연기를 남긴 채 평원을 가로질러 날아가 적진에 떨어져 자신의 역할을 다 한다.
적의 바리케이드 일부가 부서지고,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여기서도 보인다.
분명 고마운 일이다. 포병대를 지날 때 환호를 보내는 병사들도 있다.
“이제 진짜가 온다!”
“정신 꽉 붙들어 매! 걸을 수 있는 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 중대는 죽어도 적진에 가서 죽는다!”
하지만 숙련된 고참병과 장교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투퉁, 퉁. 퉁! 퍼엉!
퍼퍼퍼펑! 뻐벙!
마치 이쪽에서 쏘아낸 포탄에 답례라도 하듯, 평원 건너편의 엘랑키아 방어선 여기저기에서 하얀 포연이 피어 오른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 올랐던 거뭇거뭇한 점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온다!
포탄은 목측하기 어려운 속도로 날아가지만, 의외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바로 포탄이 날아가는 쪽에서 보거나, 날아오는 쪽에서 보는 경우,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계속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이다.
그러니 적이 쏜 포탄이 눈으로 보인다는 것은 정확하게 이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위하여!”
“으읏, 흐으으으!”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위하여어어!”
“침착해! 한 번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포탄은 또 떨어지지 않는다!”
“진정하라고! 멈추면 여기서 다 죽는다!”
콰콱!
“모두 겁먹지 마라, 어차···.”
퍽! 투카칵! 촤악!
상체를 반쯤 돌려 뒤따르는 부하들을 독려하던 장교의 옆구리를 뜯어내듯 뚫고 지나간다. 껴입은 흉갑이고 가죽 조끼고 아무 소용도 없었다.
피격 순간 내장의 절반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척추가 부러진 장교는 즉사했으나, 그 몸은 거의 2미터를 날아가 뒤따르던 병사들의 발 앞에 걸레짝처럼 널브러진다.
“멈추지 마! 여기서 머뭇거리면 다 뒈진다고!”
“전진! 전진!”
병사들이 움찔거리며 발을 멈추자 순간적으로 대열이 어그러지고, 간부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멈춘 병사들을 밀치며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그들이라고 딱히 더 안전한 장소에서 지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은 포탄에 맞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것처럼, 무너질 뻔 했던 대열을 곧바로 복구해낸다.
그들이라고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이 그것이기에, 그리고 시간을 끌면 더더욱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퍽! 슈욱!
카카칵! 퍼퍽, 쾅!
“우욱!”
“크아악!”
마치 그게 신호탄이기라도 했다는 듯, 몇 발이나 되는 포탄이 연이어 떨어진다.
일부는 운 좋게 머리 위로 날아가거나, 주변에 스쳐 지나갔지만 나머지는 흔들리기 시작한 보병 대열 속으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사정없이 주변을 찢어 놓는다. 상당한 양의 화약이 일순간에 타오르면서 뿜어낸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날아온 쇳덩이 앞에 인간의 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으읍, 커허억!”
“끄아아아아! 으아아, 으아!”
“사, 살려줘, 아아! 아프다고오!”
한 번에 죽지 않은 자들의 비명이 울려퍼진다.
포탄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묵묵히 앞만 보며 나아가는 밀집 대열 뒤로 비참한 시체와 끔찍한 부상자들의 몸이 점점이 남는다.
마치 보병 부대라는 거인이 나아가려면 불가피하게 남겨야 하는 피투성이 발자국이기라도 한 것 처럼.
“멈추지 마! 부상병은 의무대에 맡겨라!”
“하, 하지만···.”
“명령이다! 지금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어!”
“첫 사격을 견뎠다! 모두 장하다!”
장교와 부사관들이 망설이는 병사들을 때로는 다독이고, 때로는 닥달하며 앞으로 몰아댄다.
뒤에 남겨진 생존자들은, 정말 운이 좋다면 의무대의 도움을 받아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남은 평생을 몸의 한 부분을 잃고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나마도 이는 ‘비교적 깔끔한’ 상처를 입은 자들의 경우이고··· 상처라기 보다 ‘몸이 열렸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들은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이다.
아마 대부분은 군의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요행히 군의관이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치료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상처’ 였기 때문이다.
“크흑, 컥! 사, 살려··· 흐으윽!”
아군을 따라 가려던 것인지, 혹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려던 것인지. 피를 토하면서도 움찔움찔 움직이던 병사가 단말마와 함께 움직임을 멈춘다.
그의 바로 옆에는 포탄에 맞는 순간 흉곽이 뚫려버려 즉사한 병사가 자신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이들 중 누가 운이 좋다, 누가 운이 나쁘다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비극을 뒤에 남겨 두고도 기어코 앞으로 나아간 보병 사각 대형은 확실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더 이상 자신들을 향한 포탄이 별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 짧은지만 소중한 행운의 시간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본인들은 몰랐겠지만, 방금 자신들을 노리고 있던 엘랑키아 포병 지휘관이 후속하는 다른 부대를 노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선두 부대를 끝까지 괴롭히는 선택을 하는 대신, 뒤따르는 부대가 더 위협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일까.
혹은 처음부터 ‘여러 부대에 효율적으로 골고루’ 피해를 입히는 판단을 했을수도 있겠다.
어차피 노릴 표적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아무튼 지금 호펜로이테 마을 동쪽으로 펼쳐진 초원은 그룬발트 보병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결국 불운을 동료들에게 떠넘긴 셈이었지만, 이미 많은 피를 흘리고 전진해온 그들은 짧은 평화를 즐길 수 있었다.
허나 그 평화는 불과 2분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으며, 비명을 삼키며 나아가던 병사들의 대부분은 그 때가 자신들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모두 고개 들어!”
“적이 눈 앞에 보인다! 무기를 준비해라.”
“대열을 갖춰! 적 기병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포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선형 대형을 유지하면서 왔다.
만약에라도 엘랑키아 기사가 돌격해오면 큰일이다.
하지만 병사들의 마음속에는 그런 게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달라 붙어서, 차라리 백병전이 시작되기를 바랄 뿐이다.
백병전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바짝 달라붙으면 포격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겠지. 그만큼 장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공포는 심각했다.
“엘랑키아 놈들이 보인다!”
“멋대로 쏘지 마, 바보들아!”
“제대로 한 방 먹여주고, 울타리를 넘는다!”
창병들이 나란히 창대를 들어 대열을 갖추고, 다소 어수선하던 총병들도 다시 횡대를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오는 길에 적지 않은 동료를 잃은 탓에, ‘익숙한’ 형태로 대열을 짤 수는 없었다. 옆에는 낯선 동료가 서고, 호령하는 장교도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잠시 잊고 있었던 적에 대한 분노를 끌어 오르게 만든다.
전쟁이니 어쩔 수 없다··· 라는 생각은 이미 공포와 분노로 가득해 이성이 아득해진 상황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모두 불 확인해! 사격 준비!”
“발은 멈추지 마!”
적의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다. 겁쟁이처럼 방벽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뭐라 외치는 엘랑키아 장교의 모습이 보인다.
그저 당한 만큼 갚아준다, 최소한 이번에는 우리 차례다! 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앞질러 버렸다.
“대열 정돈해!”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위하여!”
“흐아아앗!”
공포와 혼란으로 어수선했던 대열이 순식간에 반듯해진다. 적을 앞두자 다시금 냉정함을 찾은 것인지.
···하지만.
그 냉정함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몇몇 감이 좋은 장교나 숙련병들은 이상하다는 점을 느끼기는 했다.
왜 주변에 다른 아군이 보이지 않지?
왜 우리 중대만 앞으로 이렇게나 나와있지?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다른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적진에 일제 사격을 박아주고, 방벽을 타넘는다는 생각 밖에는···.
“총병 앞으로오! 사격 준비!”
“사격준비이!”
하늘로 향했던 총을 가슴 앞에 드는 순간···.
타타타탕! 타타탕!
펑! 뻐엉!
타타타타타탓! 따다당! 따당!
눈 앞이 하얀 연기로 폭발하듯 가려졌다.
뭔가가 날아가며 나는 쉭쉭대는 소리는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 같기도 했고, 뱀이 위협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몇 명은 반사적으로 총구를 적 방향으로 향하고 방아쇠를 당기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으악! 으아아아악!”
“아, 안보여! 눈이 안보여!”
“끄으, 내 다리가아···.”
그들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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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로 진격해온 적은 어떻게 되었지?”
“기다리던 아군이 일제 사격으로 격파했습니다. 절반 정도는 쓰러지고 나머지는 도망치고 있습니다.”
“으으음, 용맹하지만 어리석은 적이로군!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200년 전 쯤이라면 용자로서 이름을 떨쳤겠으나···.”
“경험이 적은 자들이 자기네 역량도 파악하지 못하고 전공을 세우겠다며 앞장섰던 게 아니겠습니까?”
전선의 중앙, 호펜로이테 마을에 지휘소를 두고 있던 프레니히 드 루블랭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방금, 남다르게 빠른 속도로 돌격해온 적의 움직임은 기묘했다.
주변에서 쏘는 화력을 이리저리 피하기라도 하듯, Z자 형태로 움직이며 동료들에 비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허나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호펜로이테 진지에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차라리 평범한 개활지에서 격돌한 회전이었다면 창이라도 한 번 찔러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두려움을 모르고 선두로 다가온 적 부대는 기다리던 엘랑키아 군의 첫 사격을 맞고 완전히 와해되었다.
잘 쳐 줘야 2~3개 중대 규모인 적에게 두 차례에 걸쳐 거의 600정의 화승총과, 2문의 경야포의 지근거리 사격이 쏟아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오히려 여기까지 다가온 용맹함··· 혹은 무모함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고오얀 녀석들··· 쯧.”
프레니히 백작은 무모했던 적을 나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선봉으로 달려온 용기에는 솔직히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에게 명복을 빌어 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재장전! 재장저언!”
“명령 전에는 사격하지 마라!”
“고개 들지 마! 턱 날아간다!”
방금의 용맹했던 적은 갑작스러운 해프닝에 가까웠고, 시야를 가득 채운 적의 주력이 이제 서서히 마을에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프레니히 백작은 방금 선봉으로 달려온 적의 ‘용기’가 실은 우연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운 좋게 포화의 중심에서 벗어난 데다가, 보조를 맞춰야 할 선도 장교들이 모조리 죽는 바람에 대열을 이끌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이 없었다.
그 결과 술 취한 마냥 좌우로 흔들리듯 행군해 왔으며···.
현재 위치를 유지하라는 연대에서 내려온 지시도 받지 못했다.
그 결과가, ‘목숨을 가리지 않은’ 용맹한 선봉 대장의 역할이었다.
아마 공포에 질려 전장 어딘가를 헤매며 도망치고 있는, 절반 쯤 되는 생존자들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나면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이도 없으리라.
겨우 중대 한두개에 신경을 쓰기에는, 이 전투는 너무도 거대했으니까.
타타탕! 타타타탕!
쾅! 퍼펑!
“쏴라! 모조리 쏴버려!”
“창병 대기해! 언제 적이 넘어올지 모른다!”
여기저기에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린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군이라는 이름의 파도를 호펜로이테라는 이름의 방파제가 막아서는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