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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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셸 드 라글랑은 새벽녘의 서늘함이 좋았다.
“모셸 경, 국물이 끝내줍니다. 드시겠습니까?”
“아, 고마워.”
거기에 따뜻한 국물까지 한 잔 더해지면 금상첨화였다.
다행히 준비를 충분히 한 이번 원정인지라, 엘랑키아 군에게 식량이 부족한 일은 없었다.
절인 고기가 들어가 너무 기름진데다 짜고, 야채는 너무 익어 흐물거리며 입술에 달라 붙었지만 새벽 당직을 서고 난 직후라는 타이밍이 맞물려 맛있게 느껴진다.
오래 쓴 투박한 나무 그릇에서는 퀘퀘한 냄새가 조금 났지만,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처음 전방에서 병사들과 섞여서 생활할 때는 솔직히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밥을 나누어 먹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형인 제르티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두 형제는 이번 전쟁이 두 번째 출전이다.
지난 엘랑키아 남부 이단 토벌 전쟁에서도 형제는 나란히 참전했었다.
비록 샹다메리의 패전이라는 형태로 끝나기는 했지만,
드 라글랑 후작가의 후계자인 큰형 제르티에 드 라글랑은 당시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 휘하의 장교로 참전했었고.
막내인 모셸은 무려 사령관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의 종자이자 부관으로서 특등석에서 전장을 조망하는 특권을 누렸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형인 제르티에는 드디어 염원하던 연대장이 되어 국왕 폐하의 보병 연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연대장이 아니라, 왕실군 원수로서 사실상 군을 이끌고 있는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의 원수부 참모로 참전하고 있었다.
자신은 에티엔 공작의 종자로서 계속 모시고 싶었으나, 사실상 칩거에 들어가던 그는 종자를 둘 수 없다며 대신 원수부에 추천해 주었었 던 것이다.
아버지인 드 라그랑 후작가의 주인은 아들들이 군문에서 출세시키는 데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왕실군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데 아낌이 없었다.
다만 아직 책임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다. 왜냐하면 그는 간신히 성인으로 인정 받는 나이인 16살이었기 때문이다.
키나 덩치도 또래에 비해 조금 작은 편이기에, 직속 상관인 프레니히 백작도 자신을 부하라기 보다는 손자 보 듯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직 한 사람 몫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기는 했으나 그렇다면 그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열심히 하고 있었다.
최대한 병사들과 친해지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기는 했다.
···어쩐지 병사들이나 부사관들도 자신을 조카나 동생 보듯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기는 했지만.
“망루 인원 교대하겠습니다, 모셸 경.”
“확인했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전선의 최전방인 호펜로이테 마을에서도 최전방이었다.
마을 입구의 커다란 창고를 개조한 이 건물은 상인과 같은 외부인의 숙소 역할도 했기 때문인지 튼튼한데다 쾌적한 편이었다.
그래서 돌아가면서 당직을 맡은 원수부 장교들의 임시 숙소가 이곳에 있었던 것이고.
최소한 여기 배치된 병사들은 마을의 좁아터진 골목길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자는 동료들 보다는 신세가 좋은 편이었다.
여기도 복도와 방, 창고의 빈 공간을 가리지 않고 병사들로 가득했지만 최소한 지붕 아래에서 잘 수는 있었으니까.
원래 폴름스로 향하는 상인과 운송업자들이 일정을 조절하며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에는 엘랑키아 군의 예비 무기와 보급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폭발 위험이 있는 화약은 아무래도 최전방이라 위험해 후방 탄약고에 보관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아침이 되어 짧게라도 쉴 수 있으리라.
폴름스에 도착한 이후 몇 주는 정말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전투 병과 대다수가 포위망가 방어선 건설에 동원되다 보니, 덩달이 참모 장교들이 그 빈 자리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 몇몇 군데를 빼면 공사가 마무리되고 다시 전투 배치가 시작된 이후로는 어이가 없을 만큼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계속되고 있었다.
선배 장교는 ‘대치 상황에서는 지루함에 지는 순간 적에게도 지게 된다’고 말했는데,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한밤 중의 어둠 속에서 더욱 불안했다.
혹시라도 어둠 속에서 빛을 숨기고 기어서라도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방 여기저기에 피워 놓은 화톳불의 그림자에 잘 숨어서 잠입하는 자들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더더욱 눈을 부릅뜨고 캄캄한 어둠 속을 노려보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어둠을 두려워한다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어둠에 숨은 미지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이 먹은 지금도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자조의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 북동쪽의 마을 로스니히에서 프레니히 백작 직속의 왕실군은 새벽 안개에 숨은 기습공격으로 적을 대파시키지 않았던가.
어둠속이라 적군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 못한 기습이었다. 하지만 약 7천 명의 왕실군은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그룬발트 군을 완전히 격파했다.
그때 지휘부에서 이를 지켜보던 모셸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전율을 느꼈었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침착함과 여유를 잃지 않던 노장 프레니히 원수의 모습에서.
그리고 수하들이 ‘콘도티에레’라고 부르던 남부 출신 지휘관의 막힘 없는 지휘와 대처에서 말이다.
이 사람은 나와 눈 구조가 다른가? 안개 속을 뚫어보기라도 하는 것인가?
어떻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부대를 이끌 수 있는 거지?
저 사람은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다··· 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거의 질투에 가까운 분함을 느꼈었다.
어쩌면···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저런 걸 하지는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체념에서 오는 분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히려 해가 떠오르자 마음이 편해졌다. 최소한 예상하지 못한 기습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어? 대장님? 모셸 경? 잠깐 여기 좀 보십쇼!”
“무슨 일인가?”
“적이 대열을 짜고 있습니다만···.”
모셸은 나무 판자를 끼워 보강한 창문으로 달려가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멀지만, 눈이 부실 정도 반짝반짝 빛나는 빛무리가 보인다.
잘 손질 된 무기와 갑주에 아침 햇빛이 반사되는 것이다. 적이 병력을 집결시켜 대열을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모셸과 주변의 분위기는 그렇게 급박하지는 않다.
어차피 요 며칠, 아침마다 있던 일이다. 적은 아침마다 평원 저편에서 대열을 짜고 이리저리 행군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음··· 오히려 밤 하늘의 은하수를 낮에 보는 것 같아서 멋지다는 생각도 막연하게 했었는데.
그런데 방금 모셸을 불렀던 관측병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뭔가 특이한 사항이라도 있나?”
“그게 말입니다··· 왠지 평소보다 좀 가깝지 않습니까? 숫자도 좀 많고··· 어, 저쪽에서도 뭔가 나오고 있습니다.”
“흠···.”
그 말에, 모셸은 가방에서 접이식 망원경을 꺼내 적진을 살핀다. 주디칼리에서 만들어진 최신식 명품이라며, 다시 전장에 나간다는 말에 누님이 선물해준 물건이었다.
테두리의 은과 놋쇠 장식이 쓸데없이 화려했지만, 확실히 멀리까지 잘 보이긴 했다.
평소처럼 여러개의 선형 대형을 갖추고 있는 적들··· 허공에 선이라도 그어놓은 것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선 창날들···.
“...전령, 사령부에 전령을 보내라.”
“뭐, 뭐라고 보낼까요?”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평소보다 숫자가 많고, 이쪽을 향해 접근하고 있다고!”
“알겠습니다! 비상종도 울릴까요?”
“...그건 잠시 두고보자. 우선 사령부에 전령부터 보내도록.”
“옙!”
매일 아침이 되면 점호라도 하듯, 과시라도 하듯 포격 사거리보다 먼 거리에서 기동 훈련을 하던 적이다.
그러니 아마 오늘도 똑같은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평소 아침에 보이던 숫자보다 서너 배는 더 많아 보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명백하게, 그 선두는 이쪽을 향해 행군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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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퍼펑!
“시작되었나!”
“아직 장거리 관측사격일 것입니다, 백작님.”
나는 호펜로이테의 수비를 책임진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과 함께 마을 외곽으로 말을 달렸다.
마을 외곽에 목책을 설치하고 있던 병사들은 모르는 이가 없는 노장이 빠르게 지나가자 놀라서 경례를 해야 할지 일을 계속 해야 할지 당황하는 것 같았다.
마을을 겹겹이 요새화하고 병사들을 배치한 것은 좋았으나, 애초에 지휘소를 설치할 만한 높은 건물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기가 막힐 정도로 많군!”
“그렇군요. 3개 연대··· 아니 4개 연대가 선두인 진형으로 보입니다.”
프레니히 백작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이미 양군 사이의 무인지대를 절반 정도 거침없이 지나고 있는 적의 숫자는 너무, 너무 많았다.
정면은 물론, 왼쪽도 오른쪽도 빽빽하게 적으로 가득했다.
최근 진행한 작전회의에서는 적은 한쪽 측면에서 우선 공격을 개시하고, 나머지는 관망하거나 순차적으로 공격을 이어가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했었다.
그 편이 통제하기에 유리하고, 아군의 화력을 시험하며 대책을 세우는 한편, 불균형한 압박에서 오는 방어선의 부담 또한 줄 수 잇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이 틀렸다.
적은 모든 전선에 걸쳐서 일제히 병력을 전진시키고 있었다.
“적은 이대로 호펜로이테 마을을 통해 공격해오려는 것일까, 에트 경?”
“아마 2차 공격개시선을 설정해 한 번 멈출 겁니다. 그리고 전체 방어선, 모든 마을에 동시에 공격을 시작하려는 속셈 같습니다.”
“같은 시간에? 허허, 병력 우위를 이용해 우리를 정신 없게 만들려는 것이겠구만!”
“예··· 아군에게 자기들이 얼마나 대군인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룬발트 놈들에게 전쟁은 머릿수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겠군!”
프레니히 백작이 분기탱천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적의 의도를 읽어내기 위해 애썼다.
이 노장이 저러는 것은, 평원을 가득 채운 적의 대군을 보며 압박감을 분명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럴 정도인데, 전방에서 적을 기다리는 병사들은 더더욱 그러겠지.
지금 내 손 안의 총을 쏘면 적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 부지런히 장전하면 몇 명 정도는 더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안 나면 어쩌나?
나는 아군과 적의 파도 사이에 끼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나도 느껴본 절망감이다. 아마 최전선에서 적을 기다려본 인간은 누구나 한 번 쯤은 겪어본 비논리적인 감정이리라.
그걸 적은 마침 두 배에 가까운 압도적인 병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살짝 위화감이 들었다.
전장에 표출된 전술적 모습에 무언가 숨어있을 것 같은, 내가 놓친 게 있는 건 아닐까··· 에 가까운 생각이다.
왜냐하면, 지금 적의 병력 전개 방식은 결코 ‘효율’적인 방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략 중대 병력인 100명을 횡대로 늘어세우는 것도 무척 힘들다.
그런데 그걸 발 맞춰 일정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 지속적인 훈련과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들의 지휘가 없으면 쉽지 않다.
훈련소에서 100미터만 가도 리듬이 꼬여 지리멸렬해지는 모습이 흔히 나오니까.
그런데 그걸 수만 명이 일제히 한다? 한 쪽 끝에서는 반대편 끝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 결과로 얻는 이득이 막대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당장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병력은 괜한 체력 낭비일 수도 있으니까.
전투에서 정면이 넓은 것이 대체로 유리하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그렇다고 넓으면 넓을 수록 유리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뭐··· 혹시라도 보조를 잘 못 맞춰서 이웃 연대와 진격로가 겹치거나 중대가 뒤섞이거나 하면 그런 망신이 또 없으니.
보통은 순차적으로 행군하거나 사선 형태로 행군해서 각 중대와 연대는 서로가 서로의 기준이 되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은 ‘굳이’ 묘기와도 같은 어려운 공세를 시작했다. 이는 전체 부대의 높은 기강 뿐 아니라 고도로 효율적인 지휘부 없이는 시행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도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무슨 생각일까···.
잘난 척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고도의 전술적 ‘시위’를 해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리라.
무리하거나 허세를 부려도 상대가 인지를 못하면 괜한 헛수고에 노력 낭비가 아니겠나?
“어··· 설마?”
“음? 에트 경? 무슨 일 있나?”
“아, 아닙니다, 백작님. 저는 아우페브라즈의 폐하께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하핫, 욕심 같아서는 여기 묶어두고 이 늙은이를 보좌해 주었으면 하네만, 오늘은 더 중요한 폐하의 사령부를 잘 부탁하네!”
“예! 무운을 빕니다, 백작님!”
나는 방금 떠오른 낯뜨거운 생각을 진정시키며 말머리를 돌렸다. 프레니히 백작과 헤어져 아우페브라즈로 향한다.
이런 큰 전투는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되니, 중앙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분석하고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투라는 것은 양측 사령관 끼리의 대화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전 전투 기동도, 돌격시 접근하는 각도도, 사격을 개시하는 타이밍 하나 하나가 낱말이며 표정이고, 손짓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언젠가 스승님께서 해 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누군지도 모르는 적장이 설마··· ‘나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이런 개전 방식을 선택했겠어?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창피해서라도 주변에 말 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며 말에 박차를 가한다.
국왕 폐하니 왕실군 원수니 하는 높은 분들만 만나다보니, 자의식 과잉이 생겼나보다. 사람이 겸손하게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