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 폴름스 전투, 첫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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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이 머지 않았다’
폴름스 주변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엘랑키아 왕국군도, 신성 그룬발트 제국군도.
사령관에서 일개 졸병까지도 말이다.
아마 어쩔 수 없이 피난 왔다가 폴름스에 갇힌 민간인들도 마찬가지리라.
실제로 지휘부를 통해 작전 일정을 공유받은 경우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전장 부근에 있는 인간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마을을 지키며 방어선을 만들고 있는 엘랑키아 병사들은 벌써 며칠 동안이나 들판 건너에 끝도 없이 늘어나는 그룬발트 군의 진영을 보고 있었다.
그 숫자는 아직도 늘어나고 있었으며,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 머무는 상대까지 포함하면 분명히 더 많으리라.
전투 직전의 묘한 고양감과 공포 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이는 것을 느끼며 부디 이번 전투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기를 기도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룬발트 군 역시, 부대를 오가는 전령의 숫자와 빈도가 거의 세 배로 늘어나는 것을 보며 결전을 예상했으며···.
병력 배치가 이전과 다르다는 사실 또한 모두가 인지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목표와 기한이 정해져 있었을 뿐이라면,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구역까지 세세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위치에 도달했을때···.
병사들은 알게 된다. 자신은 결전의 날 이곳에 배치되어, 초원을 가로질러 멀리 보이는 엘랑키아의 진영을 향해 진격하게 되겠구나, 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침 전장은 그룬발트 동부 대평원 지대의 일부, 사람 무릎보다 높이 올라오는 것은 드물게 자라는 작은 수풀지대를 빼면 아무것도 없는 대평탄 지형이다.
양측 병사들이 마주 보는 몇 킬로미터의 공간에는 오히려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상상력을 자극하게 된다.
불명확하지만 시각으로 보이는 정보, 어설프게 소문으로 주워 들은 정보가 복합적으로 불길한 생각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저 울타리 너머에 엘랑키아 군은 얼마나 있을까.
포격으로 로델베르크와 폴름스 성벽을 누더기로 만들어 버렸다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준비를 하고 있을까.
결정적으로 이 아무것도 없는 개활지를 가로지르며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적진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하게 될까.
혹시라도··· 그 중에 자신이 끼어 있지는 않을까.
지금까지는 운이 좀 더 좋은 편이었지만 드디어 내 차례가 오지는 않을까.
결전을 앞두고 심장이 죄어 오는 병사들이 찾는 것은 종교가 주는 안식, 혹은 회피였다.
“주신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최초의 승리자 검의 대리인일지니, 주신의 용사를 따르는 그대들 또한 주신의 축복아래 있노라···.”
“지상을 굽어 보시는 영께서 그대의 검을 예리하게 하시고, 그대의 갑옷을 준비되게 하시느니라. 또한 그대의 팔과 다리를 강하게 하시고, 그대의 눈을 멀리 보게 하시느니라···.”
“부디 그대의 장병들에게 싸우는 법을 깨달을 지혜와, 적의 방패를 깨부술 완력과, 적의 공격에 맞설 용기와, 승리를 누릴 명예를 주소서! 그대의 장병들이게 영혼의 수호를 내리소서!”
성직자들이 전투를 앞두고 휴식하는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기도문을 읊으며 그들을 안정시키는 한편, 영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좀 더 ‘독자적인’ 이론을 주장하며 강론을 펼치는 수도사들도 종종 있었다.
“엘랑키아의 군대는 여기서 패배할 수 밖에 없다! 폴름스의 두 그루 세계수가 엘랑키아의 무도한 왕과 그 병사들의 묘비가 되도록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대들은 어째서인지 아는가? 자네는 알고 있나?”
“그, 글쎄요···.”
“그 이유는 바로 이단을 배격하지 않고 오히려 품었기 때문이니라! 남부의 검은 마녀! 블란도키아의 대립 성녀! 지옥에서 불러 올린 마왕과 간음한 탕녀! 이를 처단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수하에 들어가더니, 오오! 주신의 철퇴가 두렵지 않느냐, 엘랑키아의 불경한 왕이여어!”
“수도사님! 마왕은 그··· 꼬추가 두 개라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럼! 그렇고 말구! 겨우 두 개 뿐이랴, 열 개든 백 개든 얼마든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여자가 흠뻑 빠지지 않고 버틸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푸하하하하하!”
“오오오오! 장난 아닌데!”
누더기가 된 승복을 입고, 유난히 두껍고 울퉁불퉁한 지팡이를 휘두르는 거지꼴의 노인이 떠드는 강론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 주변에 자리를 깔고 앉거나, 오며가며 서서 듣는 병사들의 수는 거의 몇 개 중대는 될 것이다.
주신교 기준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강론 내용을 보고 들은 주신교의 성직자들은 혀를 찼지만, 전장이라는 특이 상황에서 굳이 막으려 하지는 않았다.
교단에서 인정한 방식이나 이론은 아니더라도 병사들의 불안함을 덜어주고, 적에 대한 적개감을 일깨운다는 본래 역할은 어떤 형태로든 수행하고 있다 보였으니까.
게다가 본래 사선을 넘나드는 병사들은 유난히 미신을 많이 믿는 편이었고, 교단에서도 그 총구가 엉뚱한 방향을 향하지 않는 한, 관대하게 봐주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쉽게 흥분하는 다수의 무장한 인간들’ 상대로 굳이 미움 받는 걸 원하는 이가 없다는 것도 있겠고 말이다.
게다가··· 아마도 많은 병사들은 좋든 싫든 경험할 마지막 성사일 가능성이 있었다.
형태야 어떻든, 그들의 마음 속에 깃드는 주신은 하나일 것이니···.
한편으로는, 좀 더 담담하게 자신들의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이들도 있었다.
“전장에서 생사가 걸리는 것은 당연한 법이니, 다음 날 누가 살고 누가 죽을 운명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약속 하나 하자.”
“예, 대장님.”
“만약 우리 중대에서 쓰러지는 자가 있다면, 모두 천사의 이끌림을 받기 전에 카젤하겐의 제3 세계수 성전 입구 오른 편에서 만나는 거다!”
“물론입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굳이 따로 성직자의 강론 없이도, 어릴 때부터 믿어온 신앙을 되새기며 혹시 모를 최후의 운명을 기다린다.
연대 전체가 같은 도시 같은 구역 출신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대도시 출신 장병들이 특히 그랬다.
각자 신념을 공유하며 영적인 준비를 하는 한편, 유족들 사이의 상호 부조를 약속하는 실질적인 준비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조용한, 혹은 절박한 시도들을 비웃으며 설령 내일 대륙이 뒤집히더라도 주사위를 한 번 더 던지겠다며 도박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치 내일이 최후의 날이라도 되는 듯, 십인십색, 만인만색으로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언제라도 공격 명령이 내려올지 모른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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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브레세른 마을을 마주보고 있는 그룬발트 군의 진영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고 있었다.
“아직 준비가 부족합니다. 사령부 참모님.”
폴름스 남부 영지군을 이끌고 있는 용병대장,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울상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지금 제 휘하 병사들은 규정 휴대수 열 발도 채우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 연대 보급부대는 어디 있는지 확인도 못했습니다.”
탄원하듯 말하는 내용은 절박하지 그지없었다.
“그런데 저희는 내일 공격··· ‘만약’ 공격 명령이 내려진다면 선두에 설 예정입니다. 부하들에게 빈 총으로 싸우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미클라크가 이끄는 병력은 지금 성 밖에 있는 병력 중 얼마 되지 않는 폴름스 선제후령의 직할 영지 출신들이다.
숙적 엘랑키아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주군을 구하는 전투에서 선봉에 서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하고, 불만은 커녕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준비는 마치고 전선에 나서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미클라크가 토로하는 불만과 걱정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분명 얼마 전만 해도 미클라크 휘하의 폴름스 남부 영지군은 최소한 휴대 탄수 만큼은 갖추고 있었다.
미터스하임 전투에서 호되게 당하기는 했지만, 이후 충분히 전투가 가능할 정도로 재보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랑키아 군의 정찰 기병대가 하는 도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부 탄약을 소모했다.
그때야 당연히 보급 부대가 도착할 줄 알고,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격을 명령했던 것인데···. 자칫하면 1인 당 8~9발의 탄약만 가지고 전장에 나서게 생겼다.
“사령부에서도 이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너무 늦기 전에 적절한 보급 지원이 있으리라는 것을 약속드립니다.”
한편, 미클라크의 절박한 탄원에 진중한 태도로 답변하는 것은 디오보르크 공작의 사령부에서 파견된 참모, 플로리안 도프 폰 자이트리츠였다.
“참모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전투 중에 탄약 배급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입니다. 열 발이 한 전투에 적절한 휴대 탄수인 경우는 야전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건 요새로 만들어 놓은 마을에 대한 공격입니다.”
어차피 통상적인 야전의 경우는 보유한 탄약을 다 쓰기도 전에 전투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후방 부대에서 탄약 일부를 차출해 전방 부대로 보급하는 형식으로 융통성있게 대응이 가능하니까 부담이 덜 한 편이다.
하지만 요새화 진지에 대한 공격은 이야기가 다르다.
평소보다 가깝기 쉬운 교전 거리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투가 된다.
경쾌하고 전술적인 기동전보다는, 적진으로 한 발이라도 더 쏴대는 것이 중요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평소보다 탄약을 더 많이, 빠르게 소모할 가능성이 높은데 전투 중 탄약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창병들이 적의 방벽에 접근하고 싸울 수 있는 이유는 끊임 없는 총병대의 지원 사격이 있기 때문이다.
적의 화력을 약화시키고, 일부는 대신 맞아주면서 조금이라도 여유를 확보하는 전술이다.
그런데 저쪽에서는 쏘는데 이쪽은 쏠 수 없다? 지근 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얻어 맞은 아군이 어떤 꼴을 당할 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럴 일이 없도록 각별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미클라크 경. 안심하고 전장에서 병사들을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휴··· 알겠습니다, 참모님. 참모님은 자이트리츠 전쟁관 출신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제 믿을 게 전쟁관의 여러분 밖에 없습니다. 미터스하임에서도··· 휴···.”
아무리 불만이 크다고 해도, 이웃 선제후령의 후계자를 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생각한 미클라크는 말을 줄이고 인사를 꾸벅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모습에 신뢰를 가지기도 했고.
하지만 물러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플로리안의 마음 속은, 침착을 가장하고는 있으나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플로리안과 그의 동료들은 며칠 밤을 세워가며 병력의 배치와 보급 계획을 완벽하게 세웠다.
아니,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바로 다음 날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한 지역으로 이동해야 할 보급 부대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는 문제도 있지만, 주로 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거기다가··· 현재 집결할 그룬발트 군은 10만에 가까운 대군이다.
이만한 병력과 물자의 관리는 미증유의 영역인 것이다.
도로 여기저기는 급하게 전장으로 이동해야 할 병력과 망가진 보급 마차, 역할을 잃어버린 포가 따위가 굴러다니며 끔찍한 혼란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다행히 보병이나 기병 부대는 길을 벗어나도 행군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수천 명이 한 지점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려하니 적체가 해소되지 않는다.
거기에 바퀴가 부서진 마차와 포신이 널브러져 있으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도 당연하다.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절대로 기다릴 수 없고, 길 밖으로 비킬 수도 없는’ 어딘가의 높으신 분의 소지품을 적재한 개인 마차라거나.
막힌 보급 물자를 인력이라도 옮겨 보겠다며 도로를 거슬러 온 보병과 인부들까지.
병력이 수천 명 단위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수만 명 단위가 되자 지옥과도 같은 혼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플로리안은 한숨을 쉬며 머리속으로, 그리고 탁자 위에서 우선 순위를 하나씩 해결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끝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공격 개시 시간에 ‘완벽한 컨디션으로’ 임하는 것은 완전히 물 건너갔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모두 착임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몇 주 전··· 아니 일주일만 더 시간이 있었어도···. 모든 상황이 너무도 아쉬웠다.
플로리안이 파악하기로 그나마 상황이 나은 것은 중앙의 호펜로이테를 공격할 준비를 마친 중앙군 뿐이었다.
그나마 도로 사정이 나았고, 디오보르크 공작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였기에 보급 우선순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마, 슈뵈켄을 마주보고 있는 우익군 또한 아비규환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총사령관 디오보르크 공작의 공격 개시 명령은 떨어졌고, 10만 대군 중 최소한 절반은 그 준비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공격을 미룰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