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45화 (445/556)

45-5. 폰 자이트리츠의 이름

“우선, 폴름스 포위망에도 병력을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에 가용한 병력 자원이 제한됩니다.”

이건 폴름스를 포위하고 위협해 적을 끌어 들인다는 전략을 선택한 이상 안고 가야 하는 숙명이다.

나름잘 만들어진 폴름스 포위망을 감안해서 한계까지 병력을 줄이고 줄이더라도, 최저 7200명은 포위망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언제 성문을 열고 출성 돌격을 할지 모르는 폴름스 수비군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했다.

반대로 이 양면 포위망은 동쪽에서 싸우는 아군의 배후를 지켜주는 벽 역할도 하기에 완전히 낭비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다.

“그리고 적이 아군의 구상을 완전히 무시하고, 맞서 싸워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백지로 돌려야 합니다.”

“그룬발트 놈들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싸워주지 않는다면··· 그렇겠군.”

“예. 애초에 강 대 강으로 상대가 나서는 경우 유효한 전술 구상이니까요.”

예를 들자면 적이 아군이 설정한 폴름스 동쪽의 방어 공간을 무시하고 폴름스 방어선에만 집중한다거나···.

전면 공세 없이 그저 소규모 접전 상태만 유지하며 아군의 소모를 늘리거나···.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저 근처에 머물며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엘랑키아 군으로서는 대응하기가 애매해진다.

이건 본질적으로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것이다.

함정처럼 보이지 않고, 함정 역할을 제대로 할지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적이 함정 근처에도 오지 않는다면 공들인 구상이 전부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적이 끝까지 그렇게 나선다면, 폴름스가 포위당한 상태로 방치되지 않는가? 그룬발트 입장에서 선제후가 사는 도시는 소중할 텐데.”

“예. 그래서 적이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는 확신이 조금은 있습니다.”

“허허, 적이 두 배나 많고, 우리는 폴름스를 끼고 있어서 병력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그렇지요. 엘랑키아 군 주력을 섬멸할 수도 있는 기회를, 복수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적이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일 것으로 믿는다···.

사실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나도 더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으리라.

일선 부대에 나가는 전술 지시가 간단할 수록 좋은 이유는, 보통 복잡해지면 복잡해질 수록 ‘적이 아군의 의도대로 움직일 것이다’라는 기대, 혹은 망상이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령관이자 엘랑키아의 국왕 폐하께서는 극단적인 처방을 준비하셨다.

바로 배후에 폴름스라는 거대 도시를 둔 채로, 두 배의 적과 마주하게 한 것이다.

이 정도의 격차가 있는데 그룬발트가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그 사령관은 전장에서는 살아남을 지 몰라도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몰릴 것이다.

그룬발트는 혈통이 아니라 선제후들의 지지에 따라 황제가 결정되는 나라이다. 만약 두 배의 병력을 몰아 주었는 데도 전투를 포기하는 자라면···.

이런 점 때문에, 적이 전투를 회피할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 세 번째 걱정은 무엇인가? 적이 공격을 한 지점에 집중한다고 하셨던가?”

“예. 이것 또한 적이 아군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경우에 해당하겠습니다만···.”

적이 아군의 철저한 방어 전략을 읽고, 한 두 군데의 약점만 공격하는 제한된 소모전으로 나오는 경우이다.

뭐 아군의 의도가 완전히 읽혔다는 시점에서 이미 절반은 지고 시작하는 것이니 가망이 없기도 하겠지.

한 지점에 공격을 집중한다고 하니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예를 들자면 완벽한 사각 대형을 갖춘 보병 연대를 공격하는 기병대의 경우와 비슷하다.

만약에라도 창병과 총병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밀집 대형의 측면에 접근한다면 삽시간에 기병대는 전멸한다.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사격각이 잘 나오지 않는 약점, 모서리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이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며, 보병들이 완강하게 저항한다면 결국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물러서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지만 기병대의 규모가 충분히 크다면, 보병 부대를 ‘봉쇄’하는 건 가능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대열이 풀리는 순간 위험해지기 때문에 보병 연대 측은 소극적이 될 테니까.

만약 적이 이런 ‘판’을 깔아 놓은 의도를 읽는다면,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 아군이 아무 것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 만.

“하지만 역시 적이 그렇게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째서요, 에트 경?”

“...원래 병력이 충분히 많으면 활용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개의 경우에는··· 병력이 두 배에 가까울 정도로 많으면 적은 뭉치게 하고 이쪽은 펼치게 해서 포위 공격을 하는 게 정석이기도 하다.

휘하에 10만 대군이 있다면 그 병력을 운용하여 전설적인 전투를 지휘해 역사 속에 남기겠다는 욕망을 가질 수 밖에 없을 테고.

이 또한 결국은 적이 이쪽의 예상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어 약간 조심스럽기는 하다.

진짜로 이렇게 나온다면 그때는 포위망이고 뭐고 다 치우고 신속하게 퇴각하는 수 밖에.

“허허, 에트 경의 식견에 대해서는 솔직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겠군. 정작 적이 10만 대군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되지 않소?”

“그야 당연히 걱정이 되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지.

“하지만 걱정되는 요소 세 가지에는 들어가지 않았지 않소?”

“이 부분은··· 이제 와서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점도 있습니다.”

정예 병력을 최대한 집중시킨 ‘소수’ 병력으로 그룬발트 영내 깊숙히 진격해 적의 주력을 전장으로 끌어낸다는 것은 애초에 다고베르 2세의 대전략이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들 어쩌겠나. 내가 불만을 가진다고 갑자기 어디서 병력을 조달할 수도 없는 노력이고.

“만약 5천의 병력으로 1만을 상대한다면 저도 절망하고 빨리 후퇴하자고 했겠습니다만, 5만으로 10만을 상대한다··· 는 노릴 수 있는 지점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궤변을 말하는 것 처럼 보일까 봐 다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진심이다. 10만 대군은 까놓고 말해서 한 전장에 다 들어가기도 힘든 병력이다.

그렇다면 분산이 될 수 밖에 없고, 각각의 전장이 느끼는 압박은 예상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다.

아, 물론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압도적인 숫자 차이는 무겁게 다가 올 테지만···.

또한 아무리 그룬발트 제국이 대국이라지만, 이 정도의 병력을 끌고 오려면 균일한 병력의 질을 유지하는 것도 큰 일이다.

단순히 전투력이나 훈련도가 높고 낮음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영토가 넓은 만큼, 서부와 동부, 북부와 남부의 문화와 기질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는 것이니까.

국왕, 그것도 성공적인 전쟁으로 명성이 높은 다고베르 2세를 중심으로 흔들리지 않는 지휘체계를 가진 데다가 병력의 질적 상향 평준화도 잘 된 편인 엘랑키아 군과는 다르다.

이런 크고 작은 점들이 병력 숫자 차이가 실제로 이 대 일 만큼 절망적으로 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근거이다.

“에트 경은 보기보다 승부사시군. 10만 대군을 앞에 두고도 이처럼 담담하게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전술가는 많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네.”

“아뇨, 저도 무척 무섭습니다만.”

거듭 말하지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하지만 루제 경은 진심인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에트 경의 말을 듣다 보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소. 최전방의 외딴 브레세른에 주둔하게 되어 솔직히 걱정하던 참이었으니 말이오.”

“...루제 경이야 말로 조금도 걱정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만.”

“하하, 이 지도를 보시오. 아우페브라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배후에는 퇴로를 막기라도 한다는 듯 호수까지 있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 아니겠소?”

“사실 저는··· 그런 점 때문에 브레세른에 적의 주공이 몰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호오?”

내가 너무 장담하듯 말했나. 루제 경의 눈썹이 꿈틀거리듯 움직였다.

“설명을 요청하고 싶소만?”

“배후의 호수는 퇴로를 막는 형세이긴 합니다만, 반대로 말하면 적으로부터 후방을 지키는 방벽 역할도 하게 됩니다.”

“그렇긴 하겠지 말이오.”

“거기다가 폐하의 본진이 위치할 아우페브라즈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는 브레세른을 점령해도 더 이상 진격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

루제 공작은 감탄의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떴다.

더 많은 숫자의 강병을 가진 그룬발트의 ‘실세’일수록, 아우페브라즈로 진격해 엘랑키아 국왕을 사로잡으려는 꿈을 꿀 것이다.

반대로 전공을 세우기 어려운 브레세른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병력이 투입되리라 생각한다.

내 예상대로라면··· 가장 치열한 전투는 슈뵈켄과 아우페브라즈 주변에서 벌어지리라 본다.

“그리고 이 시기의 브레세른 호수는 갈수기라서, 조심스럽게 이동하면 보병이 건널 수 있습니다. 신발을 포기할 각오만 한다면요.”

“뭐? 진짜요? 그건 어떻게 알았소?”

“그야 들어가 봤으니까요.”

나는 눈짓으로 천막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직도 진흙을 다 닦아내지 못한 장화 한 켤레가 구겨지듯 누워 있었다.

그렇다. 나는 장대를 짚고 브레세른 호수를 비스듬히 가로질렀고, 죽도록 고생을 했다. 장화가 저 꼴이 난 것은 물론이고.

“그건 생각도 못한 행동력이군··· 미안하오. 에트 경은 책상에 앉아 전략을 짜고 후방에서 지휘 하는 타입의 지휘관이라 생각했소. 내가 어리석었군.”

“아뇨···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루제 공작은 정말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점을 보면 확실히 권위적인 면이 없잖은 엘랑키아 귀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고압적이라는 점과는 다르지만, 역시 엘랑키아 고위 귀족들과 대화하는 건 좀 껄끄러운 면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룬발트 군 사이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이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호수를 가로질러 후퇴··· 행군하시는 경우에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군. 반대로 적이 호수를 건너 공격해오는 경우는 없겠소?”

“...흙투성이가 되어 신발도 없이 어기적거리며 전진해오는 적이 두려우십니까?”

“아··· 어리석은 질문이었군.”

원래부터 늪지대는 군사에 있어 깊은 강이나 높은 산맥 만큼이나 기피되는 지형이다.

조심스럽게 움직이면 통과를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속도는 매우 느리고 최종적으로는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그러니 만약 어쩔 수 없이 통과하게 된다면, 병력을 온존하기 위해 퇴각하는 경우가 되리라.

당장 전투력 상실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런 곳에서 싸우는 루제 공작은 선택지로서 알고는 있어야 하겠지.

그렇게 우리는 잠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눌 수록, 루제 공작은 ‘진짜 용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하는 방향이나 말하는 방식이나, 공작님 보다는 옛 동료가 생각난다.

다만 다소 걸리는 점이 있는데···.

그건 이 눈 앞의 강건해 보이는 남자,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이 합류하기 전 북부 해안 지대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용병 중에서는 꽤 흔한 편인, 악의 때문이 아니라 필요 때문에 얼마든지 부도덕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인가.

하지만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거북스럽다.

결국 사람을 죽이고 지역을 황폐화시키는 것이 ‘직업’인 용병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위선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그냥 거북한 것은 거북한 것이지.

그래서인지 대화가 잘 통하는데도, 그리고 나에게 제법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데도 그 이상으로 살갑게 대하지는 못하겠다.

“시간이 너무 늦었군. 오늘 대화는 유익했소이다, 에트 경.”

“그러셨다니 다행입니다, 공작님.”

“대신이라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파악한 첩보가 하나 있는데 들어 보시겠소?”

“첩보 말씀이십니까?”

첩보라니··· 나는 피곤해서 살짝 풀린 뇌를 다시 깨운다.

“주디칼리의 친한 용병대장이 전달해 준 정보요. 지금 그룬발트 군에는 자이트리츠 최고의 전략가가 있다고 하오.”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전략가 말입니까?”

“역시 알고 계시군. 일부러 참전하기 위해 주디칼리에서의 계약을 포기하고 떠났다고 하더군.”

“최고의 전략가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이트리츠에는 대단한 인간들이 많지만, ‘최고’라면 뻔하지 않겠소? 바로 전쟁관의 검은 늑대요!”

“전쟁관의 검은 늑대···.”

그 심상치 않은 이름을 들은 내가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였다.

···그게 누구지?

용병 생활을 너무 오래 떠나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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