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폰 자이트리츠의 이름
사령부 탁자에 둘러 선 여러 장교들이 크게 놀란 모습을 보이자, 다고베르 2세는 잠시 뜸을 들인다.
이 젊은 국왕 폐하는 결코 부하들에게 친절하게 일을 시키는 사람은 아니다.
이번만 해도, 적과의 결전을 목전에 두고 문자 그대로 적이 코 앞까지 밀고 들어온 후에야 바쁜 지휘관들을 모아 놓고 폭탄 선언을 하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일단 전달하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명확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 만큼은 확실한 사람이다.
본인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혹은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 어물거리는 인간을 윗사람으로 모셔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이런 점만은 훌륭하다 평가하고 싶었다.
게다가 사람의 관심을 끄는 카리스마를 타고 났다고나 할까. 관련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나도 괜히 집중하며 왕의 말을 기다리게 된다.
“물론, 아우페브라즈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전투를 대충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오.”
“그, 그야 그렇겠습니다, 폐하···.”
“전방의 다른 마을들, 예를 들면 호펜로이테나 슈뵈켄도 절대로 빼앗길 수는 없소이다. 모든 마을들은 온 힘을 다해 사수해야 하오.”
다고베르 2세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 반응을 보고 미리 준비했는지, 몇 개의 붉은색 나무 토막을 꺼내 지도 위에 올려둔다.
슈뵈켄과 아우페브라즈 사이에 하나.
아우페브라즈와 아룬하비크 사이에 하나.
아룬하비크와 브레세른 사이에 둘.
“이곳이 최근 에트 경에게 명령해 건설하게 한 방어 진지요. 각 진지는 1개 연대의 보병과 지원포대에 의해 수비되는 요충지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적군이 방어 진지를 뚫고 들어오느라 적이 약화되는 것을 노리시겠다는 것이신지요?”
“하하하핫, 프레니히 경 처럼 노련한 군인도 이 지도의 함정에 빠지셨구려. 세상이 장기판이고, 우리는 장기판에 정해진 길 대로만 움직이는 기물은 아니지 않소?”
“아···.”
“이 전투는 마을을 따라 이어지는 거점을 지키며 적과 옥신각신하는 진지 싸움이 아니오이다!”
그제서야 노장의 얼굴에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도로라는 섬과 마을이라는 점으로 이루어진 지도 때문에 잠시 생각이 방해 받았던 것이다.
이게 만약에 보드 게임이라면, 각 부대는 길을 따라 다니며 공격력과 방어력에 따라 피해를 주고 받을 것이다.
하지만 실전은 그렇지 않다.
이 다섯 개의 마을과, 네 개의 진지가 있는 전장은 조금 넓을 뿐이지, 엄연한 평야 지형이며 엘랑키아 기사들이 활약할 수 있는 개활지이다.
즉, 아군도 적군도 슈뵈켄과 호펜로이테 사이의 벌판을 지나 진격과 방어를 할 수 있으며, 아룬하비크를 무시하고 곧장 폴름스 포위망을 향해 돌진할 수도 있다.
거점이 되는 마을 역시, 무조건 마을 안에 들어가 똘똘 뭉쳐 방어를 하는 제한된 선택지가 있는 게 아니다.
필요하다면 마을은 든든한 방어 거점이 되어 전군의 선봉이 될 수도 있으며, ‘영역’을 지키기 위해 길게 늘어서 전선을 형성한 아군의 측익이 될 수도 있다.
만약 후방으로 물러설 일이 생긴다면, 아군의 퇴각 대열을 후위에서 엄호하는 유격대가 될 수도 있겠지.
특히나 최전방인 호펜로이테에서 아우페브라즈에 이르는 지역은 작은 언덕 하나 없는 완벽한 초원이다.
어떤 기만전술도 사용할 수 없는, 엘랑키아 기사들의 막강한 충격력을 발휘하기 좋은 둘도 없는 전장인 것이다.
만약에라도 ‘거점을 우회해 적의 후방을 친다’라는 단꿈을 꾸며 이곳을 가로지르려 시도하는 적군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맞이하는 것은 잔뜩 준비하고 있는 엘랑키아 기사들의 말발굽이겠지.
“이 전투의 관건은, 다섯 개의 마을들이 아니라 그 사이의 평야 지역에 있소. 적군이 거대한 파도라고 한다면, 다섯 개의 마을과 네 개의 진지는 그 파도를 약화시키는 섬일 뿐이오. 하지만 파도 자체를 막으려면, 방파제가 따로 있어야만 하지 않겠소?”
그제서야, 참가자들 사이에서 이제야 이해했다는 웅성거림이 나오기 시작한다.
양군이 평지에서 마주보고 승패를 결정하는 전투라 할지라도, 지형지물이 있다면 최대한 이용하게 된다.
대표적인게 언덕과 같은 지형의 고저차일테고, 평범한 울타리나 돌벽도 훌륭한 대기마 방벽이자 엄폐물이 되며, 마을은 그 자체가 철통같은 진지가 되기도 한다.
아마 여기에서 어리둥절해 하는 지휘관들 역시, 전장 후보지에 마을이 있다면 어떻게든 먼저 점령해서 아군 방어선의 일부로 삼고자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노련한 장군들 역시도, 전장이 조금 넓어지고 마을이 다섯 개로 늘어났다는 이유로 전장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전투의 본질이 개활지에서 벌어지는 회전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만 것이다.
아군이 이럴 정도라면 아마도 적도 그럴 것이다, 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 들었다.
아니, 최소한 전투의 첫 순간은 그럴 것이다.
게다가 배후에 적의 거점을 남겨둘 수 없다는 당위성마저 있으니, 어떻게든 마을을 지키는 아군을 몰아내고 ‘거점’을 점령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겠지만, 부디 그때가 이미 많은 병력과 물자를 소모한 다음이기를 빈다.
그리고 적이 마을 점령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새로운 전선을 만들게 된다면···.
뭐 그 때는 준비된 수단으로 맞서 싸우면 될 뿐이다.
“폐하께서 세우신 전술 구상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오나 폐하,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이번에 질문하는 것은 북쪽의 슈뵈켄을 맡은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이었다.
“무엇이 궁금하시오, 아르밀 공?”
“아까 말씀하신, 아우페브라즈를 적에게 내줘도 된다는 것의 의도는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 전장을 개활지에서의 평범한 회전으로 간주하더라도, 아군 중앙을 관통당하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역시, 엘랑키아의 동부를 지키는 그랑다투아 군의 사령관다운 날카로운 질문이다.
만약 이 전투가 단순한 진지 뺏기 싸움이 아니라면, 오히려 중앙은 지켜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중앙을 돌파 당하는 것은 보통 패배를 의미하니까.
하지만 이는 기다린 질문이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면 따로 설명했을 내용이고.
“아주 좋은 질문이오, 아르밀 공. 허나 아우페브라즈에 적이 들어왔다는 것 만으로 아군 전열이 돌파당한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여기 마지막 대열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며, 다고베르 2세는 아우페브라즈와 폴름스 사이에 손을 내밀어 길 위를 수직으로 그었다.
“오히려 무리해서 여기까지 들어온 적은, 아군의 십자포화에 당해야 할 것이오. 그걸 견딜 수 있다면야··· 글쎄, 그건 별 도리가 없겠지.”
“외람되오나 폐하, 아군이 보유한 야포는 이미 전방 부대에 대부분 분배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건 그렇소만.”
“그렇다면 아무리 지형상 적을 포위한다고 해도 적을 압도할 수 있는 화력은··· 아!”
역시, 이야기 하다보니 스스로 깨달았군. 명석한 사람이다.
어중간하게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시야와 생각의 사각을 생각하지 못하는 법이거든.
“설마··· 에티엔 공작의···.”
“바로 맞추셨소, 아르밀 공. 지금 여기 에티엔 공병감이 없는 이유는 지금 이 시간에도 바쁘게 참호 포위망을 따라 뭔가를 이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라오. ‘아주 무거운 것’을 말이오.”
“...만약 아우페브라즈가 적의 손에 넘어 간다면, 적이 기겁을 하게 되겠군요.”
아르밀 공작이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우페브라즈는 폴름스 포위망의 외곽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우리 원정군이 보유한 화포들 중, 가장 크고 화력이 강하며 사거리도 긴 공성포탄에 노려지기 충분한 거리였다.
단단한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성벽도 시간만 들이면 돌 무더기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무시무시한 무기이다.
평범한 나무와 흙으로 쌓아 올린 마을의 평범한 건물 따위, 엄폐물 역할도 하기 어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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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시원하다.”
나는 나에게 배정된 작은 막사에서 미지근한 물을 병째로 들이켰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목이 타들어갔기 때문이다.
작전 회의가 끝나고 전방 지휘관들이 각자 부대로 돌아간 것은 밤이 완전히 늦은 이후였다.
다행히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한 번 주도권을 잡은 이후 분위기는 긍정적으로 흘러갔으며, 회의가 끝났을 때는 모두가 승리에의 확신으로 힘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다행이긴 다행이지만··· 이제 나는 국왕의 개인 참모로서 이 투박하기 그지 없는 계획을 말끔하게 정돈해야 할 일이 남았다.
오늘 충분히 자는 것은 글렀다는 생각이 든다.
“에트 경, 죄송합니다. 누가 찾아 오셨습니다.”
밖에서 누군가 나를 부른다.
방문자라고? 이 시간에 누가 나를 찾아오지? 국왕님과는 회의가 끝나고도 한참 이야기를 하고 왔는데···.
애초에 나를 불러내면 불러냈지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 어?”
“반갑소, 트랑카벨의 에트 경.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군.”
“아뇨, 그··· 어, 공작님?”
“루제 드 제브레도뉴요.”
상상도 못한 사람이 찾아와 있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엘랑키아 기족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용병처럼 차려입은 남자.
이번 원정에 참여한 최고위 귀족 중 하나이며 이번 전투에서는 우측, 브레세른 마을의 방어를 맡은 사령관이다.
참고로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는 사이이다.
“늦었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소이다. 실례를 해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잠시 들어오시지요.”
우리는 내 막사에 마주앉은 채로,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막사가 좁구려. 귀경 정도라면 폐하께서 더 좋은 막사를 하사하실 법도 하지 싶은데.”
“어차피 임시 거처이고, 폐하의 사령부에서 가까운 위치가 좋아 스스로 골랐습니다.”
“하핫, 에트 경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뼛속까지 용병이구려.”
라고 누가 봐도 용병처럼 생긴 공작 각하가 말한다.
“그보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이런, 잡담이 과했군. 우선 한가지 묻겠소. 오늘 폐하께서 말씀하신 ‘전술 구상’은, 에트 경의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지요?”
“예? 옛? 아뇨, 그게 저, 폐하와 오랜 논의 끝에···.”
“그렇다는 대답으로 들으면 되겠소?”
“이론상은··· 그렇습니다.”
허를 찔려 어버버하는 모습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이실직고 하는 게 나은 선택이겠다 싶었다.
“역시 그렇군. 폐하는 훌륭한 군주이자 기사이시지만 전략가는 아니오. 아니, 귀경 정도의 인물을 알아보고 전권을 맡겼다는 점에서 전략적 식견도 있다고 해야 할까?”
일단 칭찬을 하고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뭐 하러 왔을까.
“아무튼, 회의에서는 다들 ‘폐하의 전술 구상’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분위기였지 않소. 뭐, 나 역시 그렇다 생각은 하오. 적어도 어딘가 동쪽 평원지대에서 결사의 각오로 돌격하는 것 보다야 낫지 않겠소?”
“예···.”
“그래서 꼭 에트 경에게 묻고 싶었소. 남들 다 보는 회의 장소에서가 아니라, 이런 외부에서 말이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이번 전술 구상의 단점에 대해서요.”
“단점··· 말씀이십니까?”
작전에서 오로지 장점만이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병사가 기동성과 화력을 겸비할 수 없듯 말이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 전술가들의 숙명이고 말이다.
“같은 용병으로서, 허심탄회하게 에트 경의 의견이 듣고 싶소이다. 아, 절대로 이를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거나 항의하지는 않겠소이다.”
“휴우··· 알겠습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작전을 수행하는 일선 지휘관이라면 알고 있는 게 나쁘지 않다 생각한다.
다만 회의장에서는 워낙 분위기가 분위기였던 터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나는 천천히 머리속에서 정리되고 있던 문제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던 점들을 하나 하나 나열하기 시작한다.
“첫째, 폴름스 포위망에도 병력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 둘째, 적이 이쪽 계획을 무시하고 맞서 싸워주지 않을 경우에 대한 문제. 셋째, 반대로 적의 공격이 한 지점에 집중될 경우에 대한 대책입니다.”
“호오···.”
내가 고민하던 것을 줄줄이 늘어 놓자, 루제 공작은 의외였는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을 한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해도 괜찮겠소, 에트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