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 폰 자이트리츠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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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에 부르게 되어 미안하오. 여기까지 오시느라 다들 고생하셨소.”
어두운 천막 안, 많은 촛불이 탁자 주변만을 밝히고 있었다.
탁자에는 폴름스와 주변 지형, 그리고 아군의 배치를 표시한 대형 지도가 놓여있다. 그 주변에 둘러서 이들은 이번 왕의 친정군의 고급 지휘관들이다.
불안정해 보이는 촛불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진지한 얼굴로 서 있는 지휘관들의 얼굴에 빛과 함께 깊은 그림자 또한 던진다.
이곳은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드 팔라스 2세의 천막으로 모두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룬발트 대군과의 결전을 목전에 둔 최후의 작전회의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힐끗 국왕 다고베르 2세의 얼굴을 바라본다. 방이 어두운 것도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국왕이 왜 이런 시간에 사람들을 모았는지는 알고 있다.
낮에는 여전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현재 엘랑키아 군은 여전히 폴름스를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초부대를 내보내 폴름스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우선 도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저항한다.
적이 이를 인지하고 행군 대형을 풀고 공격을 시작하면, 화력에 의지해 저항하다가 본격적으로 압박이 심해지기 전 재빠르게 퇴각한다.
공격 대형을 짜는데도 시간이 걸리고, 밀집 대형을 짠 상태에서는 퇴각하는 아군을 추격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한 작전이다.
만약에 밀집 대형을 풀고 추격해오는 적이 있다면, 기다리고 있던 엘랑키아 기병대가 인정사정없이 휘몰아친다.
결국 그룬발트 군은 추격을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
대형을 짜느라 시간을 보냈고 병사들은 지쳤는데, 얻은 것이라고는 방금 전까지 상대방이 배치되어 있던 진지를 빼앗은 것 뿐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방어 시설 더미를 점거하느라 체력만 소모하고, 많지는 않더라도 사상자도 발생했다.
이겼지만 이겼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앞으로도 이런 전투를 계속 해야하나? 하는 고통까지 느끼게 된다.
‘엘랑키아의 기사는 같은 수로는 상대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며 바짝 긴장하고 있던 그룬발트 선두 부대로서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전투 방식이리라.
다만 이는 아군, 엘랑키아 왕국군으로서도 리스크를 감수하고 있는 방식이다.
이는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며, 약간의 출혈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지연전이다.
교전이 벌어지는 만큼, 아군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며 공간을 계속 내준다는 것은, 향후 아군의 자유도가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다.
혹시, 만약에라도 다시 공간을 되찾아야 할 일이 있다면 헐값에 내준 것에 비해서 막대한 희생을 지불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게다가··· 생각보다 큰 문제는 이는 엘랑키아 군이 익숙한 전투 방식에 어울리는 전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실질적인 패배를 계속하고 있고, 작정하고 싸우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 적군을 상대로 물러서는 것이다.
이게 혈기왕성한 엘랑키아 북부 귀족들에게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지 생각보다 불만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경험이 적거나 사기가 많이 떨어진 총병 부대가 기다리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발작적으로 총을 쏴버리는 것과 비슷하다.
혈기왕성하고 승리를 확신한 기병대 역시 충동적으로 돌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차이점이 있다면 총병의 경우는 숙련도가 떨어지는 부대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지만, 기병은 오히려 강병으로 손꼽히는 정예군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회적 지위도 높고, 명령권자와의 개인적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귀족 기사들이기에 그런 것일지도.
게다가 원래 기병대의 경우, 원래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의도적으로 상부의 지휘를 ‘듣지 못한 척’ 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흔한 편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상황이 다르기에,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반격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용맹한 엘랑키아 기사들이 여기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했고 말이다.
아마 이 군대가 국왕이 직접 이끄는 친정군이 아니었다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반역죄로 처단하겠다는 칙명을 내려 둔 사태가 아니었다면 벌써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부대가 나왔으리라 확신한다.
그래도 높은 숙련도와 자부심, 그리고 왕국에 대한 충성심을 가진 정예군인 만큼 아직은 기강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신경이 타들어가는 것은, 지켜보는 내 쪽이지만 말이다.
당연하게도 이기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지는 척도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어쨌든 ‘지는 척’도 이제 끝낼 때가 됐다.
오늘 낮 동안, 접근로를 지키며 그룬발트 군을 괴롭혔던 전초부대는 이제 좀 다른 의미를 가지는 방어선 안쪽으로 모두 후퇴해 왔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번 시간이 지금이다. 반대로 지금이 아니면 전체 상급 지휘관이 모이는 회의는 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불행하게도 아군은 현재 함락되지 않은 폴름스를 배후에 두고 있다.
약 한 달 동안의 포위전에서,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 이끄는 공병대를 핵심으로 한 공성부대는 차근차근 전과를 쌓고 있었다.
성벽의 많은 부분이 원상 복구가 힘들 정도로 손상되었으며, 그 중에는 폴름스의 중요한 핵심 방어 거점도 몇 군데 포함되어 있었다.
방어군이 공포를 느꼈는지 기습적으로 출성 반격이 있었으나, 두 차례 모두 완전히 막아내었다.
그럼에도 이 거대한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는 여전히 건재하다. 애초에 성벽과 방어 거점 좀 무너졌다고 항복할 도시는 아니었다.
승부를 내려면 약점부위를 통한 성 내부로 엘랑키아 군의 보병 돌격이 필요할 테지만.
그룬발트의 주력군과 결전을 앞둔 만큼 그럴 여력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어째서,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이런 기묘한 국면을 일부러 자초했는가?
포위망을 완벽하게 건설한 것 자체는 좋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폴름스는 여전히 건재하기에, 배후에 적의 거대 도시를 두고 지원군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안팎으로 방어선을 만들었다고는 해도 배후에 적을 두고 펼치는 작전에 불안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 점은 나도 어느정도 동의하는 우려점이고, 당연한 의문이다.
허나 이건 어쩌다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다고베르 2세가 원했기에 이렇게 된 것이지.
오늘은 아마도 제장들의 의문을 풀어주는 자리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을 미뤄 온 것은 시간 문제도 있었지만 보안 문제가 컸겠지.
다고베르 2세는 은근히 겉마음 사이에 속마음을 숨기는 묘한 태도에 능한 군주였다.
“지금까지 잘 해주어서 고맙소. 귀공들이야 말로 엘랑키아의 제일 가는 충신들이오. 허나, 어째서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는, 또 불만을 가진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탁자에 놓인 지도를 살피던 다고베르 2세가 운을 띄웠다.
“짐이 생각한 전술에 대해서는, 원수부 참모장인 트랑카벨의 에트 경에게 자세히 설명해 놓았소.”
그리고 운을 띄우자마자, 공을 나에게 넘긴다. 솔직히 날벼락이지만, 최소한 이번에는 미리 언질이라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국왕을 대신해 앞으로 나서자, 지켜보고 있는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몇몇 왕의 장교들에게 그다지 신뢰를 받지 모하고 있는 모양이다. 네가 뭔데 폐하의 곁에 있느냐··· 라는 것일지도.
하지만 맹세하는데, 나는 지금 이 자리를 눈꼽만큼도 원한 적 없다고.
어쨌든, 할 일은 해야한다. 나는 머리속으로 내용을 잠시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아군의 손에는 요새화를 마쳐 놓은 다섯 개의 마을이 있습니다. 동쪽에서부터 접근하는 그룬발트 군을 가로 막을 요지입니다.”
내 손이 다섯 개의 마을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킨다.
폴름스를 기준으로, 북동쪽의 슈뵈켄.
가장 가까운 동쪽의 아우페브라즈.
아우페브라즈를 지나 더 동쪽의 호펜로이테.
남쪽의 아룬하비크.
그 아룬하비크의 동쪽, 호펜로이테의 남쪽에 있는 가장 먼 브레세른.
이 하나 같이 요란한 이름을 가진 마을들은 전부 집이 많아봐야 수십 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들이다.
주민들은 폴름스로 입성했는지, 더 먼 곳으로 피난했는지 대부분 떠난 상태이고, 남은 이들이 있었어도 엘랑키아 군이 점령하면서 모두 떠났다.
어쨌든 지금은 모두 엘랑키아 군의 거점이다.
“지금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님의 군대가 가장 남쪽, 브레세른에 주둔하고 계십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남자가 자신이 언급되자 나를 마주본다.
엘랑키아 귀족이면서, 조상은 그룬발트 출신이고, 용병대를 운영한다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 동부의 대귀족은 확실히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지금 입은 복장만 봐도··· 다른 엘랑키아 기사들보다는 오히려 나와 비슷하다. 전형적인 용병대장의 복장이라는 것이다.
뭐, 나보다 훨씬 화려하긴 하지만.
“중앙의 호펜로이테에는, 왕실군 원수이신 프레니히 드 루블랭 각하께서 주둔하고 계시고요.”
최근 나와 부쩍 친해진, 현 사령부 최고령의 노장인 프레니히 백작이 신뢰 섞인 미소를 보인다.
전선의 중앙, 어쩌면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장소이니 왕실군의 최정예가 배치되는 것이 당연했다.
“가장 북쪽의 슈뵈켄에는 팔스부르의 공작이신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께서 지휘하시는 그랑다투아 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랄렌 강을 건너기 전에 만난 적 있는 아르밀 공작과 눈이 마주친다.
이 사람은 왠지 나에 대해서 강한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는 듯 했다. 적의 까지는 아니지만, ‘네가 하는 바를 지켜보겠다’ 라고나 할까.
“다섯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는 아우페브라즈, 여기가 왕실군의 주력이 머물며, 폐하의 사령부가 있을 곳입니다.”
이번에는 회의실 전체가 술렁거린다.
위치상 여기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지점이기는 하지만, 전선에서 너무나도 가까운 지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서부와 남부 출신 장병들로 이루어진 예비대가 남쪽 후방의 아룬하비크에 주둔합니다.”
그리고 서쪽의 퇴로··· 라고 할 수 있는 파두자이트 역시 관리하게 되지만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아마 국왕 폐하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들이신 여러분께서는, 이 포진만 보아도··· 아니 아마 오늘 이 자리에 오시기 전부터 사령부의 의도는 짐작하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안과 밖의 공세를 모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요새화 된 포위망, 그리고 마찬가지로 요새화 된 다섯개의 마을.
약간의 군사적 소양만 있어도 의도는 단박에 이해할 수 있겠지.
나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다섯개의 마을을 포함하는 원을 크게 그린다.
“이 구역이, 실질적인 ‘아군의 영역’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내선의 이점을 얻어 정보와 병력 배치의 우위를 얻을 것이며, 보다 수월하게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선의 이점이란, 말 그대로 ‘내부 연결’의 이점이다. 적에 비해 신속한 병력 배치와 집중이 가능하며, 부대 사이의 정보 교환도 압도적으로 빠르다.
가령 아군은 북쪽 끝의 부대와 남쪽 끝의 부대 사이를 다이렉트로 연결할 수 있지만, 적이 마찬가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정보를 보내려면 전선을 절반이나 빙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반쯤 포위당해 기동성을 상실한 상태로 두 배의 적에게 두드려 맞아야 겠지만 말이다.
이 경우, 든든하게 구성된 폴름스는 오히려 적의 접근을 막는 방벽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에라도 안팎으로 건설된 폴름스 포위망이 함락당하지 않는다면 말이지만.
내 말을 들은 지휘관들은 대부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스스로 좁은 공간에 갇힌 꼴이 되지만, 그만큼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도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마을을 연결한 공간인 만큼 개활지에서 막강한 엘랑키아 기사들이 활약할 수 있는 여지도 늘어난다.
베테랑 지휘관들은 지도에서 그런 이점을 바로 읽어냈을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이건 분명 새로운 배치와 전술, 활약의 여지를 찾아냈기 때문이겠지.
“자 그러면 여러분, 이 방어 포진에서 핵심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질문에, 지도에 집중되어 있던 모두의 눈길이 다시 나에게 집중된다. 여러분, 이 질문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그야··· 폐하께서 계신 아우페브라즈가 아니겠소?”
먼저 대답한 것은 북쪽을 맡은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이다. 다만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미심쩍음이 남아있다.
이렇게 쉬운 질문이 아닐 텐데?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요! 이런 큰 싸움에서 폐하의 본진을 지키는 전위를 담당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소! 아우페브라즈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 접근하지 않도록 지켜내겠소이다!”
노장 프레니히가 예상대로 호탕한 목소리로 말한다.
선배 장군의 호언장담에 탁자를 둘러선 다른 지휘관들도, 특히 젊은 지휘관들도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국왕 폐하의 본진이 있는 본진을 사방에서 지켜낸다는 장대한 싸움의 일익을 맡게 되어 기쁘다는 표정들이다.
나는 그 와중, 슬그머니 남쪽의 브레세른을 맡은 루제 드 제브레도뉴 공작의 얼굴을 살핀다.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있었고, 짙은 색의 두 눈으로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사람과는 대화를 제대로 나눈 적도 없는데, 유난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곤 해서 거북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 자리의 대부분에게 충격적일 다음 말을 하기 위해서 작게 심호흡을 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모두 이 한마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여러분. 아우페브라즈는 반드시 철통처럼 지켜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폐하의 본진이 있는 곳인데 어찌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다는 말이오!”
“엘랑키아의 기사 된 자로서 어찌···.”
당연히 지금까지의 차분한 분위기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몇 명은 분노로 불타는 눈으로 당장이라도 탁자를 넘어 달려 들 기세였다.
“자, 여기는 내가 설명하지.”
다행히도 다고베르 2세가 구원군이 되어 나타나 주었다.
그는 나 대신 탁자의 정면에 서더니 선언하듯 말했다.
“에트 경의 말이 맞소. 아우페브라즈는 반드시 지켜야 할 지점이 아니오. 오히려, 필요하다면 적에게 내줘도 상관 없소이다.”
막사 안에 소리 없는 천둥번개가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