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40화 (440/556)

44-9.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과연 프레니히 백작은 어떤 의도로 결혼 여부를 묻는 질문을 했을까. 중매라도 해 주려는 것일지.

사실 이런 저런 이유로 혼인 관련 질문은 조금 불편한 점이 없지 않다.

아, 물론 상대방의 의도와 무관하게 넘겨집는 것일 수도 있긴 하다.

이게 다 주디칼리에서 여러 차례 겪었던 경험 때문인데···.

용병료를 결혼 동맹 따위로 때우려는 의도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슈토르히 연대가 어느정도 완성되고, 용병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아마 제안한 이들 입장에서는 통상적인 귀족사회 내부의 결혼을 통한 가문간 결속 따위를 생각했겠지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용병단을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용병단은 비용을 현금이나 그에 준하는 자산으로 받지 않으면 월급을 줄 수가 없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글쎄, 제안 받은 당사자가 개인의 영달을 추구한다거나 이미 벌어놓은 돈이 충분히 있다면···.

혹은 단장과 휘하 용병들의 관계가 주종관계로 맺어져 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월급 주면 생각보다 남는게 많지도 않은 고용주 입장에서는 글쎄다.

물론, 실제로 명성 높은 용병대장들 중에서는 결혼이나 양자결연을 통해 귀족사회에 편입된 인물들이 없지 않긴 하다만, 내 경우는 그런 게 목표가 아니었기도 했고.

그럼 지금 상황은 어떨까?

나는 여전히 블랑독의 트랑카벨 가문에 고용된 상황이고, 트랑카벨 가문은 엘랑키아 왕국의 명실상부한 신하가 된 상태이다.

프레니히 백작은 엘랑키아 왕국의 총신이긴 하지만, 본인이 고용하는 입장은 아니니 그런 ‘전략적 목적’으로 물어보는 것은 아니겠지.

“어쩌다 보니 아직은 인연이 없었습니다.”

“오호, 그렇군, 그렇군.”

의외로 이 노장은 내 다소 경계하는 투의 대답에 상관 없다는 듯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설마 정말로 순수한 의도였을지도. 나는 과도하게 경계했던 것인가 싶어 약간의 죄책감을 느껴졌지만···.

“에트 경은 어떤 여자가 좋은가? 나이 차이가 좀 나도 괜찮을까?”

“죄송합니다 딱히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 항상 함께 하는 미녀 부관은? 에트 경을 상당히 좋아하는 눈치던대?”

“하하, 첼레스티나는 저를 따르기는 하지만 그런 관계는 전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어릴 때부터 저희 용병단에서 자랐던 친구라서요.”

“오호, 그렇구만. 이 노인네가 괜한 참견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손녀딸은 어떤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라네.”

“백작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금 트랑카벨 가문을 섬기는 입장인데 백작님의 손녀분과 인연을 맺게 되면 모양새가 애매해지지 않겠습니까?”

결혼 동맹과 이를 타고 오가는 권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봉건 사회에서는 결혼이 단순한 개인과 개인의 결합,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명목상 트랑카벨에 고용된 입장인 내가, ‘주군의 주군의 주군’의 총신의 손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다.

‘역심을 품었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트랑카벨 자작가나 드 레뮤즈 백작가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한 일이 될 테고.

반대로 이 노장이 주인으로 있는 드 루블랭 백작가도 ‘주군의 신하의 신하의 신하’와 인연을 맺는 건 다소 격에 맞지 않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이지.

아니 잠깐,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예의 상 한 말에 내가 괜히 김칫국이나 마시는 꼴일 수도 있지 않나?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허허, 그렇게 생각하셨다는 말인가? 에트 경은?”

프레니히 백작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상당히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음음, 그렇지. 에트 경은 트랑카벨 자작가의 사람이었지! 이 노인네가 하마터면 실례를 할 뻔 했군. 사과하겠네.”

“아뇨,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백작님.”

“뭐 어느 쪽이든 좋네! 블랑독에서든, 베르마유에서든. 에트 경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주기만 한다면.”

“아뇨,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아니라고? 그럼 상관이 없지 않은가?”

나는 가까스로 대화의 결이 서로 맞지 않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이런 대화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능력이 없는 인간이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혹시라도 확인되지 않은 위협이 있을지도 모르니, 정찰을 책임지신 디타레 드 카울 경에게 문의하고 오겠습니다. 지휘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다.

“디타레 경이라면 적 잔당을 추격하면서도 어련히 색적도 잊지 않았을 터인데···. 아무튼 알겠네. 에트 경의 결혼 상대에 대해서는 다음에 한 번 이야기 해 보도록 하지!”

그렇게 나는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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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 현재 자타공인 ‘신성 그룬발트 제국 황위에 가장 가까운 남자’인 그는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가 군을 지휘하기 시작하고 처음 들은 소식이 처참한 패전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츠벤 백작이 패배했다는 말인가? 어디서?”

“예, 그렇습니다. 공작님. 폴름스에서 동쪽에 위치한 로스니히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아니! 어째서 먼저 공격을 했다는 말인가, 츠벤 백작은! 위험한 적을 만났다면 본대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게··· 츠벤 백작의 선봉대가 먼저 공격을 한 것이 아니라 새벽에 기습을 당했다고···.”

마치 자신이 잘못하기라도 했다는 듯, 고개를 굽실거리며 보고하는 참모의 말에 디오보르크 공작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기습? 폴름스에 붙어 있는 엘랑키아 군에게 그런 여력이 있다고?”

“정확히 어떤 병력이 기습했는지는 지금 알아봐야합니다만··· 하필이면 북동쪽 방향에서 예상하지 못한 습격에 당했다고 합니다.”

“허···.”

“그래서 지금 남쪽으로 퇴각해서 병력을 추스르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금 할 말을 잃는다.

엘랑키아 군은 폴름스를 공격하고 있고, 아군은 그 배후에서 진격하고 있다.

솔직히 디오보르크 공작 자신도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세, 적이 수세다. 배후에서 접근하면 적은 방어적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니 우세한 병력을 이용해 차근차근 적을 무너뜨려 나간다.

이것이 현재 그룬발트 군 전략의 기조였다.

츠벤 백작의 부대는 선봉대라고는 해도, 병력 지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병력이 2만에 가까운 강력한 야전군이다.

설령 적과 교전하게 되더라도 병력이 병력이니만큼 나름의 싸움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정예들을 파견한 것은 아니지만 숙련된 용병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아니, 엘랑키아 군은 폴름스 포위망을 건설하느라 한참 열중하고 있는 시기이다.

폴름스는 큰 도시이고 포위망을 건설하는 데는 상당한 인력이 필요한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어떻게! 2만에 달하는 츠벤 백작의 선봉대를 삽시간에 섬멸할 정도의 병력을 빼내서, 그것도 우회해서 기습 공격을 한다는 말인가?

만약에 선봉대가 다른 길로 갔다면 어떻게 하려고?

“젠장할··· 츠벤 백작을 믿지 말았어야 했나···.”

바르엘스 뭐였나, 아직도 헷갈리는 가문명을 가진 츠벤 백작은 아직 자신의 입지가 확고하지 않던 시기부터 지지해줬던 귀족이다.

게다가 스스로 신하를 자처하면서 신흥 귀족에 속하는 제플링 공작가의 ‘격’을 높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가문이 안고 있는 오명을 반납하겠다며 항상 적극적인 모습이어서 한 번 기회를 주었던 것인데···.

모든 전투에서 이길 수는 없다. 대군의 일각이 꺾이는 정도의 일은 항상 있는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약간은 ‘잃어도 아깝지 않은 카드’라는 생각으로 전위에 내세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패배하더라도 뭐 얻은 것은 있어야 하지 않나? 적의 방어 전략이나 병력 구성, 그 유명한 엘랑키아 기사의 위력이라던가 말이다.

그걸 기습 한 방에 선봉대 전체가 무너지는 바람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그나마 성과라면 ‘2만에 가까운 선봉대를 일격에 무너뜨릴 전력을 가진 엘랑키아 야전군이 폴름스를 떠나 행동하고 있다’는 결코 반갑지 않은 정보일까.

어쩌면, 엘랑키아 군은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겁이 덜컥 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종적인 승자는 자신, 디오보르크 공작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디오보르크 공작의 후원자인 카젤하겐의 선제후가 호언장담한 것이기도 하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절반이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원할 것이라는 점과, 여태까지 역사에 없었던 대군을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마치 구름에 타기라도 한 것 처럼 황홀한 기분이었던 것도 기억난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는다.

제국에 태어난 남아로서 그런 꿈을 꾸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디오보르크 공작의 경우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최근이다.

오히려 디오보르크의 야심은 매우 현실적인 편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랐던 것은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지역 강자’ 정도의 포지션이지, 제국의 지존 따위는 아니었으니까.

그게 어쩌다보니 엘프 선제후들의 눈에 들어 후원을 받게 되었고, 승승장구하여 ‘황위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10년, 아니 5년 전의 자신에게 이 사실을 말해준다면 어처구니 없어 할 것이다.

반쯤은 현실적인 목적으로, 반쯤은 허영심으로 야심있는 척 해왔던 삶이다.

성인이 되어 폰 제블링 가문을 몰려받았을 때, 허울뿐인 공작위는 세 쪽이 나서 라이벌 가문들이 나누어 들고 있었고 영지는 산산조각이 난 누더기나 다름없는 신세라 지도에 표시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주의 깊게 동맹을 만들고, 때로는 손절하기도 하며, 항상 이기는 쪽에 줄을 대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다보니 엉망이 된 가문과 영지를 다시 일으킨 입지전적인 인물로 소문이 나고, 더 많고 강한 동맹과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다.

정작 자신은 그냥 온전한 폰 제블링 공작위가 가지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새 그룬발트 전체를 통치하는 황제위에 다가가고 말았으니.

하지만 황제를 시켜주겠다는 선제후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은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달콤한 미래에 대한 상상이 끝나자, 그가 마주한 것은 다름아닌 엘랑키아 국왕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다.

정말 이길 수 있을까? 만에 하나 지기라도 하면, 그나마 지금 가진 것까지 전부 날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공포감이 디오보르크 공작에게 엄습해 왔던 것이다.

비록 허영심이 강하기는 했으나 그의 본질은 똑똑하지만 소심하며, 적당히 현실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머리속의 고민이 고민을 불러오고 있던 와중, 바삐 그를 찾는 목소리가 있었다.

“공작 전하! 드디어 자이트리츠 전쟁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 정말인가? 뭐라고 왔나?”

“자이트리츠 전쟁관에서 ‘최고의 보좌진’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조만간 도착할 것을 알리는 전령이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휴우우···.”

압박감에 시달리던 디오보르크 공작은 다소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쉰다.

자이트리츠 전쟁관. 도르데빙켈 산맥 중턱의 고립된 지역에 자리잡은 자이트리츠 가문이 머무는 저택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들이 운영하는 기묘한 교육 시설의 이름이기도 했다.

다른 가문들이 유력자와의 교류와 결혼을 통해 세력을 얻고 군사력을 키워 영지를 확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선택한 가문.

‘자이트리츠’는 신성 그룬발트 제국 내에서는 ‘뛰어난 전략가’와 동일한 명사나 다름없었다.

직접 권력의 각축장에 뛰어드는 대신, 그들을 도와 전장에서의 승리를 얻게 해주고 그 대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용병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이트리츠의 상품은 ‘군사력’이 아닌 지휘관과 참모들이었다.

그게 반복된 현재, 자이트리츠 전쟁관의 위상은 심지어 엘프 선제후들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모양이다.

“언제쯤 도착하는가? 그 자이트리츠가 보낸 보좌진은.”

“전령의 말로는 빠르면 이틀 정도 걸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대책은 그때 쯤 생각해도 되겠군.”

갑자기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황실 별궁에서 미녀들과 지내며 마음껏 취하던 것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런 행복을 두고 전쟁 따위를 하러 가야 하다니.

그러나 황제위를 향해 달리고 있는 말은 이미 폭주 중이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내릴 수는 없었다.

다행히 자이트리츠에서 최고의 길잡이들을 보내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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