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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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대에 전달, 아군을 오사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적합한 표적이 없다면 포격을 멈추어도 좋다!”
“옛, 포병대에, 아군을 오사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표적이 없다면 포격을 멈추어도 좋다! 전달하겠습니다.”
“좋아.”
전투가 시작된지 약 20분 째, 전장의 승패는 확연하게 정해져가고 있었다. 포병대가 무리해서 근접 지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안개 속에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작정 전장에 나선 적군은 일관된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다.
결국 야영지 중심의 연대 단위로 엉거주춤 뭉쳐 엉성한 방어전을 시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군은 무사히 안개를 뚫고 적진 근처까지 접근해 살인적인 일제사격을 때려 박는 데 성공했다.
적이 반격을 하는 것 같기는 했으나, 거의 저항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적 총병들은 당황한 나머지 아무 방향이나 되는대로 총알을 낭비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안개 속에서는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의외로, 긴장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그렇지 않는 것 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다.
무수히 많은 군대가 그런 식으로 기회를 놓치고 파멸의 길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까.
적과 달리 아군이 정확한 위치까지 행군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 준비도 있었지만, 역시 왕실군 정예병들의 강철과도 같은 기강 덕분이었다.
왕실군 기병대의 디타레 드 카울 경이 지휘하는 약 2500여 명의 경기병들은 폴름스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깔때기 형태의 빈틈 없는 정찰망을 만들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두드려맞고 있는 적군의 행군 방향과 속도, 병력은 이미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여기 로스니히 마을에 머물 것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북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적의 정찰망을 피해 어제 밤에 조용히 도착했다.
그리고 각 부대의 공세 시작시 배치 및 전투 영역을 배치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거리를 두고 쉬고 있었으나···.
최근 일교차가 커서 그랬는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심한 안개가 끼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작전 취소를 고민했지만, 당사자들이 강하게 원했기 때문에 기습 공격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공격에 나선 아군 보병들은 직감과 용기, 그리고 한 번 수평을 잃으면 다시 바로잡기까지 한참 걸리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나침반에만 의존해 안개 속을 암중모색하며 나아갔다.
길잡이 장교들은 사실상 어둠 속을 더듬더듬 나아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겠으며, 뒤따르는 병사들도 눈을 가리고 앞 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나아가는 꼴이었다.
분명 초조했을 테고 부족한 시각 정보 때문에 왜곡된 방향 감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라고 끊임 없이 외쳤으리라.
이걸 부대 전체가 길게 대열을 이루어 진행하는 것이다.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동료들을 믿고 나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평소보다 길게 걸음을 걸었거나, 방향이 몇 도만 틀어졌다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자칫하면 무방비 상태로 적진 한 가운데로 들어가거나, 적에게 측면을 보인 상태로 우두커니 멈춰 있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매 걸음 싸워야 했으리라.
그럼에도 그들은 성공했다. 걸음 수를 하나 하나 세어 가면서, 정확히 목표로 했던 위치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실제로 안개가 갠 후, 공격에 나선 각 연대들은 원래 목표와 크게 차이가 없는 지점에서 적을 몰아 붙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나 할 수 있다면, 짙은 안개는 악재가 아니라 오히려 호재라고 할 수 있었다.
적군 입장에서는 안개 속에서 갑자기 병력이 뿅 하고 나타난 것으로 보였겠지.
그 결과, 북쪽에서 습격한 아군의 공격은 적 2개 연대에게 집중되었고, 거의 3배의 전력차를 견디지 못한 적 연대는 삽시간에 와해되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여 지은 적의 야영지는 상황이 좋았다면 방어에 유리한 환경이었겠으나, 전장 통제를 잃은 이상 상황 파악과 병력 이동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반쯤 망가진 적 진영과 혼란에 빠져 도망다니는 적군을 뚫고 진격하는 것은 엘랑키아 왕실군의 정예이다.
“전진!”
“대열을 유지한다! 측면을 주의해!”
“엘랑키아 왕국 만세!”
기운이 넘치면서도 느슨한 선형 대열을 유지한 채로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진격한다.
왕실군 보병들은 복잡한 출신과 구성을 가지고 있으나, 여기 선봉으로 내세운 2개 연대는,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백작이 공들여 키운 정예 중의 정예라고 한다.
말에 오르는 대신 굳건한 두 다리로 전장에 서서 엘랑키아 국왕을 섬기던 하급 귀족들로 이루어진 종사단에 그 연원을 가지는 유서깊은 부대이다.
이들은 통상적인 창병과 총병 구성을 가진 사각 대형 전력 외에, 추가적으로 양손검으로 무장한 정예 돌격대를 데리고 있었다.
방금처럼 확실한 상황에서는 전면에 나서 적 방어선을 통째로 무너뜨리거나, 창병 대열이 서로 맞물린 상황에서 측면을 노리는 유격대로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화약을 쓰지 않고 근접전에 능한 병력이다보니, 때로는 화약고나 포병대 경비를 맡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저항을 시도하는 적에게 사각에서, 혹은 정면으로 과감하게 접근해서는, 일단 적을 썰어 버리고 시작한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대착오적인 거대한 양손검을 휘두르는 중장보병들의 손에 동료들 머리가 몇 개 정도 떨어지고 나서는 어떻게든 버텨 보겠다는 의지조차 순식간에 바닥나겠지.
게다가 이들은 단순히 힘만으로 무식하게 휘두르며 기세에만 의존한 일회용 돌격 병력은 아니다.
그래서야 전장에서 오래 가지 못하고 금방 지치게 된다. 원래 사람 죽이는 일은 힘든 법이다.
왕실군의 양손검병들은 한 명 한 명이 뛰어난 검술사로서, 다양한 무기에 익숙한 테크니션들이었다.
무식한 휘두르기 뿐 아니라, 검신을 짧게 잡고 장대 무기처럼 사용하거나 컴패트하게 약점을 노리는 찌르기에도 매우 능숙하다는 것이다.
음, 마치 슈토르히의 돌격대가 생각나는데.
창설 목적이나 역할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수의 활약으로 적을 무너뜨린다는 결과는 비슷하다.
타타탕! 타탕!
따당, 탕탕탕! 탕!
“멈춰! 도망가지 마!”
“아, 아군은 어디 있는거야?”
“깃발이 안 보여!”
“아아앗, 적이다! 모두 집결해!”
삽시간에 2개 연대를 완전히 붕괴시켜버린 그들은 쭉죽 나아가서, 로스니히 마을 부근까지 적을 몰아 붙였다.
제대로 집결하지도 못하고 방향도 못 잡은 남은 적군은 안개가 흩어지자 이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대응하려 하고 있었다.
간신히 대열을 갖춘 그룬발트 창병 대열이 거침없이 나아가는 엘랑키아 왕실군을 향해 고슴도치처럼 창날을 세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퍼펑! 쾅!
아마도 지금까지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은, 포병대의 마지막 포탄 두 발이 발사되었다.
분명 포술장이 혼신의 기술을 갈아 넣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세하게 조준한 것이 분명할 그 두 발의 포탄은, 로스니히 마을의 지붕 위를 살짝 넘어 날아갔다.
퍼억!
그리고 이제 간신히 질서를 갖춘 그룬발트 밀집 대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끄아아악!”
“내 다리, 아악, 내 다리이!”
엄청난 운동 에너지를 가진 주먹 정도 크기의 쇳덩이가 빽빽한 창병의 숲 속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는 멀리서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십여 개 정도의 창대가 마치 물귀신이 아래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 처럼, 휙 하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주변의 가지런하던 창대 역시 그곳만 바람이라도 부는 듯,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적인 혼란이 회복되기 전에 왕실군 창병 대열이 격돌했다.
창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엮여 들어가고, 격렬한 창병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적군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마을 건너편의 지휘소에서도 잘 보였다.
“콘도티에레, 기병입니다! 아군 기병이 돌아옵니다!”
근처에서 대기하며 관측수 역할도 하고 있던 소년 전령이 새된 목소리로 외친다.
그의 말대로, 대열이 다소 흐트러지긴 했지만 기세가 넘치는 엘랑키아 기병대가 전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고 나서, 그나마 일관되게 반격해온 그룬발트 측 기병대를 격파, 추격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수적으로도 두 배 가까이 우세한 ‘그 엘랑키아 기병’이 질 것이라고는 생각 안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잘못될 수가 있었으니까, 마지막 불안 요소였다.
하지만 저렇게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니 불안 요소도 사라졌다고 봐도 되겠다.
“기병대에게 지시를 내리시겠습니까, 콘도티에레?”
“아니··· 그럴 필요는 없겠네. 이미 승리하고 돌아온 기병 지휘관들에게 맡기도록 하지.”
“옛, 알겠습니다.”
전령이 오가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서 훌륭하게 전황을 주도하고 있는 기병대를 막을 필요는 없었다.
“엘랑키아 왕국을 위하여!”
“국왕 폐하 만세!”
“으와아아아아아아!”
아니나 다를까, 잠시 대열을 정돈하며 숨을 고르던 엘랑키아 기병대는 적 보병 대열을 향해돌격하기 시작한다.
물론 창병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으나, 주력은 반대편에서 왕실군 보병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사각 대형의 가장 큰 약점인, 모서리 쪽을 집요하게 노린다.
그리고 1분도 지나기 전에, 적 연대 하나가 추가로 무너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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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이 무너졌습니다!”
“우리 기병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전장에서 벗어난 모양입니다!”
츠벤 타른트 폰 바르엘스조펜 백작은, 어제 밤을 보낸 로스니히 여관 근처에 깃발을 세우고 지휘소를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참모와 각 연대의 연락 장교들이 절반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혼란을 극심했다.
“츠벤 공! 2개 연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다른 2개 연대도 적 기병이 달라 붙었습니다. ‘그 엘랑키아 기사’들 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연락 장교의 처절한 외침은, 그 2개 연대도 ‘그 엘랑키아 기사’들 상대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가지런한 장창 대열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적 기병을 총으로 요격하는 것이 대기병 전투의 기본이다.
하지만 보병과 기병을 상대로 동시에 싸우느라 화력 집중도 어렵고 지휘도 어려운 상황에서 돌입을 허용했다면 확실히 대열을 다시 복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후퇴··· 를 건의드립니다, 백작님. 지금 남은 병력 절반이라도 살려서 돌아가야 합니다.”
“후속 병력, 후속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는 없겠나? 디오보르크 공작께서 맡겨주신 임무를 저버릴 수는···.”
“강행군을 해도 하루 종일 걸릴 것입니다, 백작님! 그때까지 버티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참모의 말에, 선봉장 츠벤 백작은 망설였다.
어떻게라도 전황을 뒤집을, 아니 시간이라도 끌 방법이 없을까? 이대로 패장으로 전쟁을 끝낼 수는 없었다.
영지를 담보로 잡혀가며 막대한 비용을 투자한 본전 생각이 나서는 아니었다.
이번 전쟁은 가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중요한 싸움이었다. 초전부터 아무 성과없이 이렇게 패배를 해서는···.
“적 기병이 후방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백작님, 결단을!”
“아, 알겠네. 후퇴를 실행하게!”
“알겠습니다!”
명예고 뭐고, 오늘 해가 질 때 까지 살아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에서 다행히 판단은 빨라졌다.
게다가 남은 병력 중 절반은 폰 바르엘스조펜의 가병들이다. 어떻게든 살려서 돌아가야만 했다. 불명예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