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그때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부관이었다.
“츠벤 백작님!
“대체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 아직은 모르겠으나 파악을 위해 사람을 보냈습니다!”
“좋아, 나도 가겠다. 말을 준비하도록.”
“배, 백작님, 다시 고려해 주십시오. 안개가 짙고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여기가 사령부로 알고 있기에, 각 부대에서도 보고가 이곳, 여관으로 올 것입니다.”
“으음··· 알겠네.”
확실히 이런 안개 속에서 뛰쳐 나가봤자 지휘관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전령! 전려엉!”
몇 분이나 흘렀을까, 안개 속을 뚫고 전령이 달려온다. 그가 내놓은 보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적습! 북쪽에서 포격을 받았습니다! 집결하는 적을 확인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적은 남서쪽, 그것도 통상 행군 속도로 거의 나흘 정도가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북쪽에서···.
“백작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각 연대는 마을을 중심으로 집결한 상태로 명령을 기다린다! 적이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다른 방향 또한 안심할 수 없으니 대비할 것!”
명령을 가진 전령들이 각 연대로 달리기 시작한다.
어스름한 새벽 안개가 정말로 저주스러웠다.
쾅! 타타탕! 타타타타탕!
다음 순간,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선가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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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탕! 타타탕! 타타탕! 탕!
“이쪽, 이쪽이다!”
“크허억!”
“깃발을 봐라 멍청이들아! 깃발을 기준으로 서라고!”
“아직 명령 없이 쏘지 마!”
“아악! 맞았어, 맞았어!”
아직 잠이 부족한 새벽, 어제까지 제국의 절반을 가로질러 온 고된 행군으로 인해 피곤한 몸, 십 미터 전방도 잘 보이지 않는 안개가 대응을 어렵게 했다.
방향 감각도 애매한 상태에서, 장교의 명령에 따라 꾸역꾸역 대열을 짜고 전방을 지켜보고는 있지만, 불안함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지금 보는 방향에 적이 있는 게 맞는가?
다른 아군도 같은 대응을 하고 있는가? 혹시 우리만 뒤에 남겨진 것은 아닌가?
적이 있다면 수가 얼마나 되는가?
콰앙! 타타타탕!
주변에서 울리는 포성과 총성이 불안으로 위축된 병사들의 심장을 더욱 쥐어짜듯 조여온다.
“배, 배후에 기병이!”
“총 내려! 아군 전령이다, 멍청아!”
“명령 없이 쏘지 마라!”
일촉즉발의 상황, 불안으로 떨고 있는 병사들 모두가 몸에 상대를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살상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위험했다.
혹시라도 아군을 향해 사격하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쏜 쪽이나 맞은 쪽이나 다신 일어설 수 없게 되니까.
다행히도 경험 많은 용병 출신들이 섞여 있었기에, 그룬발트 군의 사격 군기는 훌륭한 편이었다.
대열은 여전히 삐뚤빼뚤하고, 여기저기 병사들이 뭉쳐있는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질서는 유지하고 있었다.
“조용! 모두 조용!”
무언가를 느낀 중대장이 외치자, 아우성치던 병사들이 차츰 조용해진다.
해가 떴는지, 포성을 듣고 허겁지겁 막사를 나올 때에 비해서는 주변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안개는 자욱해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서 들리는 긴장한 병사들의 숨소리와 무기와 장구, 갑주가 스치는 쇠 부딪치는 소리가 전부였다.
어딘가에서 비명소리가 들리고, 총소리가 들리고, 폭발음도 들리고는 있었다.
하지만 마치 꿈속에서 들리는 것 처럼, 물 속에 머리를 넣기라도 한 것 처럼 꽤 멀리서만 들리고 있었다.
사방이 안개에 감싸여 같은 대열에 있어도 몇 명 건너면 동료들도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혹시 자신들은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죽어서 저승으로 떠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 환경은 몽환적이었고, 극도로 제한된 시각 정보는 생각을 마비시켰다.
“모두 조용! 저거··· 저거 들리나?”
“뭐, 뭐가 말입니까, 대장님?”
중대장이 다시 한 번 외쳤다. 그는 안개 속으로 귀를 기울이다가 답답했는지 몇 걸음 앞으로 나간다.
“사박사박하고 흙바닥 스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
“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빌어먹을,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알 수 없으니···. 이 쪽으로 오는 게 아니라면 좋겠군.”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중대장의 허락에 부관은 숨을 들이쉬더니, 안개 속을 향해 입가에 손을 대고 외친다.
“우리는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섬기는 툰나르 연대이다! 전방의 부대는 소속을 밝혀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안개속으로 울려 나갔으나 메아리는 없었다. 메아리만 없을 뿐 아니라, 어떤 반응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답이 없는데요?”
“젠장, 내가 잘못 들은 거였나···.”
중대장이 몸을 돌리는 찰나, 갑자기 옆에서 뜨거운 바람이 느껴졌다.
서늘한 새벽 안개를 날려버리듯 뚫고 들어온 뜨거운 바람은 마찬가지로 뜨거운 납덩이를 품고 있었다.
퍽! 카카칵! 퍼퍽!
“...어?”
“커허헉!”
중대장은 관자놀이에 명중당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지하기도 전에, 힘이 풀린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졌다.
반대로 몸을 돌리고 있던 부관은 오른쪽 가슴에 총알을 맞았다. 흉갑에 비스듬히 명중했으나, 각도 탓인지 요행히도 긁듯이 흔적을 남긴 납탄은 튕겨나갔다.
허나 불행하게도 소용 없었다. 곧바로 다음 총알이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폐를 당한 부관은 대단히 끔찍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짧은 고통으로 잠시 몸부림친 직후 절명했다.
죽음을 품은 뜨거운 바람이 중대장과 부관 두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에 만족하고 끝날 리 없었다.
그대로 두 사람의 유해를 지나친 총탄들이 휘하 중대원들을 덮친 것은 당연했다.
퍼퍽, 퍽! 태앵! 콰콱!
“끄아악!”
“억!”
“어디, 어디서··· 허억!”
그리고 삽시간에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간다. 안개 속에서 날아왔음에도 일제사격은 상당히 정확했다.
“쏴라, 쏴버려!”
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탕!
누군지도 모를, 심지어 장교인지 병사인지도 모를 외침에 방아쇠를 당긴다.
선두 뿐만 아니라, 후열에서도, 측면의 예비대들도 발작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게다가 상당수는 오발을 막기 위해 총구를 하늘로 향한 상태 그대로였다.
백 명이 훌쩍 넘는 중대 전체가 ‘어딘가’를 향해 일제히 방아쇠를 당기자 마치 화산이라도 폭발하는 것처럼 엄청난 화염이 사방으로 뿜어진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자욱한 아침 안개에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화약 연기가 더해진다.
이정도 열기면 안개가 사라질 법도 하건만, 뻑뻑한 안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타타타탕! 따다당!
타탕! 타타타탕!
“어억! 윽!”
“재장전! 재장전해 머저리들아!”
“으아, 아아아아!”
“크으윽···.”
또 한번 총탄이 주변을 훑고 지나가고 많은 수가 추가로 바닥에 눕는다.
공포스러운 것은, 아까와는 사격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비스듬한 측면에서 사격이 날아왔다.
중대장이 사망한 상황에서, 남은 장교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지금 자신들이 맞는 방향을 향해 서 있었던 건 맞나? 맞는 방향으로 사격을 한 게 맞나?
혹시라도 아군을 쏴 버린 건 아닌가!
“저, 정면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오?”
“하지만 중대장께서 배치한 방향입니다!”
“젠장할, 그 중대장이 지금 저 앞에 머리가 터져서 누워 있단 말이오!”
초조함이 이성을 날리고, 얻는 것 없이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장교들이 서로 다투자 병사들은 점점 불안해져 간다.
“이, 이런···.”
“병신! 똑바로 못 해!”
“죄, 죄송합니다!”
총구로 탄환을 밀어 넣으려던 병사가 손이 떨렸는지 납탄을 바닥에 떨구고 만다. 평소에는 잘 하던 일도, 이런 상황이 되면 똑바로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 지금처럼, 아까 쓰러진 동료의 진득한 피가 흉갑에 묻어 굳지도 않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이, 일단은 대열을 이대로 유지하되, 창병들의 측방에 비스듬하게 대열을 하나 더 만들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그런데 혹시라도 기병이 온다면···.”
“그때는 창병이 지켜주겠소!”
장교들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로,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대열에서 빼낸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부 병력이 이동하기 위해 대열을 벗어나자 새로운 혼란이 생긴다.
옆의 동료가 자리를 비우면서 생기는 본능적인 두려움.
혹시 저들은 도망치는 게 아닌가? 라는 의심까지.
“이야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하지만 그런 공포는 곧 사라진다.
안개속을 뚫고 새로운 죽음을 부를, 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떨리는 손 때문에 아직 재장전을 끝마치지 못한 그룬발트 군 총병은 멍한 눈으로 갑자기 안개를 뚫고 나타난 그림자를 바라본다.
마치 지옥의 사자처럼 고함을 지르고 있는 그것은 거대한 양손 검을 어깨 위로 치켜들고 있었고, 머리에 쓴 투구에는 풍성한 깃털 장식을 하고 있었다.
“흐이야아앗!”
카각!
갑자기 왼쪽 얼굴에 뜨거운 것이 확 튀었다.
그러나 그 총병은 절명하는 순간까지 그것이 옆에 서 있던 동료의 반쯤 잘려나간 얼굴에서 튄 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동료의 얼굴을 잘라버린 양손검의 참격은 그대로 멈추지 않고 총병의 어깻죽지에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스윽 하고 시야가 흔들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이제 막 안개가 개이기 시작한 아침 하늘이었다.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가 안개속으로 흩어졌고, 후열 병사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이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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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개기 시작했습니다, 콘도티에레!”
“기병대에 신호를! 다음 포격 직후 돌입한다!”
“옛, 콘도티에레!”
나는 긴장으로 인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확실히 안개가 옅어지고 있고 아까에 비해서 사방이 밝아졌다.
해가 뜨고 안개가 갠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임과 동시에, 불안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말하자면 눈을 감고, 더듬어가며 지휘를 하고 있었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명확한 사전 계획 자체는 있었고 연습도 하긴 했지만, 지리 정보와 감만 가지고 정확한 위치를 찾아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가 보고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계속 목 뒤를 따끔거리게 하고 있었다.
만약 전령을 보내지도 못하거나, 전령이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젠장할, 소심함 때문에 자꾸 불안해진다.
안개가 완전히 거쳤는데 전황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거나, 부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진격했거나 한다면 큰일이다.
“에트 경!”
“옛?”
갑자기 누군가가 내 등짝을 친다. 얇은 망토 안쪽의 배면갑과, 쇠장갑이 부딪쳐 쇳소리가 난다.
놀란 내가 바라보니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엘랑키아 제일의 노장, 희끗희끗한 눈썹 아래의 동그란 눈은 희안하게도 마치 소년의 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도하게 불안해하고 있군! 잘못될 걱정을 하지 말고 자신감 있게 지휘하게! 혹시라도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이 늙은이가 질 테니!”
“프레니히 백작님···.”
“그리고 자네가 내보낸 병력들이 누군가? 바로 엘랑키아 최강의 왕실군 정예들이네! 설령 계획이 다소 틀어졌더라도 힘으로 잘못을 바로 잡을 힘이 있는 친구들이지! 직접 훈련시킨 내가 보장하겠네.”
노장의 꾸지람 아닌 꾸지람을 듣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하긴, 새벽에 안개가 예상보다 너무 심하게 끼어 공격을 보류할까 할 때 나섰던 것이 왕실군의 전방 장교들이었고, 이를 최종 승인한 것이 프레니히 백작이었으니까.
물론 승인이라고 해도, 무작정 밀어 붙인 것이 아니라 ‘왕실군의 정예들이 할 수 있다 생각하면 실행하라’고 했던 것이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나는 과하게 겁을 먹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전선에서 진짜로 목숨을 걸고 있는 장병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장을 주시하고, 최악의 경우 빠르게 후퇴하면 된다.
전장을 자욱하게 덮고 있던 안개가 마치 마법처럼 걷혀나간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빠르게 시야 안의 전황을 확인한다. 5초 동안, 계획에서 크게 어긋난 점이나, 위기에 처한 부대가 없음을 확인했다.
더 측면의 부대들의 상황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들도 이만큼 유능하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포격 개시를 전달하라! 그리고 기병 돌격 나팔을!”
“옛, 콘도티에레!”
“쏴라!”
퍼퍼펑! 뻐엉!
분산 배치된 여섯 문의 야포가 곧 불을 뿜었다. 조심스럽게 아군을 피한 사격.
그들에게는 오늘 보병 전투가 시작된 이후 사실상 첫 사격이다. 지금까지는 안개 속에서 혹시라도 아군을 맞출까봐 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겨어억!”
“우와아아아아아아!”
날카로운 나팔 소리에 이어 기병들의 외침이 메아리친다.
아직 흔적이 남아있는 새벽 안개를 뚫고, 엘랑키아 기사들이 적을 향해 돌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