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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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쉽게 돌아가지는 않는군··· 두 명이 돌아오지 못했나?”
“예, 폭발에 휘말리는 바람에···.”
“그랬군··· 나머지 부상자들은 괜찮나?”
“몇 명이 화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자네도 어서 가서 치료를 받게.”
“알겠습니다, 공작님.”
엘랑키아 왕실 공병감이자, 공성전을 총괄하고 있는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은 참혹한 몰골로 돌아온 부하 공병들을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첫 실수가 생겼다.
거대한 연리목 세계수가 가지를 드리운 고대 도시, 폴름스에 대한 엘랑키아 군의 공격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공성 시작 일주일 째, 주된 공격은 공성포대에 의한 포격이었다.
그 포격은 안전한 한계 사거리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닌, 비교적 가까운 거리까지 지그재그로 파고 들어간 참호에서 발사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되는 직사 공격이었다.
완벽하게 계획된 거리와 각도에서 꾸준히 이어지는 포격은 성 내에서는 반격이 어려운 까다로운 위치에서 계속되었다.
그 결과, 집요한 포격의 표적이 된 폴름스의 일부 성벽에는 도저히 복구가 불가능할 치명적인 피해가 쌓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확실한 통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막대한 에너지를 품은 포탄이라 할지라도 성벽을 흔적도 없이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으니까.
무엇을 해도 돌무더기는 남게 마련이다. 보병이 다른 장비 없이 기어 오를 수 있을 정도의 돌더미로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확실한 효과를 보려면 충분히 넓은 구간에 여러 곳의 돌파구를 만들어야 한다.
설령 성벽을 뚫어 놓았더라도, 적도 바보는 아니니까. 돌파구 반대편에는 분명 치명적인 준비를 해놓고 기다릴 것이다.
분명 어마어마한 화력이 집중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선두 부대는 막대한 희생을 잃을 것이다.
돌파구가 좁을 수록 처음으로 성벽을 넘은 용감한 병사들은 그 위험을 동료들에게 전할 틈도 없이 죽어가겠지.
하지만 문제는 엘랑키아 군이 보유한 공성포의 수가 그다지 많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부러 참호를 파고 들어가 효율적으로 포격전을 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성 책임자인 에티엔이 보기에는, 진행이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물론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공성전은 아니다. 성벽을 무너뜨리고 장악하고, 도시 내부로 돌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도 시작일 뿐이다.
폴름스는 다른 외부적 요인을 모두 빼더라도, 그 자체로 대도시이다.
그룬발트에서 가장 강성한 선제후 중 하나의 본성이며, 성 안에는 최소한 2만 명 가량의 수비군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성벽을 장악한 후로도, 건물과 거리를 다음 보루로 삼아 저항해올 적을 제압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추측 조차 불가능했다.
‘실질적으로 폴름스의 함락은 앞으로 도착할 지원군을 섬멸한 이후에 가능할 것이다.’
에티엔의 형님이자 엘랑키아의 군주, 그리고 이 전투의 사령관인 다고베르 2세는 이렇게 말했다.
물자만 따지면 분명 몇 년은 버틸 준비가 완료되었을 폴름스를 힘 만으로 함락하는 건 어렵다. 가능하다 해도 몇 년이 낭비될지 모른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엘랑키아의 이번 원정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확실한 것은 왕가의 모든 것을 긁어모으다시피 해서 편성한 왕실군을 몇 년씩이나 국외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엘랑키아는 그룬발트 전체를 상대로 맞서 싸워야 하는데, 폴름스는 그룬발트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점을 노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폴름스 선제후의 세력을 도시로 몰아 넣어 나오지 못하게 막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그룬발트 제국 전역에서 몰려올 지원군을 영격한다.
그리고 도시에서 지척의 거리에서 지원군을 섬멸한다.
요새의 물리적인 방어력이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수비군이 정신적으로 무너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고된 농성전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 힘든 싸움이 언젠가는 끝나리라는 생각에 기대기에 가능하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그룬발트의 대군이 눈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 수비군의 마음도 꺾이리라.
···라는 것이 엘랑키아 군의 기본 전략이다.
공성 책임자로서 약간은 분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에티엔은 자신이 이 거대한 전략에서 보조적인 역할이라도 맡을 수 있다는 점에 만족했다.
다만 힘으로 폴름스를 함락하려는 생각이 없다고 흉내만 낸다는 것은 아니다.
공성을 맡은 이들은 모두 진지하게 임하고 있으며, 폴름스 내부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어야 폴름스 외부의 적 역시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요새 측면의 샛길을 노리기 위해 소규모 공병 팀을 보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적 수비군에게 두 명이 당했고, 게다가 페타드가 미리 폭발하는 바람에 다수가 화상을 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귀환한 공병들의 사기는 여전히 높다는 것이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무모하고 가망 없는 시도에 이은 절망적인 실패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음 번에는 좀 더 주의깊게 기회를 노려야겠다고 결심한다.
이번에도 대규모 보병의 지원이 있었다면, 성벽 위의 적을 제압하며 좀 더 수월하게 해 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어쨌든, 희생자는 애도하며 실패는 다음 성공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면 될 것이다.
실제로 엘랑키아 공성 공병들의 기습적인 공격은 수비군에게 심한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불규칙한 시간표에 따라서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포탄에도 불안증에 걸릴 지경인데, 밤낮없이 약점을 노릴지 모르는 기습 공격을 막아야 하니 말이다.
게다가 이 기습 공격은, 까딱 놓치는 순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대량의 화약 공격이다.
비록 공격측에에서는 한 곳을 공격했을 뿐이지만, 방어측에서는 모든 곳을 대비해야 했으니까.
어쨌든 이제 겨우 일주일, 공성전은 앞으로도 길게 남았다.
그룬발트의 지원군이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고, 지원군이 도착하더라도 포위를 푸는 것은 아니다.
폴름스를 포위한 상태로, 적을 끌어들여 이를 격멸한다.
이건 다고베르 2세 형님 폐하가 ‘일부러’ 선택한 고난의 길이다.
자신은 그 신하로서, 동생으로서 성실하게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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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국군이 폴름스를 포위한 상태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2주 정도 지났을 때, 1차 포위망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아직 허술한 점은 있지만 애초에 계획한 핵심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는 것이다.
폴름스에 대한 공격은 공성 공병대와 소수의 지원대에게만 맡기고 나머지 일반 병사는 물론, 하급 귀족에 종사들까지 달라붙어서 일심불란 진행한 덕분이었다.
여기 로델베르크를 비롯한 주변에서 잡은 포로들 역시, 해방을 대가로 투입했으며, 인근 지역에서 돈을 주고 데려온 용역 노동자들도 다수였다.
이를 스스로도 공학 학위가 있고, 일부러 주디칼리에서 영입한 전문가들의 설계 아래 작업해서 생각 이상으로 빠른 속도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아직 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고무적인 소식이었으므로, 곧바로 추가 보강작업이 이어졌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핵심 진지를 연결하는 방어선이 새로 그어졌다.
거기에 기병은 물론 보병의 접근도 까다롭게 만드는 마방책과 참호가 수도 없이 추가되는 것이다.
방어선을 보강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에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힘든 막노동의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에 슬퍼하면서 부지런히 작업은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3주가 지났을 때는···.
엘랑키아 군은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도착하리라 생각했던 그룬발트의 지원군이 아직 오지 않는 것이다.
원래 빠르면 열흘, 늦어도 스무날 안에는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핵심 도시 중 하나인 폴름스가 포위당하면 당장이라도 구름처럼 몰려오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폴름스의 선제후는 다른 선제후들에게 버림 받았나?”
“서, 설마 그렇겠나 싶습니다, 폐하. 그룬발트의 선제후들이 밀어주는 차기 황제 후보자가 대군을 편성했다는 정보는 교차 확인이 된 확실한 정보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장거리 정찰을 보내보면 어떻겠습니까?”
“정찰을 한다고 해도 그룬발트 수도까지 들렀다 올 수는 없는 게 아니겠나···.”
다고베르 2세가 진심으로 그럴 가능성을 고려하며 전략을 완전히 재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고민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공성이 시작되고 정확히 23일 째, 주변을 정찰하고 있던 기병대장 디타레 드 카울에게서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최소 6개 보병 연대 이상으로 보이는 적의 대열 발견, 기병 다수의 보조를 받고 있음’
지금까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보고였다.
엘랑키아 군이 도착한 이후, 폴름스 주변에서 발견된 적은 정찰대가 분명한 기병대와 길을 잃은 소수의 보병들 뿐이었다.
이렇게 다수의, 그것도 단일 야전군으로서 모양새를 갖춘 대군이라면 적어도 길 잃은 군대는 아님이 분명하다.
게다가 규모로 보자면 폴름스를 구원하기 위해 행군중인 본대가 내세운 전위대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드디어 적이 나타났다!
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엘랑키아 주둔지 전역에, 아직 방어선 보강 공사중이던 병사들에게 퍼져갔다.
진작 끝날 줄 알았던 중노동에 시달리던 병사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잠시 풀이 죽어있던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올랐으며, 당장이라도 그룬발트 군을 때려 잡을 기세가 피어 올랐다.
···하지만 당장 엘랑키아 군이 눈에 띄는 대응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적 발견 정보는 아주 멀리까지 정찰을 나간 기병대에서 온 것이다. 보병은 아무리 빨리 행군해도 사흘 정도는 지나야 도착하리라.
게다가 지금 확인된 것은 적의 선봉에 해당하는 병력, 본대가 도착해 집결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히 뭔가가 바뀌기 시작하긴 했다.
시작한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당장 삽과 공구를 놓을 수는 없었으나, 교대 근무를 시작하고 하루에 공사에 투입되는 시간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순차적으로 휴식이 주어졌으며, 자연적으로 오른 기세를 억눌러 미안했는지 특식과 함께 오랜만에 술이 배급되었다.
명백하게, 엘랑키아 군 사령부는 오랫동안 진지 건설 작업에만 투입되었던 병사들을 천천히 담금질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들은 흙투성이의 노역꾼들이 아니라, 엘랑키아 국왕의 직할군에 어울리는 정예병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전투의 냄새를 맡아 흥분한 병사들 사이에서는 또 하나의 소문이 돌았다.
바로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이끄는 정예군이 어느날 새벽 비밀리에 진영을 떠났다는 것이다.
확실히 평소 진지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특유의 호탕한 목소리로 병사들을 격려하며, 때로는 본인도 웃통을 벗고 노역에 뛰어들던 노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왕실군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 노장이 갑자기 사라지자,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프레니히 백작의 정예군이 적의 선봉을 기습하기 위해 떠났으며, 적장의 목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라는 그럴듯한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프레니히 백작의 막하에는 멀리 엘랑키아 남부 변경 출신의 참모가 동행했다는 묘하게 구체적인 소문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