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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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그룬발트 제국 황궁의 아침은 고요하다.
벌써 26년 째 주인이 없는 이곳은, 최소한의 유지 인원만 있을 뿐, 넓고 화려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도 조만간 주인이 생기게 되겠지만.
카젤하겐의 선제후, 루발린은 굳게 닫힌 본궁의 문을 바라본다.
엄격한 제국의 법도에 따라, 황제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황궁에는 외부인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오로지 황제위 이외에는 어디에도 충성하지 않는 예속 가문 출신인 근위병들이 철통같이 경비하며, 같은 가문 출신 고용인들이 문제 없도록 관리하고 있었다.
이 황궁에 메인 예속인들은 전통에 속박된 노예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는 모두에게 존중받는 특권 계급이었다.
태어난 이후 오로지 운명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삶이지만, 대신 제국 전역의 귀족과 평민들, 심지어 선제후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황궁의 관리자들이다.
황제가 아직 선출되지 않은 시기에는, 그들만이 오로지 황궁을 출입하며 새로운 황제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고.
어쨌거나 오늘 루발린이 황궁을 걷고 있는 이유는 별궁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별궁이라고 아무나 방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나, 몇몇 특수한 경우 법도에 따라 별궁에 머물 수 있다.
그 몇몇 경우 중 하나가 바로 ‘둘 이상의 선제후 가문에게 지지 선언을 받은 황제 후보자’였고.
엄격한 궁내부 심사에 따라 입장이 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손님’일 뿐, 별궁의 소유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으로 침실과 응접실, 업무실과 회의실 정도를 대여 받는 정도가 일반적이지만···.
이번 방문자는 사실상 차기 황위 계승이 확실시 된 인물이기 때문인지, 방자할 정도로 별궁을 자기 집처럼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카젤하겐의 선제후, 루발린이 만나러 가는 것은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이다.
모두 일곱 선제후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는 황제 후보이며, 이번 엘랑키아 침공에 맞설 대군을 이끌 사령관이다.
“술 냄새···.”
고대 혈족 특유의 예민한 감각 때문인지 복도에까지 술 냄새가 진동한다.
이래서 인간들과 함께 지내면 역겨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도, 루발린 선제후는 혐오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갑자기 엘프 선제후가 나타나자 호위병들과 하인들이 눈에 띄게 우왕좌왕한다.
“고, 공작님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루발린 선제후가 왔다고 전하게.”
갈수록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가 나지만, 가능한 속으로 참고 삭인다. 지금은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니까.
대군을 이끌고 현재 폴름스를 공격하고 있는 엘랑키아 군을 무찔러야 할 디오보르크 공작은, 어째서인지 벌써 며칠 째 황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치 벌써부터 황궁의 주인이라도 된 것 처럼, 별궁을 통째로 개방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낮에는 ‘새로운 추종자’를 받아 인사를 하고, 저녁에는 연회를 열어 술을 진탕 마신다.
황성 밖에 주둔하고 있는 휘하 병력에게도 풍부한 하사품이 주어졌다.
출정에 앞서 먼저 황궁에 입성하고, 신성 그룬발트 제국 전역에 ‘유력한 황제 후보자가 엘랑키아를 상대로 출전한다’를 알리겠다는 의견이 나쁘다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전쟁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새로운 황제의 권위였고, 폴름스의 회색 마녀 네프셀시엔이 고생은 할 지언정 하루 아침에 함락될 도시도 아니었으니까.
허나 새 황제의 세력 규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폴름스 구원이기도 한데, 벌써 며칠이나 이러고 있는 것은 큰일이었다.
만에 하나 폴름스의 네프셀시엔을 구원하지 못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다시 황위 계승은 오리무중으로 빠져 들 테니까.
“지금 공작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간이 없으니 들어가겠네.”
“고, 공작님께서는 방금 일어나셔서···!”
집사의 만류를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과연 황궁 별관의 객실, 내부는 안에서 말을 운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넓고, 또한 화려하다.
그 한 가운데 황금빛 이불이 덮인 침대에서는 아직도 꾸물거리는 누군가가 있다.
방 안에서도 연회는 이어졌는지, 강렬한 술냄새가 코를 찌른다. 대체 무슨 돈으로 이렇게 놀고 먹는지도 알 수 없었다.
추종자들이 돈과 귀중품을 가져다 바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루, 루발린 공?”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온 엘프 선제후를 본 디오보르크 공작이 당황하면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옆에 누워있는 미녀는 여전히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심지어 침대에 여자가 한 명이 아니다.
루발린은 지금 심정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매우 큰 노력을 해야 했다.
지금 그가 불태워 죽이고 싶은 상대는, 그가 지지하여 황제를 만들고 이후 충성을 다해야 할 인간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루발린 공. 그게··· 어제, 좀··· 음···.”
그나마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미안한 모습이라도 보이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디오보르크 공작을 다음 황제로서 지지하게 된 것은 그가 완벽한 인물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신성 그룬발트 제국 역사상 완벽한 황제 따위는 없었다.
이웃의 라이벌이며 지금도 전쟁 중인 엘랑키아의 국왕들과 비교해도, 유난히 그룬발트 황제들은 통치자로서 자질이 떨어지는 이들이 많았다.
어째서일까, 엘프 선제후들이 인간 중에서 황제를 선택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혈연 계승보다도 못한 자들을 지존의 자리에 올리는 것일까.
그건 사실 황제에게 자질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황제를 선택하는 입장인 엘프에게 편리하기 때문은 아닐까.
오늘따라 별 생각이 다 드는 카젤하겐의 선제후, 루발린이었다.
그러나 디오보르크 공작은 원래 이런 인물은 아니었다.
완벽한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적어도 ‘착실하고 현실적인 야심가’라고 부를 수 있는 청년 귀족이었다.
그의 목표는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었고, 상당 부분을 젊은 시절 이미 이루고 있었다.
가문의 힘을 규합할 줄 알았고, 외부인을 만나 그 마음을 얻는 데 능숙했다.
이웃 가문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다가,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힘을 빌리는 데도 성공했었고.
게다가 통치자로서, 또 지휘관으로서도 나름의 재능과 운을 보여주었다. 몇 번 운을 시험해야 했을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하고 살아 남았으니까.
이것이, 루발린이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지하기로 한 이유였다.
그의 이런 성향 덕분에 여러 황제 후보자들 중 가장 견실한 세력을 이루었고 아직까지 살아 남았다.
다른 가문들이 지지했던 황제 후보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현재 모두 죽었다.
자연사든, 사고사든, 전사든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다.
문제는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 공작이 사실상 가장 유력한, 단 한명의 황제 후보가 되면서 벌어졌다.
현실적이라 좋았던 그의 비전이 두루뭉실해졌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간신을 옆에 두고 여자를 찾아 다니게 되었다.
술에 취해 있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아졌다.
경쟁자들이 사라지고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확실시 되어서 그랬는지, 더더욱 많은 추종자들이 떠받들게 되어서 그랬는지.
어쨌든, 사람이 변했다.
“엘랑키아의 공성포가 폴름스의 성벽을 때리고 있다는 소식이 벌써 며칠 전에 전해졌습니다. 공작께서는 언제 쯤 구원군을 이끌고 출병하실 것인지 여쭙고 싶군요.”
“하하··· 그야, 가야겠지요? 아직 도착하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 말입니다.”
“집결은 전장에 도착해서 해도 되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요···.”
헝크러진 머리에도 여전히 말쑥한 얼굴이지만, 태도가 산만하고, 그 눈은 여전히 침대의 여자와 탁자 위의 술병을 오가고 있었다.
“디오보르크 공, 다음 선제후 회의에서 공께서 황위에 오르시려면, 폴름스 선제후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죠! 예, 오늘은 반드시 소집령을 내리겠습니다. 내일, 늦더라도 모레에는 출정하도록 해야···.”
그나마 선제후 회의 이야기를 하자 디오보르크 공작의 표정이 좀 더 진지해진다.
그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카젤하겐의 선제후령을 비롯한 여러 선제후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번에 황제가 전해지지 않으면, 다시 10년, 아니 25년이 더 지나도 새 황제가 즉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저는 좀 더 기다리겠습니다, 공작. 모든 결정은 공작님께 달렸다는 것을 명심해 주셨으면 싶군요.”
“물론이죠. 선제후 전하를 실망시킬 일은 없습니다.”
대화를 하며 술이 좀 깼는지, 디오보르크 공작의 얼굴에서는 예전의 총기가 조금 느껴진다.
그래, 이 정도는 황제로서 큰 단점도 아니다.
이상한 취미, 게으름, 고약한 술버릇, 심지어 여자에 대한 집착까지도.
선제후로서 전부 용납 가능한 범위였다.
오히려 이상한 고집이 있거나 신념을 가지고 예상이 어렵고 감당이 불가능한 짓을 벌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지금 신성 그룬발트 제국은 황제가 필요하다.
이 위대한 제국을 26년 넘게 군주 없이 방치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된 이상, 누가 되든 상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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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과광! 쾅!
“무너진다! 피해!”
“이쪽이 아냐! 흙을 준비해라!”
“으아아앗! 조심해!”
폴름스의 성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고대 아란 제국 시대의 석축 위에 주의 깊게 쌓아 올린 화강암 벽돌이 쇠로 된 공성 포탄에 맞아 박살나고 있었다.
엘랑키아 군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성벽을 공격하고 있었다.
땅을 지그재그로 파고 들어와, 지면보다 낮은 곳에 포좌를 건설하고 거기 공성포를 올렸다.
그리고 이게 모두 그룬발트 수비군의 예상보다 몇 배는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삽질을 해 대는지 자고 일어나면 성밖에 포구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포좌가 건설된 위치는, 폴름스의 성벽 위에서는 저격이 불가능한 위치였다.
방어 포대에서는 거리가 멀거나 각도가 나오지 않고, 가까운 성벽에는 포를 올릴 수가 없는 구조였다.
이게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주의 깊게 수비군에게 까다로운 지점을 계획했고, 실무자들은 거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교통호를 건설해, 포를 옮기고 포좌를 건설했던 것이다.
심지어 비스듬히 성벽 끄트머리를 노릴 수 있는 각도로 건설되어 측면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펑! 꽈아앙!
또 한 발, 포탄에 얻어 맞은 망루의 한 귀퉁이가 빵 조각 뜯어내듯 떨어져 나간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성벽에서 부들부들 떤다.
하지만 다행히도, 엘랑키아 군의 공성포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일일이 참호를 파고 들어와야 하다보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지난 나흘 동안, 수비군은 열심히 성벽을 수리했다.
보강할 수 있는 부분은 보강하고,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흙더미를 쌓거나 흙이 담긴 통과 자루를 쌓는다.
최소한 성벽이 난잡한 잡석 더미가 되도록 방치해 적이 그대로 타넘도록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흙! 여기 흙 가져와!”
“하나씩 올려! 조심해!”
잠시 포격이 잦아든 사이, 부지런히 흙이 담긴 통을 올려 무너진 부분을 보강한다. 다음 포탄은 몇 분 후에 올지도 모른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움직이고 있었다.
허나 공성포는 거대한 만큼, 장전이 그다지 빠르지 않은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벌써 포격에 대응하기 시작한 게 나흘 째, 나름의 규칙과 리듬이 만들어져 거기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퉁! 투우웅!
그래서인지, 귀가 떨어져 나갈 듯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는 공성포와 다르게 좀 낮고 둔한 포성이 들렸을 때는 대응하지 못했다.
타앙!
마치 보관을 잘못하여 무기를 돌바닥 위에 떨군 듯한 소리가 났다.
처음 보는 형태의, 사람 머리만한 원형 물건이 일부가 무너진 성벽을 넘겨 안쪽으로 떨어졌을 때 잠시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이게··· 뭐지?”
꽈앙!
성벽을 복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인간들 사이에서, 굉음과 함께 화염이 솟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