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
‘엘랑키아 군, 폴름스 공격 시작’
어느 날 아침, 폴름스의 선제후 네프셀시엔에게 전해진 보고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네프셀시엔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몇 안되는 혈족들의 문안 인사를 받았으며,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선제후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뿐이다.
급박한 전황을 알리는 전령도 없었으며, 성벽을 두드리는 공성포의 굉음도 없었다.
단순히 성의 핵심부, 안전하고 조용한 곳이라서 그렇다기에도 너무 평소와 같았으니까.
“엘랑크의 무리는 어떤 식으로 공격하고 있는가?”
“포위망을 완전히 닫고 서서히 조여오고 있습니다. 목책을 두르고 있으며, 참호를 파서 접근하는 모습도 포착되었습니다.”
“목책? 참호? 직접 눈으로 보아야겠다.”
“상황이 위험할 수 있으니··· 관측 망루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수비대 장교의 안내를 받아좁은 나선형 계단을 지겹게 오른다.
선제후로서 평소에는 잘 올라오지 않는, 폴름스 내성의 높은 망루에 오르자 더 낮은 외성과 거점 외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적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폴름스를 완전히 외부로부터 격리하려는 모양입니다. 도시를 완전히 둘러치는 포위망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 외부에서 대군이 지원하러 온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그게··· 저희 수비대 쪽에서는 엘랑키아 군이 이중 방벽을 건설하고 있다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중 방벽?”
인정사정없다 알려진 ‘회색 마녀’ 네프셀시엔의 날카로운 질문에, 수비대 장교는 땀을 뻘뻘 흘리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한다.
“내부 방벽에 이어서 외부 방벽을 최소 두 겹으로 건설하는 것입니다. 내부 방벽은 이 곳, 폴름스를 포위하기 위한 방벽이며 외부 방벽은 지원군을 막는 역할입니다.”
“흐음···.”
“두 방벽 사이에는 연락 및 이동 통로와 엘랑키아 군의 병영이 자리잡게 됩니다.”
“...절대로 폴름스 공격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역겨운 놈들.”
네프셀시엔은 혐오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전략적 목적 상, 어쩔 수 없이 엘랑키아 군이 폴름스의 성문 앞에 이르는 것을 방치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전혀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지원군이 온다면 적은 당연히 포위를 풀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폴름스 주변 어딘가에서 결전을 준비하겠지.
진정 바라는 바는 아닐지라도, ‘그룬발트의 새 황제’가 될 디오보르크 공작이 이끄는 대군이 은혜를 모르는 야만족들의 머리 위에 철퇴를 내리게 되리라.
배은망덕한 엘랑크 족을 이끄는 무도한 왕의 목숨을 받을 수 있다면, ‘이번’ 황제 자리 정도는 얼마든지 넘겨줄 수 있었다.
허나 적은 좀 다른 선택을 할 모양이었다.
지원군과 맞서 싸우는 와중에도, 폴름스에 대한 포위를 풀 생각은 없다는 것인지.
“...건방진 것···.”
말을 듣고 있는 수비군 장교가 놀라서 움찔 할 정도로, 네프셀시엔의 말은 강한 혐오와 경멸을 담고 있었다.
“포격은? 우리 수비군의 포병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재는··· 포대의 사거리 내에 노릴 만한 표적이 없습니다, 선제후 전하.”
“그건 무슨 말인가!”
“적은 마치 폴름스의 방어체계를 잘 알고 있다는 듯, 포대와는 거리를 두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고양이 앞의 쥐 꼴이 된 장교는 어쩔 줄 몰라하며 보고한다.
엘랑키아 군은 주의 깊게 사방에서 조여오고 있었다.
성벽의 고정 포좌에서 노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표적 뿐이다.
이동식 혹은 고정식 목책과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모를 간이 천막 뿐. 거리가 멀어 명중도 담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화약 낭비였다.
육중한 나무 판을 연결해 바퀴를 단 이동식 목책만 해도, 대체 어디에 쓸 생각인지 어마어마한 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걸 몇 개 정도 포격으로 부순다고 한들 전과라고는 말하지 못하리라. 실질적인 타격도 입히지 못할 것이고.
물론 좀 더 대담하게 성에 접근하고 있는 엘랑키아의 정찰대나, 길을 닦고 장애물을 설치하는 부대는 괜찮은 표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적은 마치 구조를 알고 있다는 듯, 기묘한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폴름스의 낙후된 요새 포좌들은 상당히 제한된 포문과 사격 각도를 가지고 있었고, 적은 이를 얄밉게 피하며 접근하고 있었다.
애초에 선제후의 거성이 있는 대륙 굴지의 대도시인 폴름스이다.
핵심적으로 방어 시설이 몰려있는 약점을 피해도 공격 할 만한 장소는 길고 긴 성벽에 얼마든지 있었다.
“포대를 옮길 수는 없는가? 옮겨서라도 적을 포격하라!”
“배치를 위한 큰 공사가 필요합니다, 전하. 게다가 필연적으로 방어력이 감소···.”
“그렇다고 마음대로 드나드는 적을 그냥 둘 수는 없다. 즉시 적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로 포대를 재배치하도록 하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주군의 지시에 긍정하기는 했으나, 장교의 표정은 더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장거리 포격이 가능한 대형 포를 배치하려면 천상 성가퀴를 부수고 사각을 확보해야 한다.
게다가 좁은 성벽길을 연장하고, 이 배후지는 포격의 반동을 견딜 만큼 견고해야만 했다.
···게다가 방어력 저하를 감수하고 이런 성벽 공사를 진행할 기능공을 지금은 고립된 성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폴름스는 제국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엘랑키아의 공격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하.”
“폴름스의 성벽은 그 일부조차도, 한 번도 적대하는 자들에게 내준 적 없는 성역. 엘랑크의 무도한 침략자들 역시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네프셀시엔은 선언하듯 말했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역사는, 선제후들을 비롯한 유력한 영주들이 투쟁해온 역사이다.
그래서 적, 주로 경쟁 선제후가 보낸 군대가 폴름스 성문 앞에 이른 예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성벽에서 보이는 위치까지 적군이 행군해왔다’에 가깝지, 실질적으로 공격을 당한 적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선제후들 사이의 주도권을 다투는 전쟁은 대체로 그런 법이기 때문이다.
선제후들 사이의 내전은 상대를 멸망시키고, 영토와 권리를 탈취하는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다.
신성 그룬발트 제구의 황제 선출 구조상 성립될 수 없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고대 아란 제국 멸망 후 초유의 만행을 저지른 자는 다른 모든 선제후들의 공적이 될 테니까.
때문에 이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의 방위태세가 실제로 위협받은 적은 없었다.
실제로 위협이 없었다는 것은, 별다른 개선이 없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주민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비밀스러운 요새도 아니니, 구조를 알고자 한다면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혈족이 지혜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토굴에서 벌레처럼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거늘··· 은혜도 모르는 야만족···.”
네프셀시엔이 엘랑키아 군에 강한 증오를 드러낼 때 마다, 수행중인 수비군 장교는 물론이고 호위병들도 깜짝 놀라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이 아름답지만 무서운 엘프 여군주가 말하는 야만족에 자신들도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엘랑크의 권속들이 감히 폴름스의 성벽을 넘보지 못하게 하라! 저들이 감히 두 눈으로 세계수를 볼 수 있게 한 것도 충분히 치욕적이니!”
“아, 알겠습니다, 선제후 전하!”
마지막 말을 남긴 네프셀시엔은 몸을 훽 돌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간다.
수비군 장교는 서둘러 그 뒤를 따른다. 주군이 지나간 자리에 남긴 은은한 향기에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이를 즐길 틈도 없었다.
오늘 주군에게 받은 지시를 수비군 사령부에 어떻게 전달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눈 앞이 캄캄해졌다.
구시대적인 성벽을 개량하고 포좌를 신설하자는 의견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폴름스 선제후령의 정책은 한결 같았다. 같은 재원이라면, 복수를 위한 군사력이 우선이었다.
무도한 엘랑키아 왕국에게 점령당한 영토의 탈환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랄렌 강 너머의 팔츠부르크 요새를 탈환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 메이플링겐 공작령을 재건한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기에, 대부분의 재원은 군을 재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신성한 폴름스가 직접 공격당한다는 생각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공격당한다고 한들, 누가 이 위대한 도시가 함락당한다고 생각하겠는가.
지원을 약속한 여섯 선제후와의 밀약 덕분에 아직 폴름스의 핵심 전력은 전투에 발도 담그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다 다른 선제후들이 비용을 지불해 보내준 용병대 역시 협력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전력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반격이 불가능하다 뿐이지, 공격당한다 해도 폴름스가 함락당한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정말로 하지는 않았다.
“지원군, 디오보르크 공작으로 부터의 연락은 아직 없느냐?”
“아직 없습니다, 선제후 전하.”
“...굼뱅이와 같은 자를 다음 황제로 옹립하고 섬겨야 하다니···.”
역시나 네프셀시엔의 혐오와 경멸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룬발트의 인간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지지하지도 않는 황제 후보자를 억지로 차기 황제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니.
분명 화는 나지만, 그 치욕만 참으면 전에 없는 그룬발트 제국의 대군이 몰려와 성 밖의 적을 쓸어버리리라.
저주받아 마땅한 엘랑크의 야만족들을 지옥에 떨굴 수 있다면, 이 정도 치욕은 감수할 수 있었다.
막 망루에서 내려온 네프셀시엔을 누군가가 부른다.
“선제후 전하, 외부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사절? 디오보르크 공작이 보낸 것인가?”
“아닙니다, 전하. 서문에 엘랑키아 인들이 보낸 사절이 백기를 들고 ‘교섭’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엘랑키아···.”
그 단어를 들은 네프셀시엔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그 야만족들이 감히 교섭을? 무엇에 대한 교섭인가?”
“그게··· 포로 석방에 대한 교섭이라고 합니다, 전하.”
네프셀시엔은 불안해하는 신하로부터 고풍스러운 두루마리를 건네 받았다.
‘폴름스의 통치자에게, 엘랑키아 왕국의 국왕 다고베르 드 팔라스’
표지에 쓰인 글을 보고 그녀의 하얀 이마에 푸르스름한 핏줄이 한 줄기 솟은 것은 당연했다. 봉인을 뜯어내듯 부수고 거칠게 두루마리를 펼친다.
###
원래 땅을 파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특히나 공성을 위한 참호 축성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적의 포격에서 완전히 엄폐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키 보다 깊어야 했으며, 크고 무거운 공성포와 각종 물자가 오가야 했으니 공간은 널찍하고 바닥은 평평해야 했다.
게다가 성벽 위의 적의 눈을 가능한 피하는 것이 좋았기에, 파낸 흙을 주변에 방치하는 것이 아닌, 아군의 후방까지 옮겨야 했으므로 시간은 배로 들었다.
이 모든 작업을 철저한 계산 아래 진행해야 한다.
작업자들 실수로 진행 중 각도가 틀어지거나, 적의 포좌 위치를 예상하지 못하거나 하면 자칫 지그재그로 파 들어가던 참호를 통째로 버려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엘랑키아 군의 공병이 주축이 된 참호반은 능숙하고도 빠르게 사방에서 참호를 파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최근 나우데사를 탈출한 이후 얼떨결에 엘랑키아 공병대에 합류한 야로스 발렌켄드라는 남자의 모습도 보였다.
“자네 일을 꽤 잘 하는 군. 전에 공성전에 참여한 적이 있나?”
“그게··· 어쩌다보니 몇 번 있습니다.”
흙투성이가 된 야로스의 대답에, 공병 장교가 역시나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슈토르히 용병단 소속이던 시절에야, 공성 참호가 아니더라도 야전에서도 포대 건설을 위해 삽질한 경험이 많았다.
그리고 나우데사에서도, 팔자에도 없는 연대장이 되기 전에 주테르베이크 중대들을 지휘하던 시절 공성 참호를 파기도 했었지.
···얼간이같은 적 덕분에 참호는 아무 소용도 없었고, 하루만에 요새가 함락되긴 했었지만.
“그보다 자네는 누굴 만나러 왔다지 않나? 듣자하니 다른 지방군의 지휘관 부하였다면서?”
“예, 그렇기는 한데요··· 뭐 급한 일은 없습니다.”
“미안하네, 지금 공병감님이 바쁘셔서 우리도 전혀 얼굴을 뵙지 못하는 상황이니. 좀 더 여유가 생기면 자네가 찾는 사람에 대해서 여쭤보도록 하겠네.”
“에구,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 잘하는 나우데사 출신 청년’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고 있는 야로스는 지금도 불편한 것은 없었다.
랄렌 강 다리에서 차출되어 급히 로델베르크로 이동했지만, 이미 성은 함락된 이후였다.
자신들이 성벽을 무너뜨리고 성문을 돌파하는 데 얼마나 활약했는지에 대한 공병들의 자랑만 실컷 들었었다.
자신은 급한 김에 슈토르히 시절의 옛 상관을 만나겠다 말은 했었는데··· 만나서 뭘 하겠다는 건지 결정한 것도 아니었고.
···최악의 경우, 인연 끊긴 인간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벌써 몇 년이나 지냈는데, 만난다고 한들 서로 얼굴이나 알아볼 수 있을까?
심지어 자신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일개 하급 장교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텐데.
차라리 어영부영 여기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삽질이나 하면서 푼돈이라도 모으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마저도 하는 야로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