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 로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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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정말로 장관이군.”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드 팔라스 2세는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타국 출신들이 그룬발트를 처음으로 방문하여 세계수를 보면 처음으로 떠올리는 반응이다.
너무도 거대한 나무.
하늘에라도 닿을 듯 뻗은 나무의 모습은 순수하게 놀라운 광경이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쌓인 ‘상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광경이 분명했다.
많은 이들이 여기서 불가해한 경외의 존재를 떠올리며, 세계수를 숭배하는 신앙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것도 당연하겠다.
심지어, 그 보수적인 주신교단에서조차 그룬발트의 세계수들을 주신의 손길의 결과로 인정했으며, 천사에 준하는 신성의 흔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허용했겠는가.
“역시 책으로만 보던 것과 실제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다르군···.”
“대단한 광경입니다. 고향의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네요.”
주변 측근들 사이에서도 어떤 분위기가 드는지는, 굳이 그들이 수근대는 대화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장 충실한 근위대의 기사들조차 세계수에 눈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경외가 떠오르는 태고의 신비.
고대 아란 제국 시대, 제국을 침공했던 야만족의 군주가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세계수 본목을 보고 무기를 버린 전설이 남아있다.
자기 앞을 가로막는 아란 제국 군단을 연거푸 쳐부수며, 황제의 해골에 술을 담아 마시겠다며 제국을 공포로 몰아 넣었던 기마 민족의 군주조차 무릎을 꿇린 경외의 광경.
결국 무기를 버리고 제국의 신하를 자청한 야만족에 대한 이야기는, 아란 제국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과장된 일화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세계수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세계수를 직접 눈으로 본 최초의 엘랑키아 군주가 분명한, 다고베르 2세의 마음 속에서도 그런 경외심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종의 신성성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굴복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도시 한가운데 유난히 거대한 나무가 있어서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그 나무가 줄기를 움직여 도시라도 보호해 주지 않는 한, 혹은 나무로 된 병정들이라도 보내 돕지 않는 한.
그저 아무 의미도 없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오히려 전투에서 패해 상실하게 되었을 때 원래 주인의 좌절감을 크게 하고, 정복자를 빛내 줄 트로피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룬발트의 세계수를 빼앗든, 불태우든.
어느 쪽도 고대 아란 제국 이후 처음, 최초의 엘랑키아 군주가 되는 것이다.
경외감 대신 다고베르 2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이러한 야심이었다.
“이곳을 본영으로 삼는다! 한시간 후, 폴름스 공격을 위한 회의를 진행할 테니, 제경들은 준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폐하.”
이곳까지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와서 직접 맨 눈으로 폴름스를 보았다는 것은, 왕실군의 주력이 도착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2만을 훌쩍 넘는 엘랑키아 본대가 마치 그룬발트의 초원으로 옮겨 붙는 불길처럼, 멈추지 않고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들 또한 세계수의 경이로운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손도 발도 멈추지는 않는다.
조만간 그들의 칼 끝이 폴름스와, 그 연리목 세계수에 닿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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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보고를 마칩니다.”
엘랑키아 원정군의 선봉을 맡은 디타레 드 카울이 보고를 마치고 국왕에게 고개를 깊게 숙인다.
디타레가 이끄는 선봉대는 벌써 일주일 이상 폴름스 주변에 머물며 적정을 살피고 적을 견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국 확인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폴름스에 입성한 적의 숫자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오, 디타레 경은 충분히 잘 해 주었으니 마음 쓰지 마시오.”
포로와 피난민, 어리석게 마을에 남아 있던 하급 관리들까지 신문했지만 정확한 정보 획득에는 결국 실패했다.
침략군에 반발하는 그룬발트의 신민들이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을 가능성도 높았고, 위협하거나 뇌물을 주어 구슬러 본들, 정확한 정보라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결국 폴름스에 머무는 적의 숫자는 2만에서 4만 정도로, 두루뭉실하게 추측하는 수 밖에 없었다.
폴름스의 선제후가 단기간에 소집할 수 있는 예상 병력과, 엘랑키아 군의 도착 전에 입성했을 가능성이 있는 지원군을 계산한 결과였다.
다만 2만에서 4만이라는 숫자는 편차가 너무 커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
다만 ‘폴름스의 성벽을 지킬 숫자는 충분하다’ 정도는 확실하다고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역으로···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두고 주력을 빼서 도착할 지원군과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합리적인 의문이다.
전략적으로는 오히려 그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자칫, 너무 많은 병력이 닫힌 요새에 주둔했다가 포위가 풀릴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성벽 너머만 바라보다 항복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요새 성문은 공격군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역할에 충실하는 대신, 방어군이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성을 지키는 병력이 충분하다면 여분의 병력은 미리미리 성 밖에 배치하여 수비군과 호응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좋은 전술이다.
하지만 국왕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참모, 지휘관들은 고개를 저으며 그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룬발트의 선제후가 세계수가 있는 도시를 위태롭게 하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요. 그룬발트 인들에게, 세계수는 주신에게서 직접 부여받은 전통과 권위의 상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룬발트의 선제후라면, 세계수가 있는 본성을 위험에 처할 선택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번 출병 전부터 사령부에서 당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점이었다.
“하지만 가능성 자체는 항상 염두에 두도록 합시다. 실제로 적이 이렇게 할 것이라 단정짓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니.”
“알겠습니다, 폐하.”
물론 다고베르 2세 역시, 그룬발트의 선제후가 폴름스를 포기하거나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장에서 ‘반드시’란 것은 없는 법이며, 그렇게 발생한 생각의 ‘사각지대’는 역사상 많은 군주와 사령관을 몰락으로 이끌었었다.
자신은 엘랑키아의 왕도 베르마유를 포기할 수 있는가?
다고베르 2세는 스스로 입장을 바꿔 자문해본다.
답은 ‘그렇다’ 였다.
베르마유는 유서 깊은 왕국의 수도이며, 왕실 입장에서도 역사와 전통, 거기에 재산까지 집중된 소중한 도시가 분명하다.
허나 ‘가치’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
만약 엘랑키아를 위협하는 적국의 대군과 함께 불태울 수 있다면 왕도조차 불사를 수 있겠나? 라는 질문이라면···.
그렇다, 가 다고베르 2세의 대답이었다.
당연히 이는 정치적으로 후폭풍을 몰고 올 것이며, 유서깊은 왕도를 적에게 내준 못난 군주라는 꼬리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왕도가 가진 역사와 전통의 가치는 각별하다.
그룬발트 선제후령의 경우는, 거기에 세계수라는 너무도 명백한 상징물이 있으니 좀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하늘까지 치솟은 고대 아란 제국의 세계수 본목은 제국이 몰락할 때 그것이 굽어 보던 도시와 함께, 흔적도 없이 불타버렸다.
세계수를 잃는 것은 제국을, 정통성을 잃는 것과 동등하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의 사령관이 남달리 냉철하고 계산이 빠른 인물이라면, 세계수를 잃는 대신 제국을 지키는 선택을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으로 세계수를 점령한 대신, 소중한 원정군을 잃는다?
이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가정이다.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설령 세계수를 불태워 그룬발트에는 씻지 못할 패배감과 거대한 잿더미만을 남겨 줄지라도, 이는 엘랑키아에 아무 의미가 없으리라.
전략과 전술의 기본은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
그러니 다고베르 2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
만약 이번 원정에서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이런 원정군을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 최소한 이번 세대에서는 말이다.
“그럼 우선은 폴름스를 둘러치는 포위망을 건설할 준비를 하겠습니다.”
국왕 직속의 공병 책임자이자, 국왕의 사촌 동생인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 말했다.
물론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공병들만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랄렌 강에 다리를 놓은 데서 알 수 있듯 전투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토목공사는 에티엔 공작이 총괄하도록 되어 있었다.
“폴름스가 정말 크긴 크더구려. 물자 수급은 큰 문제가 없겠소? 거의 숲 하나 정도는 갈아서 넣어야 할 것 같은 모양새였소.”
“저도 지도로는 보았지만 실물을 보고 놀랐습니다.”
“다행히 그룬발트에는 숲이 많아서, 목재를 수급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당장 내일부터라도 물자를 조달하도록 하지요. 저희도 돕겠습니다.”
협력적인 분위기에서 모두가 한마디씩 한다.
탁자 한 가운데에는, 오늘을 위해 미리 엘랑키아에서 준비해 온 폴름스와 주변 지형이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국왕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의견은 감사하오, 훌륭한 공병감 에티엔 공작과 여러분. 허나 공사를 위한 물자 수급은 예정대로 하되, 포위망 건설은 잠시 기다려 주시오.”
그 말에, 모두가 국왕의 얼굴을 바라본다.
대부분 놀란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원정의 ‘최종 목표’는 대외적으로는 폴름스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랄렌 강 너머의 영토를 확보하고 나우데사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하게 한다는 실질 목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 실질 목표를 이루려면 폴름스의 선제후를 압박하고, 최종적으로 조약을 통해 영토를 할양 받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압박 수단으로 폴름스 본성에 대한 포위 공격보다 더 나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너희가 원하는 변경의 영토를 줄 테니, 포위를 풀고 물러가 달라.’
폴름스의 선제후 입에서 이 말이 나오도록 하는 게 엘랑키아 원정군의 최종 목표가 아니냐는 말이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심은··· 결전의 장소를 이곳 폴름스 말고 다른 곳으로 고려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럴 수 있다 생각하고 있소이다.”
“설마··· 폴름스를 두고 더 안쪽, 그룬발트 제국의 핵심부로 진격하실 생각도 있으십니까?”
“음··· 그 또한 그렇소이다.”
그 대답에 천막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물론 모두가 결국은 그룬발트 제국의 주력군과 결전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 짓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폴름스와 같은 대도시를 힘 만으로 함락하려면 대체 몇 년이 걸릴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사방에서 완전히 포위한다고 한들,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전쟁은 그 전에 협상을 통해 끝나게 되리라 예상하는 것이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엘랑키아의 힘은 강고한 기사단의 활약에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적절한 결전의 장소를 찾아 적의 대군을 기다리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적이 우리 예상대로 움직여 줄지···.”
한 번의 결전으로 길어질 수 있는 전쟁을 끝낸다.
이는 고향을 떠나 머나먼 적지에서 싸워야 하는 원정군 입장에서 너무 달콤한 유혹이다.
또한, 수많은 정복자들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독이 든 성배이기도 하다.
엘랑키아 왕실군의 장교들은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지 몰라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고,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이를 천천히 듣고만 있었다.
“여러분의 말은 모두 옳소. 허나 적이 예상대로만 움직여 주지는 않는 법, 그러니 마지막으로 한 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다고베르 2세가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신중론을 말한다.
“후위대가 도착하는 것은 언제요?”
“사흘 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럼 전령을 보내 사령관급을 모두 소집하시오. 본인이 아니면 대리인이라도 참여하도록 말이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공성 준비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오. 특히 공병감 에티엔 공작은 물자 수급을 지휘하는 한편, 완벽한 포위망을 설계해두도록 하고.”
“물론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마지막 결전 준비를 앞두고 갑자기 불안해진 것인지, 혹은 의견을 묻고 싶은 상대가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