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 로델베르크
“이건··· 그룬발트나 주디칼리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 바르키셰? 후베나우?”
대체로 엘랑키아의 군사력은 일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봉건 제도 하의 군사 귀족 영지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서부군이나 그랑다투아 군 등, 지방 군사력의 핵심을 이루는 ‘군사령부’를 구성하는 전력도 일부 상비군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주변 지역의 귀족군을 핵심으로 한다.
이건 생뢰르반 군 역시 마찬가지다. 사령관이자 가장 많은 병력을 제공하는 드 레뮤즈 영지군만 봐도 그렇고.
일부 상비군 조차도, 갑자기 생겨난 외부 세력이 아닌, 황금이나 토지를 대가로 군인 커리어를 선택한 하급 귀족이나 자유민이 대부분이다.
복무 형태나 기간이 남들과 다를 뿐이지, 기본적으로 제도권 내 전력이라는 말이다.
뭐 금전적 보상을 받고 군사력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이런 상비군과 용병은 종이 한 장 차이지만, 최소한 엘랑키아에서는 확실하게 구분이 된다.
이런 점만 살펴 봐도, 아마도 엘랑키아 왕국은 대륙 전체에서 용병을 가장 안 쓰는 나라일 것이다.
쓴다고 해도 경기병이나 포병 등 필요한 전력의 일부를 외부에서 보강한다는 느낌일까?
그것도 필요한 ‘인력’을 수급해서 활용한다는 것이지, 아예 용병단을 상대로 계약해서 역할을 위임하는 형태는 아닌 경우가 많았다.
이는 스스로 무장한 통치자로서 자부심이 높은 군사 귀족들이 핵심 전력인 엘랑키아 기사단을 편성한다는 특성 때문일 수도 있겠고···.
대영주들의 영토가 큼직큼직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 구조가 잘 동작해 대군을 모으기 쉬운 구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여기서 예외라면 군 복무를 위한 작위가 따로 있을 정도인, 국왕 직할의 왕실군과 블랑독의 트랑카벨 영지군 정도가 아닐까?
왕실군이야 중앙이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다소 편법적인 수단을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트랑카벨 가문이야, 갑작스럽게 군사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택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특수성이고.
주로 내가 한 일이긴 하지만, 애향심과 열의가 높은 블랑독 청년들을 빠르게 전력화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거기 별도로 지빌링엔이나 네그라타, 슈토르히와 같은 용병대도 자연스럽게 추가되었고 말이다.
그런데··· 제브레도뉴 공작이 이끄는 영지군의 편성이 심상치 않다.
이건 아무리 봐도 용병 연대로 보이는데··· 그룬발트와 인접한 공작령이다 보니 용병을 고용하게 된 것일까?
“아··· 콘도티에레? 그거 저 알아요오!”
“그래? 첼레스티나는 이 부대들에 대해서 들어봤어?”
“네에, 그 용병 연대들은 제브레도뉴 공작령의 영지군 소속이 맞아요! 그래서 이번 원정군에도 따라 왔을 거예요.”
“아하, 그렇다는 말이지? 엘랑키아의 공작님들 중에서도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네에에··· 그게 조금 달라요, 콘도티에레! 제브레도뉴의 공작이 용병을 고용한 것은 아니라고 해요오.”
나는 첼레스티나의 말에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제브레도뉴 공작 휘하의 ‘엘랑키아스럽지 않은 연대’들이 용병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제브레도뉴 공작이 고용한 용병은 아니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제브레도뉴 공작가는 용병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용병을 양성하는 가문이라고 해요.”
“어? 엘랑키아의 공작 가문이 용병을 양성한다고?”
“네에, 맞아요, 콘도티에레.”
내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전력이 부족한 만큼을 용병으로 채우는 것이 당연한 그룬발트나, 사실상 용병만으로 전쟁하는 경우가 많은 주디칼리라면 흔한 일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귀족이 직접 용병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들은 평소에는 일반적인 용병단으로 활동하며 돈을 벌어오다가, 고용주인 귀족이 전쟁에 휘말리면 직할 병력으로 참전하기도 한다.
어떤 영주의 경우는, 영주가 직접 휘하 전력을 이끌고 용병업에 뛰어 드는 경우도 있다.
영지군 자체가 영주를 단장으로 하는 용병단이 되어서 용병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군사력이 필요한 고용주를 찾아 계약을 맺고 군사력을 제공하며, 전쟁이 끝나거나 계약이 해지되면 용병료를 받아 고향 영지로 돌아온다.
법황이 보낸 성전군의 일부로 마르사코르 전투에 참전했던 안프로니오 대공인가 하던 귀족이 이끌던 연대가 전형적인 영주가 단장인 용병단이었었지.
생각해보면 척박한 고향에 돈을 보내기 위해 용병을 결성한 지빌링엔 연대 역시 작은 규모지만 그런 구조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트랑카벨 가문이 고용하고 있는 네그라타 용병단의 단장 미카토는 알코라즈의 남작이긴 하지만 조금 다른 케이스겠지.
그럼 제브레도뉴 공작가도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제브레도뉴 공작령에는 그룬발트 출신이 많이 산대요. 아쥬흐 양이 알려주셨어요.”
“아쥬흐 양이? 그걸 왜 첼레스티나에게 알려줬어?”
“네에··· 그거야 콘도티에레께서 바쁘셔서 카르카냑에는 통 들르시지 않으셨으니까요오··· 정말 너무하셔요!”
“앗··· 내가 그랬구나···.”
“아쥬흐 양은 나름 걱정이 되셔서 정보를 모으셨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저한테 많이 해주셨어요··· 그 중에는 엘랑키아의 높으신 분들에 대한 것도 있었구요.”
“...나중에 고맙다고 해야겠네.”
첼레스티나가 나 대신 아쥬흐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제브레도뉴 공작령은 엘랑키아와 그룬발트 사이에 있다.
라솔과의 경계처럼 이스키비르 강이 명확하게 자연 국경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사실 경계 자체가 애매모호했을 것이다.
결혼과 상속으로 인해 많이 뒤섞이기도 했을 것이고, 원래 홍수라도 한 번 나면 토지 경계가 애매해지는 일도 흔히 일어난다.
하지만 충격적인 것은, 제브레도뉴 공작가 자체가 원래는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황제를 섬기던 가문이라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 약 200여년 전, 어떤 이유로 주군인 그룬발트의 황제를 배신하고 엘랑키아의 국왕에게 대신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다.
이는 그룬발트 제국 입장에서는 명백한 반역이자 배신이었으며, 결국 전쟁에서 패배에 이르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반대로 크게 기뻐한 엘랑키아 왕실에서는 공작위를 내려주었으며, 귀순할 때 가지고 온 영토에 국경지대의 넓은 영토를 더해 국경을 수비하게 했다.
이게 대 그룬발트 전선에서 팔스부르의 그랑다투아 군과 함께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제브레도뉴 공작령이 형성되게 된 전말인 모양이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배신자라는 인식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그랬겠지. 고생이 많았겠네, 제브레도뉴 가문은.”
원래 한 번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으면, 배신당한 쪽에서야 격렬한 증오를 받겠지만 이제 같은 편이 된 상대방에게도 경멸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전통있는 순혈 귀족이라는 자부심이 유별난 편인 엘랑키아니까··· 아무리 왕실을 위해 큰 공을 세운 공작가라고 해도 인식이 좋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결국 제브레도뉴 가문은 그룬발트와의 최전선에서 싸워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다른 엘랑키아 귀족들에게 병력을 협력받기도 쉽지 않았고, 심지어는 일부 봉신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확실히··· 선대 사령관인 아버지로부터 강력한 기반을 물려 받은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나, 좋든 싫든 남부 귀족의 필두 자리를 강요받고 있는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겠지.
결국, 이 ‘그룬발트 출신의 엘랑키아 공작’은 영지군의 일부를 용병으로 편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브레도뉴 공작 휘하의 용병대는 그룬발트의 영주에게는 고용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모양이구요.”
“그렇겠지··· 그룬발트가 실질적인 위협이니까.”
“네에, 그래서 주 활동처는 주디칼리라는 모양이에요. 슈토르히와도 전장에서 마주치거나 함께했을지도 몰라요.”
“그래. 그래서 바르키셰나 후베나우같은 이름들이 익숙했던 것 같네. 아니, 바르키슈나 우베노라고 해야 하나?”
“네에··· 아쥬흐 양도 제브레도뉴 공작령 출신 상인들은 엘랑키아와 그룬발트 발음을 섞어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다. 엘랑키아에 온지 꽤 지났는데도, 사실상 블랑독과 드 레뮤즈 백작령 말고는 별 관심도 없었으니.
“그런데 그 제브레도뉴 공작의 군대가 북쪽에 별동대로 파견되어서는 약탈을 해서 구설수가 조금 있었나봐요, 콘도티에레.”
“나도 비슷한 소문은 들은 것 같은데···. 이번 원정 중에는 국왕 폐하의 명으로 약탈이 금지되지 않았던가?”
“네에, 합병해야 하는 랄렌 강 유역과 폴름스 선제후령에 대한 금지라서··· 제브레도뉴 군이 약탈한 건 그 바깥, 더 북쪽의 그룬발트 영토라는 모양이네요.”
“허어···.”
용병으로서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습관처럼 약탈을 한 것인지, ‘현재 동료에게 인정받기 위해 예전 동료에게 가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나 약간 껄끄러운 아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만 그런 점을 제외한다면, 이번 원정군 전체에서 왕실군을 제외하면 보병으로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력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라솔과의 전쟁에서도 많이 느꼈지만··· 엘랑키아의 평균적인 보병 전력은 다소 아쉬운 점이 있는 편이니까.
그러니 주디칼리에서 용병 활동으로 잔뼈가 굵은 보병 연대라면, 전투력은 신뢰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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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상태는 좀 어떤가요, 리타르몽 경?”
“아주 좋습니다, 군의관님. 몸도 가뿐하고, 기침도 전보다 줄었습니다. 전부 군의관님 덕분입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의 작전 참모 리타르몽 드 당세르는, 원정군 수석 군의관 알체스테 델 나르코에게 평소처럼 진찰을 받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은 밝고 긍정적이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만 이는 항시 음울한 표정을 기본으로 하는 리타르몽과, 군의관 생활을 시작한 이후 좀처럼 웃지 않는 알체스테 두 개인의 특성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결단코 아니다.
리타르몽은 환자로서 군의관을 신뢰하고 있었고, 알체스테는 군의관으로서 성심성의껏 환자를 돌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두 사람의 모습을 타인이 보았다면 심각한 오해를 했을 수도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표정은 딱딱했지만 말이다.
“몸 상태가 좋아지셨다고요? 기침도 줄고?”
“예, 군의관님.”
“흐음···.”
알체스테는 관 형태의 청진기를 리타르몽의 몸 이곳저곳에 대고 소리를 들어본다. 가슴으로, 또 등으로.
“음, 리타르몽 참모.”
“예.”
“왜 거짓말을 하시죠? 군의관이 같잖아 보입니까?”
알체스테의 여상스러운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거친 언사에, 가뜩이나 창백한 리타르몽의 얼굴 색이 시퍼렇게 변한다.
“제가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한다고 그랬죠?”
“...수레에 실어 블랑독으로 돌려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 하지만 들어보세요 군의관님. 저는···.”
“의사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환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죠.”
“네....”
“하나는 의사를 사기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고요.”
신랄하게 말을 끊는 알체스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고, 리타르몽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환자가 자신의 병증이 악화되고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입니다.”
“....”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못하는 리타르몽의 표정만 보아도 답은 명확했다.
“기침이 심해지고, 평소보다 숨이 차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까?”
“저녁에 기침이 조금 심한 편이지만, 숨이 평소보다 더 차지는 않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흐음···.”
“그리고 몸이 가뿐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매일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군의관님.”
“...혈류가 좋지 않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알체스테 군의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 정직하지 않은 환자를 노려본다. 리타르몽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원래라면, 이 사람은 지금 전장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참모는 남들보다 오랜 시간 깨어 있어야 하고, 책임도 막중하다.
게다가 전황이 격화되면, 갈수록 격무는 심해지면 심해졌지 개선되지는 않으리라.
의사라면··· 즉시 보직해임을 건의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하지만 하는 일은 달라도 군문의 동료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자기가 옆에서 챙기겠다며, 조건부로 출전을 허락하고 고용주이자 선배인 아쥬흐 트랑카벨에게 보고한 것도 자신이 아니던가.
“후우···.”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자신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잘 들어요, 리타르몽 경. 앞으로 절대로 거짓말은 용납 못합니다. 다시 거짓말을 한다면 곧바로 콘도티에레에게 보고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을 충분히 자야 합니다. 몸이 평소보다 안 좋아졌다, 아니 평소와 좀 다르다는 생각만 들어도 즉시 말해주세요. 지금은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러겠습니다!”
대답만은 잘 한다. 하지만 중요하고 바쁜 참모인 리타르몽은 또 무리를 할 것이고, 또 자신의 병증을 숨기려 들겠지.
“일단 필요한 약재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군의관님.”
그걸 어떻게든 지탱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다, 알체스테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