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 로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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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기사는 같은 수로는 상대하기 어렵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군에 공포증처럼 퍼져있는 이 명제는,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지우기 어려운 것이었다.
“기습! 기습이다!”
“우측방! 기습!”
폴름스 선제후령의 거점인 ‘연리목 세계수의 도시’ 폴름스 북방에서 벌어진 기병전은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양측 정찰 기병대 사이의 수백 명 단위 교전, 대군의 전초전으로 흔한 것이고, 딱히 어느 쪽이 이긴다고 전략 전술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의 기세를 과시하며, 상대방의 정찰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
다만 가벼운 경장 기병대 끼리의 교전은 결정적 승부가 잘 나지 않는다. 서로가 기동성을 가지고 있으니 전진도 후퇴도 자유롭다는 점도 있을 테고···.
애초에 숫자 차이가 극단적으로 나지 않는 한 뻔한 전투력 사이의 교전에서 우위를 보이기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고.
하지만 이번 교전에서는 조금 다른 결과가 발생했다.
“대장? 대장! 대장이 죽었다!”
“대장이 죽었어!”
서로 거리를 두고 견제하듯 벌어지는 소규모 접전이 이어지다가, 엘랑키아 측이 못 이긴 척 물러섰다.
수적으로 두 배 가까이 우세했던 그룬발트 기병대가 적극적으로 추격해왔다.
허나 어떤 숲을 낀 작은 마을 부근에 도착했을 때, 마을에서 엘랑키아 기병들이 뛰쳐나왔다.
지극히 상식적인, 기병대 사이의 접전에서 활용되는 기만전술이었다.
게다가 매복했던 엘랑키아 기병은 다소 무장이 잘 된 중기병이라고는 하나, 그 숫자는 수십 기 정도로 그룬발트 기병대가 대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첫 기습 돌격에서 그룬발트 기병대의 지휘관이 사망했다.
평소대로라면 서열에 따라 다른 지휘관이 자연스럽게 지휘를 이어가야 했을 것이나···.
그 순간, 그룬발트 기병대의 뇌리에 불현듯 떠오른 것은 ‘엘랑키아 기사는 같은 수로는 상대하기 어렵다’라는 공포였다.
“후퇴! 성으로 돌아가!”
“도망쳐! 도망쳐!”
“으아아아아아!”
여전히 수적으로 우세하고 추격 중이라는 기세도 충분한 상황이었으나, 전투는 삽시간에 일방적인 추격으로 바뀌어 버렸다.
“도망쳐! 도망쳐어!”
탕! 타탕! 탕!
“끄아악!”
“폴름스로 돌아간다!”
“허억!”
탕, 탕··· 탕탕!
어지러이 수백 미터 정도 이어진 추격전에서 꼬리 잘리듯 붙잡혀 죽은 그룬발트 기병의 수는 백 명이 넘었다.
그때까지의 교전에서 잃은 숫자의 다섯 배에 이르는 참혹한 패배였다.
“추격 중지!”
“추격 중지이!”
“멈춰! 모두 멈춰!”
엘랑키아 기병대를 지휘하던 디타레 드 카울은 추격을 멈추게 했다.
적이 너무 어이없이 무너져서 도망치고 있어서, 혹시라도 함정에 빠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설마 백 명 이상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며 ‘진심으로 패배하는 연기’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백 명 정도 추가로 적을 사살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는 없었다.
이 정도면 됐다. 한 번 이런 공포를 경험한 그룬발트 기병대는 한동안 움직임이 위축 당할 것이니까.
디타레 드 카울은 지금 2500명 정도의 선봉대를 이끌고 홀로 적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아직 얼마 전 함락한 로델베르크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주력군보다 한 발 앞서 적지를 정찰하고, 또한 적의 정찰 시도를 적발하여 정보를 제한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다.
즉, 아군 전체의 눈이 되어 적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는 한편, 적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야만 한다.
전투나 습격이 딱히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적에게 피해를 입혀서 얻는 것 보다, 실수로라도 큰 타격을 입었을 때 정찰이 위축되어 얻는 손해가 더 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름스에 접근한 이후로 모두 여섯 번의 크고 작은 교전이 벌어졌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싸운 경우는 없었다.
“그룬발트 놈들은 성에서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약을 이렇게 올리는데도 주력은 꽁꽁 싸매고 있군.”
방금 적을 추격하고 돌아온 부장의 말대로였다.
그래서 지휘관급 포로를 잡아 정보를 캐내보려는 생각으로 적을 도발했던 것인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한동안 얻은 정보는, ‘적은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가 고작이었다.
“그나저나 저 커다란 나무는 정말 장관입니다.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생각보다 몇 배는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적어도 그룬발트에서 전쟁을 할 때는 길을 잃는 일은 없겠군.”
거대한 가지를 도시 위로 드리운 연리목의 세계수는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처음 그룬발트의 세계수를 본 외지인은, 심각한 원근감 혼란에 시달리게 된다.
머리속에 있는 나무 크기에 대한 상식과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가도 가도 가까워지지 않는 세계수 때문에 어지러움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정도 도시 부근에 도착하면, 대부분 떠올리는 생각이 있다.
“...저거 가지를 꺾어서 엘랑키아로 돌아가 심을 수는 없을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룬발트 녀석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었나 봅니다. 세계수가 자라려면 어떤 조건이 있는지는 몰라도 옮겨 심는다고 자라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허어··· 아쉽구만.”
고대 아란 제국 시절, 주디칼리에 있었다던 세계수 본목은 지금은 완전히 불에 타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현재 그룬발트의 세계수들은 ‘묘목’ 수준이라고 하니, 지금은 그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대체 얼마나 컸을까? 바다 건너 엘랑키아 남해안 쪽에서도 보이지 않았을까?
“폐하께 보고를 드리도록 하자.”
“옛, 뭐라고 보낼까요?”
“로델베르크에서 폴름스까지 위험 없음, 이라고 보내게.”
“아하, 알겠습니다 대장. 지금 폐하께서 가장 듣고 싶어하실 보고겠군요.”
디타레 드 카울 역시 거기에 동의했다.
현재 엘랑키아 주력군이 오랫동안 로델베르크에 묶여있는 것은 분산된 별동대와 후속 병력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들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냥 다고베르 2세 폐하가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낫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왕실군은 그룬발트가 예상하지 못한 속도와 기세로 진격을 시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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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음···.”
“뭔가 잘 안되시나요오, 콘도티에레?”
“아아, 그냥 고민을 좀 하고 있었어, 첼레스티나.”
나는 첼레스티나가 가져다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 앞에는 지도와 뭔가를 끄적이던 종이가 몇 장 놓여있었다.
로델베르크에 도착한 날, 국왕 다고베르 2세와 나누었던 문답은 내 정신을 완전히 방전시켰었다.
이제는 ‘구체적인 이길 방법’을 만들어야 할 때였다.
아, 물론 국왕이 갑자기 ‘이길 방법을 강구해 오시오’ 라고 못되게 굴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좋든 싫든 이틀 후의 작전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무언가 준비해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무사히 살아서 돌아가려면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게다가 무언가 바라는 듯한 부담스러운 표정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대신 필요한 모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은 소득이라고 해야 할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트랑카벨의 에트 경! 폐하의 사령부에서 전투 서열 문서 사본을 빌려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뤼브르 경.”
“아닙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십시오! 아, 이 문서들은 사본이기는 해도 나중에 사령부에 반납해야 하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조심해서 관리하겠습니다.”
뤼브르 드 루블랭 경은 공식적으로 이번 원정 기간 동안 우리 생뢰르반 군에 파견온 연락장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늦게 가진 막내 아들이라고 한다. 다른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서 군인과 관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하던가.
아무튼 국왕 폐하를 제외하고, 현재 엘랑키아 왕실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프레니히 백작과, 그 아들인 뤼브르 경은 나에게 정말 잘 해주고 있었다.
나는 뤼브르 경이 빌려온 문서를 살피면서 내가 필요한 정보를 종이에 옮겨 적는다.
언제라도 파기할 수 있도록, 그리고 혹시라도 제3자가 보더라도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렵도록 피상적이고 기호화 된 방식으로 옮긴다.
문명화 된 국가가 동원한 대군이란, 그만큼 거대한 관료제의 뒷받침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봉건 사회의 군대란, 어느 공작이 몇천 명, 어느 백작이 몇백 명, 국왕의 직할령에서 몇천 명 하는 식으로 간단하게 편성된다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식으로 주먹구구로 운영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특히 규모가 작은 경우에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과 같은 대규모의 중앙군 동원은 경우가 다르다.
심지어 국외의 강대국인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치는 원정, 자칫 실수라도 하면 나라가 기울 정도의 거대한 역사이다.
병력은 최대한 많이 소집하고, 물자는 최대한 많이 모으고, 적당히 먹이고 적당히 쓰면서 이긴다.
따위의 주먹구구로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내가 보고있는 문서는 이번 원정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이끌고 있는 생뢰르반 파견대처럼 지방에서 소집된 병력들은 그다지 자세하지 않지만, 직접 동원한 왕실군에 대해서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었다.
앞으로 전투에서의 병력 편성과 배치도, 전쟁 내내 계속될 보급도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먼저 엘랑키아 왕실군, 즉 국왕 직속부대의 숫자는 총 3만 2천 명이다.
이들은 근검절약으로 유명한 다고베르 2세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왕의 수족, 왕실 근위군을 중심으로 한다.
거기에 엘랑키아 북부의 여러 가문에서 소집된 기사와 병사들이 추가된다.
사와르 강 유역으로 대표되는 엘랑키아 북부는 풍요롭고 인구도 많은, 말 그대로 왕국의 핵심부이다.
만약에 숫자를 늘리고자 했다면, 여기의 두 배 정도는 충분히 소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를 고르고 골라 뽑았다는 것이겠지.
블랑독의 이단을 토벌하겠다며 몰려 들었던 국왕의 성전군 역시 엘랑키아 북부에서 모여든 병력이었지만 그 질을 따진다면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것은 기병의 비율로··· 무려 이 중 삼 분의 일인 1만 기 정도가 기병이었다.
원래 엘랑키아가 기병 강국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정예만 모으고 조련한 진정한 ‘엘랑키아 기사단’이다. 전장에서 대체 어떤 모습을 보일지 두려움과 기대감이 함께 생긴다.
다음으로 엘랑키아 북서부와 중부의 영주들에게 소집된 병력이 약 8천 명.
글자와 숫자로 기록된 것만 보아도 느껴지는 왕실 직할군의 어마어마함을 본 직후라 그런지 실감이 잘 오지 않지만, 이들 역시 훌륭하게 무장된 강병들이다.
기병의 비율은 약 사 분의 일 정도. 모범적인 엘랑키아의 평균적인 군대이다.
다만 총병 비율이 살짝 떨어지는 것이, 이 또한 백병전과 충격력을 중시하는 엘랑키아의 평균적인 군대임이 분명해 보인다.
다음으로 큰 덩어리를 차지하는 것이 팔스부르의 공작이자, 엘랑키아 동부를 수호하는 그랑다투아 군의 사령관인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의 군대이다.
약 1만 5천의 대군이고, 국왕 직할군 만큼이나 세세하게 항목별로 나뉘어져 구성을 잘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중 약 절반인 8천 정도는 평소 아르밀 공작이 조련한 왕실 근위군 수준의 최정예라고 하겠으나, 나머지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병력의 모수가 훨씬 적은 상황에서 숫자를 채운 병력일테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이것도 왕실군의 터무니없는 구성을 보았기 때문이지 결코 ‘숫자만 채운 약골 오합지졸’이라는 것은 아니다.
···기병 비율이 삼 분의 일을 차지하는 고르고 골라 뽑은 정예로만 이루어진 왕실 직할군을 먼저 봤더니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다.
당장 작년에 라솔의 침공에 맞섰던 생뢰르반 전투에서만 보아도, 평균적인 엘랑키아 기사들이 얼마나 무섭게 싸우는지는 보았지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큰 덩어리는 제브레도뉴 공작의 영지군이다.
제브레도뉴 공작령은 엘랑키아 동부에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어, 그랑다투아 군과 함께 대 그룬발트 전선에서 싸워온 가문인 모양이다.
지금 북쪽으로 파견나갔다가 귀환중이라던데.
아무튼 제브레도뉴 영지군의 구성은···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다소 특이한 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