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28화 (428/556)

43-6. 로델베르크

마치 패배를 선언하듯 말한 왕의 얼굴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마치 여유를 되찾은 느낌.

“하··· 설마 그룬발트 녀석들도 같은 의심을 가지려나?”

“저는··· 이 자리에서 폐하와 다른 분들의 태도에서 무언가 있다는 힌트를 받았으므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후우우우우···.”

다고베르 2세가 자신의 얼굴을 감싸쥔다. 그리고는 길게 한숨을 내뱉는다.

“정말 대단하군, 에트 경! 대단해! 이 늙은이는 진심으로 감탄했소! 막내 아들놈이 헛소리를 한 게 아니었구만!”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갑자기 내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흔든다. 노장의 격한 반응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대단하십니다, 에트 경. 저는 형님 폐하께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룬발트의 제국군 자체’를 무너뜨린다는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 또한 눈을 빛내며 내게 말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왕의 속내를 캐내듯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미 내릴 수 없는 파도에 올라 탄 느낌이다.

“내 ‘바깥 의도’는 맞출 것으로 생각하기는 했으나, ‘안쪽 의도’까지 맞출 줄은 몰랐구려. 다시 말하지만 정말 감탄했소, 에트 경.”

“그건 과찬이십니다. 저는 책임지는 역할이 아니기에 그저 추측했을 뿐입니다.”

“아니, 아마 내 참모의 절반은 군사력 자체를 타격한다는 의미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오. 귀경이 이해한 것을 말해줄 수 있겠소?”

“알겠습니다, 폐하···.”

다고베르 2세의 바깥 의도는 아까 이야기 했던, 랄렌 강 동안의 영토와 그 북쪽을 차지해 나우데사를 그룬발트로부터 육로로 분리하는 것이다.

이건 이룰 수 있다면 분명 훌륭한 전략이다. 엘랑키아 입장에서는 북방의 문제를 대부분 해결해 버리는 격이니까.

그러니 그룬발트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막고 싶겠지.

게다가··· 나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지금 그룬발트 다음 황위를 향한 다툼이 치열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외세가 침입해 왔다면, 이는 다음 황위를 요구하는 아주 강력한 권위가 될 수도 있고.

그러니 그룬발트 제국에서는 적극적으로 대응해 올 것이다.

이걸 베이스로 깔고, 다고베르 2세의 진짜 의도가 동작하기 시작한다.

군사력에 대한 직접 타격은 어찌 생각하면 모호한 개념이다.

이번 전쟁의 목적이나 진행이 어떻든, 엘랑키아 군이 전쟁을 포기하고 조기 철수하기라도 하지 않는 한은 그룬발트 주력군과 결전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이 진짜 목적에 따라서 그 결전을 대하는 태도와 준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전투는, 혼란과 살육 자체를 즐기는 미친 놈이 아니고서야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권력이든, 재산이든, 정당성이든 전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투의 승리가 반드시 적군의 파멸과 직결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지 않고 이기는 법이 더 많다고 할 수 있겠다.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지엽적인 전투에서만 승리해가며 결과적으로 적의 주력을 무력화 시킬 수도 있겠고.

기동을 제한하고 보급을 끊어 철수하기와 굶어죽기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금은보화나 영토와 같은 대가를 주어 전투를 피하도록 교섭하는 것도 국가의 이득이라는 점에서는 승리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혹은 반대로, 동맹을 끌어들여 압도적인 전력차를 보여줘 애초에 전투가 성립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분명한 승리라 하겠지.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략가들은 싸우지 않고 승리를 취하는 것을 최고로 쳤을 터이니, 이를 전략적 승리라 부른다.

하지만 현재 다고베르 2세 국왕과 그가 지휘하는 엘랑키아 군은 굳이 결전이라는 위험한 도박수에 적극적으로 판돈을 걸려 하고 있었다.

단기적이고도 ‘작은’ 전략적 승리에 전혀 만족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팔스부르 전투에 대해서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이오! 이 전쟁 이전에 그룬발트를 상대로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지 않소! 이 늙은이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바로 그 때 폐하의 곁에 서서 함께 싸웠던 것이지!”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실히 막내아들인 뤼브르 드 루블랭 경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인지.

“그 전투에서 엘랑키아는 팔스부르, 그리고 메플렌 지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룬발트에 뿌리 깊게, ‘엘랑키아 기사단은 같은 수로는 상대할 수 없다’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으음, 그렇지! 확실히 같은 수로는 그룬발트 놈들에게 질 것 같지 않군!”

프레니히 백작의 자부심 넘치는 호언장담으로 알 수 잇듯, 엘랑키아 역시 강한 자신감을 얻었고 말이다.

“만약에 그 이상의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엘랑키아 기사단을 같은 수로 상대할 수 없다 정도가 아니라, 우세한 전력으로 싸우더라도 이길 수 없다··· 수준의 공포증에 가까운 인식을 안겨줄 수 있겠지.

최소한 한 세대 정도는 이런 인식을 공유할 것이며, 엘랑키아 상대로 군사행동을 일으키려는 의도를 가진 권력자들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압도적 전략적 성취를 얻게 된다면, 랄렌 강 동안의 영토나 나우데사에 대한 패권 따위는 자동적으로 넘어 올 것이기도 하고.

한 세대, 혹은 그 이상 대 그룬발트 전선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엘랑키아와 싸우면 이길 수 없다, 더 나아가 파멸한다라는 것이 ‘상식’인데 대체 군대를 어떻게 모을 것이며, 전쟁터에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엘랑키아가 다른 데서 엄청나게 얻어 맞아 몰락, 예전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혹은 그런 상식조차 뒤집고 대륙의 판도를 뒤엎을 정도의 군사적 천재성을 가지고 추종자들을 열광시키는 카리스마도 겸비한 불세출의 황제라도 나오지 않는 한은?

사방을 적성국에 둘러싸인 엘랑키아 입장에서는 가장 위협적인 상대인 그룬발트 제국을 그 대열에서 한동안 탈락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니 그것 자체가 아주 큰 성과라 하겠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승리를 대체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본래 야전이라는 것은 양쪽이 적극적으로 결전을 원하지 않으면 잘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극도로 조심하고 있을 신성 그룬발트 제국군을 적극적으로 전장으로 끌어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가 왕실군의 움직임에 위화감을 느낀 것은, 개전 직전까지 마치 각본이라도 짠 것 처럼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던 폐하께서 로델베르크에 이르러서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으음, 분명 그랬지.”

“외람되오나, 그 의도는 그룬발트가 충분히 힘을 모으도록 시간을 주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감히’ 엘랑키아 군과 정면으로 격돌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모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흠, 딴에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라 생각했건만···.”

다고베르 2세가 쓰게 웃었다. 이는 내 질문에 긍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만한 힘을 결집한 그룬발트 제국의 군사력을 격파해야만··· 어렵게 짠 계획이 그만한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려면 말입니다.”

그룬발트 제국 측에게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도 이길 기회가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승리의 천사가 상대의 손을 들어 주었을 뿐이다, 다음에는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으리라’

지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겨도 국왕이 목적으로 한 ‘근본적인 승리’에는 손이 닿지 않는다.

요행히 살아 돌아간 자들이 엘랑키아 방향은 무서워서 쳐다도 보지 못하게, 철저하게 트라우마를 심어주지 않으면 소용 없다.

“...이거 무서울 정도로군. 내 가장 신임하는 참모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던 내용들이 남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걸 보는 건 말일세.”

어쩔 수 없다는 듯, 반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국왕과, 경악한 표정으로 그런 주군을 바라보는 두 측근의 모습이 대비된다.

신속은 용병술의 기본이다.

적이 집결하기 전에, 준비하기 전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싸우는 것이 전술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적이 더 강해지길 기다린다··· 고 사령관인 다고베르 2세가 인정해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미친 짓이다.

“...또 다시 외람되오나 여쭙고 싶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승리할 자신은 있으십니까?”

내 단도직입적 질문에 프레니히 백작이 놀라서 펄쩍 뛴다.

“아니, 에트 경 그건 무례하지 않소!”

“괜찮소이다, 프레니히 백작. 그러니 외람되는 질문이라 한 게 아니겠소?”

허나 다고베르 2세가 만류한다. 그렇지, 그 역시 바로 이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 테니까.

“그걸 이제부터 준비해보자는 것이지.”

국왕이 팔짱을 끼고 상체를 세워 의자에 기대자, 왕이 앉는 의자 치고는 조잡해 보이는 야전용 목제 의자가 끼이이 하는 비명을 지른다.

“물론 짐도 무작정 앞뒤 생각도 않고 적에게 달려드는 미치광이는 아니오. 반드시 이기겠다가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과정은 있어야겠지.”

자세를 고쳐 앉더니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제2, 제3의 선택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소.”

“선택지··· 라고 하시면 어떤 것입니까?”

“만약, 지금 우리가 점령하고 있는 땅의 선제후인 폴름스 가문이 병력을 이끌고 뛰쳐 나왔다면, 그걸 섬멸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오. 그럼 아마 전쟁은 거기서 일단락이 되었겠지.”

···그래서 선두 왕실군만 이끌고 지지부진하게 로델베르크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인가.

확실히 그때는 병력이 2만 명 정도로, 선제후 가문이 결전을 결심해볼 만 한 전력차가 분명했다.

게다가 배후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로델베르크’가 모루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믿게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성급하게 결전에 뛰어 들도록.

확실히 거기서 선제후군을 궤멸하거나 선제후 본인을 폴로 잡는다면, 나머지 그룬발트 지원군은 계속 싸우는 것을 꺼려하게 되겠지.

···아니 잠깐, 그럼 우리가 열심히 미터스 하임에서 그룬발트 군의 지원군을 지연시킨 건 의미가 없었던 건가?

“하지만, 사령부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적군 사이에는 전군이 집결하기 전에는 출전하지 않는다는 밀약이 있었던 모양이오. 결전을 벌어지지 않았겠지.”

“아··· 그렇군요.”

다행히, 영 의미 없는 행동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그러지 않다 해도 전술적 승리는 분명하잖아.

“그래서 다음 선택지로, 짐은 선제후의 거점, 폴름스로 진격할 것이오. 만약 적이 요격해온다면 거기서 결전, 마찬가지로 전쟁은 거기서 끝날 가능성이 높소.”

“예··· 맞습니다.”

이긴다면 말이지만.

“그래도 끝끝내 성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공격해야겠지. 고대 아란 제국 시절부터 내려오는 고도인 ‘쌍둥이 세계수의 도시’는 로델베르크 따위와는 다르니 금방 점령하지는 못할 것이오.”

다행히 국왕은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로델베르크 함락의 성취감에 도취해 현실감각을 잃었을 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룬발트 전역에서 지원군이 몰려오겠지? 그럼 그걸 섬멸하고, 마찬가지로 전쟁을 끝내는 거요.”

“저, 정말 원대한 계획입니다, 폐하.”

프레니히 백작은 감탄하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이 충성스러운 노장은 주군의 계획에 완전히 찬동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명령에 따라 목숨 바쳐 싸우겠지만.

“제국 전역에서 몰려오는 지원군의 숫자가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폐하··· 아군이 이긴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무례하지만 할 말은 할 수 밖에 없다.

“아마 선제후들의 약 절반이, 새로운 황제 후보를 중심으로 뭉치리라는 것은 뮈르텔 재상도 예건한 것이오. 십시일반으로 모인 병력은··· 실제로 10만에 이를지도 모르지.”

“...예.”

그룬발트 제국 역시 엘랑키아처럼, 한 전선에만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선제후들 사이의 대립이 첨예하니 동원 가능한 병력은 한계가 있겠지.

나도 머리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해 본다.

병력 10만의 야전군··· 불가능한 것은 아니리라. 그만한 규모가 쉽게 통솔되고 보급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여긴 그룬발트의 영토니까.

아니 그런데, 다고베르 2세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인데!

“하하하, 10만이오! 역사 기록 속에서도 보기 드문 대군이 우리를 깔아 뭉개기 위해 집결하는 것이오. 두렵소이까?”

“...진정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바로 쫓아내십시오, 폐하. 두려움을 모르는 자가 바로 군을 망칠 자 입니다.”

“하핫, 솔직하군. 좋소이다. 허나 짐이 모은 군세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소. 이길 방도는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정 안되면 꽁무니를 빼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요.”

“혹시··· 끝까지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폴름스를 계속 공격할 것이냐는 내 질문에, 다고베르 2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연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짐은 그룬발트의 세계수를 불태운 최초의 군주가 되겠지.”

이빨이 보이는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면서, 나는 그게 진심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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