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27화 (427/556)

43-5. 로델베르크

처음으로 만난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의 첫 질문은 자신의 전략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어떤 의도로 하는 질문일지 고민해본다.

‘훌륭한 전략입니다’ 따위의 대답을 바라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

나는 그동안 엘랑키아과 그룬발트 사이의 전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복기해본다.

전쟁 구실이 생기자마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대부분, 물론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고정형 다리라는 승부수를 쓰며 빠르게 랄렌 강을 건넜다.

공병의 활약과 규모만 보아도 최소한 일년 이상 준비한 공격이었다.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 그 책임자라는 것만 보아도 국왕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아직 왕실군 본대는 이렇다 할 활약은 없었으나 남다른 활약을 보여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왕이 왕궁 운영 예산을 아껴가며 애지중지 키운 수족들이 아닌가.

한편···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다소 위화감이 느껴지는 점이 없지 않다.

별동대를 파견한 점이나···.

이곳 로델베르크에 대한 공성 공격도 그렇고.

나는 머리속으로 확인된 사실과 추측, 그리고 추측 중에서 확신이 가는 추측과 그렇지 않은 추측을 나누어 정리해본다.

이 자리에 있는 국왕과 그의 측근들을 불쾌하게 하지는 않으면서, 나름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내용을 잘 정제한다.

“폐하께서 이번 전쟁을 얼마나 신경을 써서 준비하셨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신속한 도강 작전과 후속하는 처치만 보아도 말입니다.”

내 칭찬이 다고베르 2세가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을 언급해 기분이 좋은지 고개를 끄덕인다.

“하오나··· 그 후의 과정을 보면 다소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호오, 그게 무엇이오?”

“바로 이곳, 로델베르크 성을 함락하신 일입니다.”

나는 차근차근 내 의도에 대해 설명한다.

로델베르크는 평지성에 낙후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아까 오면서 보았지만, 공성전 과정에서 파손도 매우 심한 편이다.

전쟁이 끝나고 새롭게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 다시 요새화 하지 않는다면, 굳이 대군을 동원해서 장기간 포위하고 함락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비싼 돈 들여 쓸데 없는 짓을 하셨습니다! 라고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단어를 선택한다.

“아, 물론 이번 엘랑키아 군의 침공 의도가 랄렌 강 동안 영토 일부를 ‘획득’ 하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짐의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 짐작한다는 것인가?”

“하하, 제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귀경에게 짐의 의도를 짐작해 보라 묻는 것은 아니오. 귀경의 생각을 기탄없이 들어보고 싶은데···.”

“그, 그러시다면···.”

적당히 칭찬하고 화기애애하게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괜히 다르게 생각할까 싶어 의도니 어쩌니 말을 덧붙인 건 실수였나 보다.

나는 다시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에 로델베르크를 포위한 왕실군이 전력으로 공격을 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문으로 도는 공성 전력에 정보나, 여기 에티엔 공작을 책임자로 임명하신 것만 보아도 말입니다.”

“아하, 귀경은 짐의 군대가 힘을 다 발휘하지 않았다 생각하시나 보오.”

“뭐 오늘 막 도착한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아니, 귀경이 파악한 게 틀리지 않소. 어떤 점을 보고 그렇게 짐작한 거요? 그 말대로 ‘오늘 막 도착한’ 이의 의견이 듣고 싶구려.”

“그건··· 현재 로델베르크 성채의 상태를 보고 그리 생각했습니다.”

오는 길에 약간 고지대에서 본 것만 해도 명확했다.

성벽이 파손된 흔적을 보면, 공성전은 참으로 꼼꼼하고도 알뜰하게 사방에서 조여 들어가듯 진행되었다.

공격측에서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며 방어 수단을 하나 하나 털어버리는 방식이고, 수비측은 하루하루 올가미가 목을 조여오는 느낌이었겠지.

하지만 이는 시간을 쓰는 방식이다.

접근로가 제한되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아니고서야, 굳이 이런식으로 함락할 필요는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핵심 장소의 성문만 부숴 가면서 최단거리로 돌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돌파 부대는 측면과 후면에서 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희생을 감수해야 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성문은 물론이고 성벽 자체를 무너뜨릴 정도의 화력을 보유한 현 엘랑키아 왕실군이다. 구식 구조의 평지성을 부수는 데 궤멸적인 피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시간을 상당히 아낄 수 있겠지. 그리고 대체로 전쟁에서 시간은 굉장히 소중한 자원이다.

가끔은 무수히 많은 병사들의 목숨과 등가교환될 정도로. 불편한 진실이다.

병력 집결조차 기다리지 않고 여기까지 전격적으로 밀고 들어온 왕실군이, 마치 로델베르크에 이르러서는 시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마구 써버린다.

이게 내가 느낀 위화감의 실체였다.

“허어···.”

내 말을 들은 다고베르 2세가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는다. 음, 불쾌해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의견을 이야기 하라고 해서 말하면 대놓고 불쾌해 하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이 또한 불편한 진실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걸 그냥 보자마자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이군. 의도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금은 더 고민하며 의도를 짐작해 주었으면 했는데···.”

“이래서는 사령부에서 보안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겠군요.”

“하하하, 그러게 말이오.”

옆에서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도 한 마디 거든다.

설마 내가 불편한 점을 지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없는 나지만, 재빠르게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아, 물론 그룬발트의 정찰병 입장에서는, 저처럼 가까이에서 성벽 상태를 살필 기회가 없으니 정확한 정보는···.”

“아, 에트 경, 역정을 내는 것이 아니오. 오히려 매우 즐겁군. 귀하와 같은 지장을 진작부터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많은 기대를 받으면 나중에 힘들어진다고···.

“...과찬이십니다. 저도 그냥 추측을 할 뿐이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분명히 그룬발트 측도 그렇겠지요.”

“그룬발트가 말이오?”

“저와 같은 판단 재료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을 뿐이지, 폐하의 의도까지 이해하지는 못 할 것입니다.”

“그럼 기만 전술이라도 써야 할까?”

“이미 훌륭하게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짓 의도 사이에 진짜 의도를 끼워 넣는 아주 모범적인 기만 전술 말입니다.”

나는 진땀을 흘리며 너무 나간 추측을 수습하려 노력한다. 책임 질 수도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도 다고베르 2세와 그 측근들은 내 말을 듣더니 고민하는 모습은 보였지만, 기분 나빠하는 모습은 아니긴 했다.

“음··· 에트 경.”

“예, 폐하.”

“에트 경은 짐의 진의가 무엇이라 생각하오?”

“로델베르크를 함락하시면서, 그리고 병력을 북부와 남부로 분산해 보내면서 그룬발트 핵심 지역을 차지하려 하려는 것 처럼 그룬발트에게 신호를 보내시고 계시다 생각했습니다.”

점령지를 확장하고, 마치 그것을 지키려는 듯한 제스쳐를 그룬발트에게 준다.

하지만 실제로 바라는 것은, 랄렌 강 동안의 ‘완충지’와 거기서 북쪽, 나우데사 국경으로 이어지는 한 조각의 땅을 할양 받으려는 것이겠지.

100정도의 땅을 차지하려는 듯 하여 상대에게 지키도록 만들고, 실제로는 20정도의 땅을 철저하게 내 것으로 만든다는 전략이다.

허나 실질적으로 얻는 땅의 넓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좁고 긴 땅의 가치는 각별하니까.

전략적으로 엘랑키아 북부에서 이보다 중요한 영토는 없었다. 실질적으로 나우데사는 엘랑키아와 바다에 둘러싸인, 왕국의 한 지역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향후 그룬발트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하더라도 이중 삼중의 방어선을 뚫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

“···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스스로 함정을 파서 거기 갇히고 말았던 건 아닐가?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머리속에서 사실과 추측을 정리하던 나는 또 위화감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혹시 이 과정 자체가··· 기만책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내가 정리해서 설명한 내용은 제법 모범적이고 성공률도 높은 방법이다. 정확히는 ‘실패하지 않을’ 방법에 가깝겠지.

하지만 어쩐지, 나에게 설명을 시켜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국왕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논리적인 결함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장에서 가끔 느끼는 이유 모를 소름에 가까운···.

왠지 무언가를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를 시험하나?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나를 통해서’ 시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럼 무엇을?

“...외람되오나, 폐하께서는··· 설마···.”

“무엇이든 말해보시게, 에트 경.”

다고베르 2세의 표정이 묘하다. 불안함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그리고 일말의 기대감조차 어린 정말 기묘한 표정.

오른편의 프레니히 백작은 무표정을 ‘가장’한 얼굴이다. 왜 가장하고 있다 표현하냐고 하면, 평소보다 눈을 30퍼센트 정도 크게 뜨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의 에티엔 공작은···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하지만 움찔거리는 입꼬리나, 힘을 줘서 쥐어 하얗게 변한 주먹이나···.

평소 어지간히 눈치가 없고 사람의 태도를 살피지 못하는 편인 나도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변화였다.

“설마··· 이 모든 것이 그룬발트를 속이려는··· 기만에 기만을 더한 것이라면···.”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망설였다. 이걸 입 밖으로 내는 것이 맞나?

100퍼센트 확실하지는 않다. 확률은 반반··· 아니 그거보단 조금 높으려나.

뒷받침할 근거는 아직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게 정답이라는 강한 추측이 들었다.

“폐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영토 할양이 아닌 것 입니까? 그렇다면··· 좀 더 근본적인 승리라고 생각됩니다.”

“근본적인 승리가 무슨 뜻이오?”

“...그룬발트 제국의 군사력 자체에 대한 타격?”

순간 실내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다고베르 2세의 표정에서 즐거움과 기대감이 싹 사라졌다.

프레니히 백작의 눈이 20퍼센트 정도 더 커졌다.

에티엔 공작의 얼굴이 경악으로 인해 시퍼렇게 변했다.

···그다지 내가 말하지 말았으면 하는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 설마, 에트 경에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정보를 준 것은 아닌가?”

“저는 에트 경을 오늘 처음 봅니다, 폐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겠지··· 미안하오, 정말 의심을 한 것은 아니오. 그냥,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다고베르 2세는 자기 머리를 헝크러트리듯 긁었다.

“내 동생 에티엔도, 뤼브르 경도, 심지어 뮈르텔 재상도 입을 모아 말했지만 솔직히 믿지는 않았소.”

다고베르 2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지금까지 보였던 다소 느슨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전사이자 승부사의 눈빛.

전쟁을 이끄는 군왕의 눈빛이다.

“허나 에트 경, 그대는 진짜로군.”

정말 패배를 싫어하는 사람이 패배를 자인하는 듯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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