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26화 (426/556)

43-4. 로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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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엘랑키아 왕실군과의 합류는 큰 문제 없이 이어졌다.

국왕 직할군 역시 다양한 출신의 병력이 뒤섞여 있기 때문인지, 배척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저 주둔지 외곽에 우리에게 주어진 장소로 이동했고, 호기심에 가득한 비번인 병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했을 뿐이다.

주둔지는 충분히 널찍했고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음···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부로 특정 부대를 괴롭히려고 들거나 소위 말하는 ‘신고식’을 강요하려는 경우 불편한 상황을 겪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자면 연대급 부대가 주둔하기에 터무니없이 좁은 공간만을 배정하거나, 바위투성이 불편한 지역을 배정하거나 하는 등이 그렇다.

아니, 그것도 양반이고 내 생각에 최악은 전날까지 군마들이 머물렀던 목초지가 배정된 일이었다.

말똥이야 치운다고는 해도, 수백 마리의 짐승이 머물렀던 장소에서 나는 악취는 하루가 지나도 빠지질 않더라.

그래서 솔직히 다소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

자의식 과잉일지는 모르겠지만, 트랑카벨 군은 과거에 샹다메리에서 엘랑키아 국왕이 보낸 군대와 싸운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거기서 싸웠던 군대가 국왕 직할군인 왕실군은 아니라 할지라도, 친척을 잃은 귀족이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으니 다행 중 다행이다. 내가 좀 곤란한 일을 겪더라도, 우리 병사들이 그런 일을 겪지는 말았으면 하니까.

···라는 기특한 생각은 마침내 부관 첼레스티나 한 명만 데리고 왕실군 사령부 천막으로 향했을 때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모름지기 어려움이라는 건 서로 나눠야지, 어째서 나 혼자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느냔 말이다··· 라는 생각이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전쟁 중의 병영이라서 다행이다. 전시에는 많은 허례허식들이 생략되고는 하니까.

전쟁터에서도 여전히 신분의 높낮음은 여전하고, 심지어 문화에 따라서는 전장에서 하는 일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치열한 전투를 한 번 겪으며 사선을 함께 넘고 나서는, 태생적인 지위나 권리 따위를 뛰어 넘는 유대가 생기게 마련이다.

과장 좀 보태서 어딘가의 높으신 공작 각하와 일개 하층민 출신 보병이 마주 앉아 농담 따먹기 하는 건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

그러니까··· 국왕님과 만나는 것도 별 일은 아닐 거야··· 여기는 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이니까.

따위의 생각으로 불안함을 잊으려 노력했다.

“생뢰르반 파견대의 지휘관, 트랑카벨의 대리 사령관 에트 경!”

어깨 위에 바늘을 하나씩 꽂는 것 같던 대기시간이 끝나고, 내 이름이 불려지며 사령부 천막 내부로 들어갔다.

가장 안쪽에 내가, 정확히는 내가 섬기는 고용주가 섬기는 대영주가 섬기는 국왕 폐하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 주변에는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장군과 참모, 기사들이 도열해 있다. 대부분은 남자지만, 드물게 무장한 여자들도 보인다.

마치 열병식이라도 하듯 칼같이 줄을 맞춰 선 것은 아니지만, 국왕을 포함해 지위가 높은 이들이 모여있기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위압감이 느껴진다.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여기는 전쟁터임에도 바닥에 깔린 카펫 덕에 바닥은 푹신하다.

소심하게 흘깃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사람들의 표정은 호기심이 어린 얼굴이 가장 많았고, 무표정한 얼굴이 다음으로 많았으며, 일부는 웃고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국왕 다고베르 2세의 얼굴은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웃는 사람 중의 일부는 다행히도 아는 사람들이다.

한 명은 미터스하임 전투 동안 함께했던 연락 장교 뤼브르 드 루블랭, 나머지 한 명은 다름아닌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이다.

샹다메리의 패전 이후, 근신하고 있다가 지금은 공병대를 이끌고 있다던가. 이런 상황에서 알던 얼굴을 만나자 이상할 정도로 반갑게 느껴진다.

어쨌든 종합하자면, 실내 분위기는 그렇게 나에게 적대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그래도 나에게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이건··· 분명 내 탓이 크겠지. 과도하게 경계하는 것은 저들이 아니라 내가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어깨를 쭉 폈다.

마음을 편하게 갖자. 지금은 사교를 위해서 온 것도 아니고, 개인이 아니라 생뢰르반 파견대의 지휘관으로서 방문한 것이다.

나에 대한 평가가 주군인 트랑카벨 가문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며, 상관인 드 레뮤즈 가문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다.

나는 적당한 위치에 도착했을 때,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엘랑키아 왕국을 섬기는 생뢰르반 군사령부의 참모장 에트, 파견대의 지휘관으로서 국왕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최대한 느긋하게, 실수로라도 긴장한 목소리가 너무 올라가지 않도록 조심한다.

엘랑키아 왕실 귀족들 보기에는 좀 촌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평생 용병으로 먹고 산 촌놈이 엘랑키아 왕실 예절을 알 게 뭐냐.

누군가가 일어서는 느낌이 나더니,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멈추겠지··· 싶었는데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다가온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잘 와 주었소.”

잘 손질된 황동제 버클이 달린 가죽신발이 눈 앞에 보인다 싶더니,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고 나를 번쩍 일으킨다.

“엘랑키아 국왕으로서, 우리 원정군 사령부를 대표해서 감사드리오!”

“예? 예··· 예!”

내가 얼빠진 소리를 하는 가운데, 국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눈을 피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는 오히려 실례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냥 어색하게 웃기로 했다.

국왕은 생각보다 젊어 보였고 키는 보통이었으며, 내 손을 마주 잡은 손바닥은 거칠었다.

전형적인 기사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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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고, 어떤 일이 있었을까.

확실한 것은, 내 머리가 한 번에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들어났다는 것이다.

왠지 국왕의 주도하에 장군님들에게 박수를 받기도 했고, 무수히 많은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몇 명은 자기 소개도 했지만··· 미안하게도 다시 만났을 때 기억할 자신은 없다.

전과 보고는 다행히 내가 아닌, 연락 장교였던 뤼브르 드 루블랭 경이 대신 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그가 보면서 읽는 보고서는 분명 우리 참모부에서 리타르몽 드 당세르 경이 작성한 것이고 내가 승인한 것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뤼브르 경이 중간중간 추임새와 과장을 섞어 넣어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다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뤼브르 경의 전황 보고는 마치 음유시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서 확실히 재미있었다.

특히 뤼브르 경은 단순히 미터스하임 전투를 얻어 들은 음유시인이 아닌, 현장에서 직접 전장을 관찰한 당사자인 것이다.

그러니 그 현장감이나 유려함은 따를 이가 없었겠지.

“...그렇게 사흘이 지난 새벽, 복수를 결심한 그룬발트 군은 대군이 부끄럽게도 어둠 속에 숨어 언덕을 올랐습니다! 허나, 아군은 이미 전날 밤 방어선을 비우고 떠난 이후였지요!”

그렇게 끝난 보고는 듣는 이들에게 진심 섞인 박수를 이끌어 냈다. 나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소 경박하다 생각했던 뤼브르 경의 태도는, 다름 아닌 엔터테이너의 자질이구나··· 싶었다. 왜, 전설 속에도 기사와 음유시인을 겸업한 영웅들이 있지 않던가.

그 후에도 잠시 질문과 답변이 오간 다음에는, 나는 같은 천막 안에 딸린 작은 별실로 안내받았다.

적어도 ‘국왕이 머무는 야전 알현실’ 느낌은 났던 방금 전의 공간과 달리, 이 좁은 별실은 국왕의 천막 안에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시종들이 불 붙인 촛대를 가져왔고, 채광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와 어두컴컴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투박한 탁자와 의자들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허나, 여기 있는 인간들은 ‘아무것도 없는’ 인간들이 절대로 아니다.

탁자에 둘러 앉은 네 명은, 바로 국왕 다고베르 2세, 왕실군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 왕실 공병감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 에 내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의 분위기가 남아 화기애애한 편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숨막힘을 느낀다.

저녁 먹기에는 이르니,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며 이끌려 온 것인데···.

“전부터 꼭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소이다, 에트 경. 엘랑키아 북부에서는, 귀경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있어도 귀경의 공적을 모르는 이는 없지.”

다고베르 2세가 빙긋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라고 할 수도 없고. 솔직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기도 했고.

“샹다메리에서는 크게 신세를 졌소이다! 그렇다고 감정이 남은 것은 아니오. 같은 주군을 섬기게 된 이상은, 그렇지 않소?”

프레니히 백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뤼브르 드 루블랭과는 부자지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전혀 다른 호탕한 노장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에트 경. 같은 막하에서 함께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에티엔 공작은 얼굴이 좀 거칠어지고 햇빛에 그을렸지만, 여전히 특유의 친화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차려 입으니 다시 왕궁의 귀공자처럼 보이는데. 공병대를 이끌고 다리를 놓으며 공성전을 지휘한다니,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그야 내가 아는 공병대장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주디칼리 출신의 드워프 장인 에오르크 레타일이니까.

“인사가 다소 늦었지만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영주님들.”

나는 나대로 최선을 다해 인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직업 특성상 공작님이나 백작님은 자주 만나본 편이다. 그렇다고 부담스럽거나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이 쪽이 할 소리지. 귀경을 짐의 막하에 부를 수 있게까지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구려.”

“폐하께서 트랑카벨 가문을 통해 저를 부르셨다면··· 언제라도 인사를 드렸을 것입니다만···.”

“하하, 그러면 귀경은 내 막사의 손님일 뿐이지, 내 막하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소?”

“그건··· 예, 그렇습니다, 폐하.”

다고베르 2세는 정말로 기뻐하는 것 같다. 다행히 내가 트랑카벨에 합류한 이후 밥값도 못한 것은 아니었으니··· 라고 할까.

“거듭 말하지만, 귀경을 만나 정말 기쁘구려. 오늘은 정말로 이렇게 실없는 이야기나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니, 마음을 놓으시오. 전장이 아니면, 어디서 우리가 이렇게 편히 마주 앉을 수 있겠소?”

“하하하핫, 맞습니다, 폐하!”

어느새 들어온 시종들이 각자의 앞에 잔을 두더니 포도주를 따른다.

···어지간히 술을 즐기는 편인 나지만, 너무 긴장해서 포두주의 상표를 보는 것도 잊고 말았다.

나도 한 모금 마셨지만 맛도 잘 모르겠다. 하필이면, 왕도를 지나는 사와르 강 유역에는 훌륭한 포도주 산지가 많은데.

나는 자꾸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정신을 붙잡는다.

원래 ‘목적 없이 순수한 의도로’ 라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사람 치고 정말 목적이 없는 경우는 없는 법이다.

지금 국왕이나 다른 두 사람의 태도는 정말로 이 자리를 즐기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뤼브르 경의 말에 따르면 다고베르 2세는 전장에 나선 이후 술도 자제하고 있다고 들었다. 술까지 꺼낸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술이 한 순배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나도 적당히 마시면서 가끔은 대답하고, 가끔은 웃는다.

“그런데, 에트 경. 귀하의 식견이 대단하다 들었소. 뤼브르 경이··· 뭐라고 했었지?”

“제 용렬한 자식놈이 ‘전장의 기적’이라 표현했지요!”

···그 표현을 남들 듣는 앞에서 했단 말인가.

“뤼브르 경은 매우 성실하고, 나름 사람을 보는 눈도 있는 편이네. 자, 에트 경은 이번 전쟁에서 짐의 전략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온 신경을 끌어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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