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25화 (425/556)

43-3. 로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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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엘랑키아에 대항해 소집될 병력은 길고 길었던 그룬발트 역사속에서도 드문 대군이다.

일단 모두 일곱 선제후령이 협력했다는 것부터가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각 선제후령이 동원한 병력이나 자금은 차이는 있지만 눈치보다 숟가락만 얹는 경우는 없었다. 다들 나름의 기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섯 개의 표가 모인 이후, 황제 선출을 확정하는 일곱 번째의 표.

그게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게다가 선제후령 직할이 아닌 지역 영주들에게도 이 전쟁은 큰 기회였다.

사반세기만에 일곱 개의 선제후 표가 모였다. 따라서 이번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반드시 새로운 황제가 선출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 황제인 디오보르크 공작, 아니 제위 후보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나쁠 것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모인 병력은 숫자라는 측면에서도, 병력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르다 말하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이름만 들어도 피가 끓는, 10만의 대군이 엘랑키아 군을 몰아내기 위해 집결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소 과장된 숫자라 할지라도 엄청난 숫자라는 것에 이의를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대군의 움직임이 그만큼 굼뜨다는 것이었다.

“디오보르크 공작은 대체 언제쯤 도착하는 것인가!”

폴름스의 선제후 네프셀시엔은 분노를 터뜨린다.

원래 성질을 부리는 경우가 많아 스스로도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는 중이지만, 최근들어 자제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생기고 있었다.

아마 이번에는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주신교의 성인좌에 오른 인격자들 조차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일부러 황도를 거쳐서 온다? 가장 시급히 도착해도 모자랄 판에!”

전해진 소식은 이랬다.

그 이름도 찬란한 ‘차기 황제’로 사실상 확정된 디오보르크의 공작의 병력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전장으로 직행하지 않는다.

가득이나 여러 세력의 지원자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둔해 터진 병력이다.

그런데 마치 벌써 황제라도 된 것처럼 제국 내부를 순행하며, 종국에는 황궁이 있는 제국 황도까지 들렀다가 온다는 것이다.

북서부 변경인 폴름스 선제후령이 이미 엘랑키아 군에게 짓밟히고 있는 지금 말이다!

“하지만 약정이··· 그러기로 하였으니···.”

가신들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약정이란, 이번 엘랑키아와의 전쟁을 지원하기로 한 여섯 선제후들과의 사이에 맺어진 밀약에 대한 것이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폴름스의 네프셀시엔을 포함하여 일곱 선제후 중 누구도 아니다.

이들이 다음 황제로 밀고 있는 후보자, 디오보르크 루프트 폰 제블링겐 공작 ‘이어야 만’ 했다.

모든 게 그렇게 짜진 판이다.

‘엘랑키아의 국왕이 이끄는 친정군을 격파해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구해낸 영웅’

향후 디오보르크 공작이 얻게 될 칭호이자, 영예였다. 사반세기만에 탄생하는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닌 황제가 되리라.

전쟁을 승리로 끝내자 마자, 위기에 처했던 폴름스의 선제후가 공개적으로 선제후 회의를 요청한다.

그리고 회의에서 가장 먼저 선제후령을 구해낸 영웅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지한다.

나머지 여섯 명의 선제후들이 차례대로 지지를 이어가며 새롭고도 강력한 황제를 만들어 낸다는 거대한 계획이다.

···이 모든 연극에 발판이 되어 이용당한다는 생각에, 네프셀시엔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약정은 ‘여섯 선제후의 지원군’에게만 걸려 있는 제한이다. 선제후 직할군만이라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미 폴름스에 도착한 용병대가 제법 있지 않은가? 그들을 움직여 지원을 받을 수는 없나?”

“그게··· 선제후 전하, 말씀하신대로 이미 접촉은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디오보르크 공작이 도착하기 전에 움직이면 위약 행위에 해당한다며 난감해 했습니다.”

“...빌어먹을 놈들.”

그런데 문제는 직할군 만으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네프셀시엔 역시 팔츠부르크가 올려다 보이는 전장에서 벌어졌던 전투, 메이플링겐 공작군이 학살당했던 그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같은 수로는 평야에서 엘랑키아 기사를 이길 수 없다.’

분하지만 그룬발트 제국 전역에 마치 ‘상식’처럼 퍼져있는 말이었다.

그녀의 봉신들은 전장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용병들은 출전을 거부하는 판이다.

그런데 2만 남짓한 직할군으로 무언가를 해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로델베르크를 공격하는 국왕의 직할군만 해도 3만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었다. 수적 우세가 담보되지 못하는 한 로델베르크를 구원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래서 지금, 적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네프셀시엔은 마치 다리가 풀리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화를 내도 소용없는 상황이라 생각하니 조금 냉정해졌다.

지금은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아시다시피 엘랑키아 국왕의 주력은 로델베르크 요새를 함락 후 주둔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로델베르크 수비군은 어떻게 됐지?”

“이 역시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포로로 잡혔다면 엘랑키아 측의 요구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또 돈이 나가겠군.”

비록 네프셀시엔이 봉신들과 그 휘하 병력들을 일일이 챙길 정도로 살가운 성격은 아니지만, 자기 부하들이라는 자각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도구 따위로 본다 해도, 필요한 도구가 망실되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은 것이다.

지원하고 싶었지만 지원할 수 없었다는 것도 거짓은 아니다.

무작정 로델베르크를 구하겠다며 출전했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폴름스의 주력군은 궤멸했겠지. 이는 매우 객관적인 사실이다.

“남부로 향한 일군은, 우리 폴름스의 남부 영주들과 이웃 브라우나인의 지원군을 막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방해를 뿌리치고 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어제 도착한 그 우는 소리로 가득한 전서 말이군.”

폴름스와 브라우나인은 원수까지는 아니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에 가깝다.

네프셀시엔의 기억에 따르면, 지난 백년 간 무력 충돌만 여섯 번이나 있었으니까.

알맹이는 없으면서 허세만 부리는 고대 혈족의 수치들이다.

그런 놈들이니 전서에 완곡한 표현이기는 했지만, 엘랑키아의 방해를 뿌리치기 위해 얼마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를 장황하게 적어놨겠지.

정작 그래서 얼마나 피해를 입었고, 얼마나 도착할 예정인지는 쏙 빠져있었다.

머저리들. 병력의 절반 쯤 잃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북쪽으로 향한 일군은··· 우리 폴름스의 영토를 빠져나가 멀리 북쪽 해안가 까지 진군했다고 합니다.”

“계속 거기 머물고 있나?”

“지금은 그렇습니다. 북방의 여러 도시들을 약탈하며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저항이 거셌던 눌른준트의 경우는 주민들을 남김없이 학살했다고도 합니다.”

“엘랑키아에도 미친 놈이 하나 있었군!”

“예··· 폴름스 밖에서 벌어진 일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제브레도뉴 공작이라는 자가 지휘관이라 합니다. 포로의 일부를 살려 주변에 소문을 냈다 하더군요.”

“어차피 먹을 땅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러고보면, 이번 엘랑키아 군은 약탈행위를 엄금하며 상당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 서로 물자가 풍부한 전쟁 초반이라 그런 점도 있겠지만, 로델베르크 주변 마을의 주민들을 강제 소개시킬때도 약탈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소집 위치를 향해 이동하던 병력들까지 무자비하게 전멸시킨 철저함을 생각하면 위화감이 드는 행동은 분명하다.

‘점령지’로서 유지할 땅을 접수하는 한편, 그 밖의 영토는 초토화시키기라도 할 생각일지.

그 이유야 물론, 랄렌 강 동안 영토를 집어 먹겠다는 심보 때문이겠지. 그리고 물론 그 영토는 천년 이상 폴름스의 적법한 영토였다.

지금까지도 많은 것, 랄렌 강 너머의 영토를 모조리 잃었는데, 더 이상 잃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선제후 네프셀시엔이 자존심을 버리고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지할 정도로 중대한 일이었다.

“지금은 더 이상 진격을 멈춘 상태라고 합니다. 혹시 몰라서 북방의 드라멜른 기사단조차 소집령을 내렸을 정도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성전 한답시고 엘랑키아에 출병했다가 열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한 검은 옷의 멍청이들···.”

오로지 황제의 명령만을 듣는다며 절대 협력하지 않는 고까운 놈들이었다. 어쨌거나 이번 전쟁이 자기네 영토까지 확대되지 않으면 참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전장이 넓어지는 것은 폴름스도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선제후 전하! 감시 망루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엘랑키아의 선봉대가 폴름스에서 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놈들!”

네프셀시엔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로델베르크가 함락된 이상 조만간 일어날 일이었지만···.

“감히 폴름스에 접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적의 두 배, 아니 세 배의 병력을 보내서라도 쫓아버려라!”

“알겠습니다!”

이제 지켜보며 여유만 부릴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디오보르크 공작은 언제나 도착하는 것인지.

“전령을 보낸다! 디오보르크 공작과 카젤하겐의 선제후에게!”

“옛, 내용은 어떻게 보낼까요?”

“저주받을 엘랑키아 놈들이 지금이라도 폴름스의 성벽을 넘을 지경이라고, 빨리 오라고 보내!”

“옛! 신속한 지원을 요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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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엘랑키아 군의 주력이구나.”

미터스하임 전투 이후, 신속하게 행군한 우리 생뢰르반 파견대는 얼마 후 로델베르크 부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벽 여기저기가 심하게 파손되고, 심한 경우 완전히 무너져 돌더미가 되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좁고 긴 성벽이 길게 이어지며, 성 내부 구획을 여러개로 나눈 것은 트랑카벨 자작가의 본성, 카르카냑을 떠올리게도 한다.

성 안팎에는 무수히 많은 천막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엘랑키아 군은 점령한 성의 일부를 주둔지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르카냑에 비하면 밀도도 떨어지고 성벽도 너무 얇았다. 작심하고 공성포열을 동원한 엘랑키아 군의 공성전에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콘도티··· 에트 경! 외람되오만 제가 한 발 먼저 폐하의 진영에 가 보아도 되겠습니까? 승리한 우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습니다!”

“아··· 원하는 대로 하시죠. 뤼브르 경은 우리 사령부의 손님이지 포로가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라도 내키실 때 떠나셔도 됩니다.”

“아뇨, 아닙니다, 에트 경! 저는 생뢰르반 파견대의 객원 참모이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 가는 것은 국왕 폐하와 프레니히 원수 각하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일 뿐, 일을 마치면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 그렇게 하시죠.”

“예,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뤼브르 드 루블랭, 왕실에서 파견했던 연락 장교인 그는 신이 나서는 말을 달려 로델베르크 방향으로 향한다.

다소 경박한 면이 없지 않은 남자지만, 그만큼 유쾌하고 솔직한 사람이라 싫은 인간은 아니었다. 참모로서의 능력은 모르겠지만···.

미터스하임의 비탈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조용히 사령부를 따라다니며 참관만 할 뿐, 무리해서 나서거나 의견을 내지도 않았었고.

사실··· 처음에는 국왕 쪽에서 이쪽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인물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었다.

물론 딱히 숨길 것도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히 없는 정보를 만들어내거나,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 우리 장병들의 신경을 거스르면 곤란하므로 첼레스티나를 시켜 감시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뤼브르 경은 참 좋은 사람이지요오, 콘도티에레?”

“음··· 그래, 솔직한 사람이더라.”

“네에, 맞아요. 부친이시라는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님도 좋은 사람이시래요! 엘랑키아 왕실군의 원수라니 어떤 분인가 궁금해지네요오.”

···결과는 감시는 커녕 수상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부작용이랄지··· 첼레스티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왠지 의기투합한 것 같다.

‘세상에! 오, 세상에! 주신께 맹세코 맙소사! 그런 장면은 살면서 처음 봤습니다! 에트 경은 전장의 기적, 전략의 마술사가 분명합니다!’

‘흐음, 아쉽게도 뤼브르 경은 더 대단한 장면을 보지 못하셨네요오! 주디칼리에서 어떤 엄청난 반격이 있었는지 아세요?’

‘부디, 이 모자란 자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알려주시지요 첼레스티나 경!’

···어제만 해도 저녁 늦게까지 얼마나 떠들던지.

만약 뤼브르 경이 정말로 국왕이 보낸 정보원이라면, 적어도 주디칼리의 용병 시절 나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가지게 되었을 것 같았다.

“자, 여기서 잠깐 쉬고 가자. 뤼브르 경이 일부러 앞서 출발했으니 괜히 서두르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네에, 콘도티에레!”

국왕군과 처음 만나게 되는데, 지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콘도티에레께서는 국왕 폐하를 배알하신 적이 있나요?”

“어? 당연히 없지.”

“그럼 이번이 처음이시겠네요오!”

어··· 생각해보니 그렇다. 왕을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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