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 로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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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우웅!
“으아앗! 으악!”
“진정해라, 탄착 지점은 멀다!”
“성벽에서 떨어져! 무너진다!”
“자리 없어 그만 들어오라고!”
성벽을 포탄이 때리는 진동이 울릴 때 마다 성내에서는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울린다.
“엘랑키아 군에게 갔던 사자가 돌아왔습니다.”
핀타펠트 타핀 폰 클리펜 남작은 어두운 표정으로, 성 밖에 나갔다가 방금 돌아온 측근 장교를 맞이했다.
마찬가지로 장교의 표정 역시 엉망이다.
‘반드시 엘랑키아와 강화를 성립시키고 돌아오겠습니다.’
출발할 때의 결연한 의지는 간 곳 없이,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천옥의 사자라도 되는 듯.
“엘랑키아 군 책임자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국왕 폐하 뵙기는 쉽지 않겠지.”
살짝 빈정거리듯 대답했지만, 힘든 임무를 맡아 다녀온 장교에게 악의는 전혀 없었다.
사실 시간상, 방금 성벽 어딘가에 떨어진 포탄이 대답 대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뭐라도 대화가 받아들여 졌다면 그 순간만이라도 포격을 자제했겠지.
“사람을 통해 제안을 전달했고··· 엘랑키아는 우리 측의 모든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로델베르크 성주로서 핀타펠트가 제시한 세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안전을 보장받고 장비를 갖춘 채 철수하는 명예로운 철퇴에 대한 요청.
그게 안 된다면, 성내의 민간인이라도 안전한 중립 지대로 철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
이것도 안 된다면, 협상을 위한 24시간의 휴전이 마지막 요청이었다.
···최소한 마지막 휴전 제안 정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것으로 확실해 졌다.
엘랑키아 군은 로델베르크를 적으로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라도 함락할 수 있으나, 시간이나 병력 손해를 피하기 위해서··· 라는 구실 조차도 통하지 않는 상황.
절망적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핀타펠트와 수비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패배는 기정사실이다.
병력이 없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전투가 격렬했던 것도 아니며, 포위 기간이 몇 달씩 갔던 것도 아니기에 식량과 화약 등 군수 물자도 당장 쓸 만큼은 있었다.
원래 핀타펠트 휘하에 있던 수비군과 주변에서 소집된 병력, 그리고 주민 중 민병들을 긁어 모으면 최소 3천 이상은 될 것이다.
애초에 성벽이나 성문이 무너지면 미련없이 지역을 포기하고 후퇴했기에 병력 소모는 계속 패배만 한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문제는 크게 여섯 개로 나뉜 로델베르크 성내 구역 중, 다섯 개를 상실한 상태라는 것이다.
피난민을 합치면 5천 명 가까이 되는 인간들이 좁아터진 구역에 바글바글한 것이다.
당장 성벽에 병력을 너무 많이 배치해서 이동에 불편을 겪고 있을 정도였고, 명중탄이라도 떨어지면 너무 많은 숫자가 돌조각에 섞여 시체더미가 된다.
병사들은 누울 자리도 없어서 휴식 시간이면 쪼그려 자고 있었고, 소중한 무기와 갑주가 쓰레기처럼 아무렇게나 쌓여 방치되고 있었다.
최악은 식수 문제이다.
지금 마지막으로 사수하고 있는 지역은 핵심 성채인 만큼, 저수조도 있고 우물도 있다.
그러나 그게 5천 명의 목을 매일 축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당연하지만 5천 명이 매일 만들어내는 엄청난 양의 분뇨는 도저히 처리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아무 데나 구덩이에 쌓여 썩어가고 있었으니, 여기서 나온 오수가 지하수에 스며 들어 우물을 오염시키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오염된 물은 즉 전염병 창궐이다.
지금 높이가 있는 성주 집무실에서조차 바람만 불면 끔찍한 지옥의 악취에 눈을 찌푸리게 될 정도인데, 성벽 아래는 더더욱 심했다.
그나마 다행은 적당히 온화한 봄날씨라, 사람이 얼어 죽을 정도로 춥지 않고 역병이 돌 정도로 덥지는 않다는 정도일까.
성주 핀타펠트 남작은 우울한 표정으로 성 안쪽을 바라본다.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모여 앉은 병사와 피난민들.
이제는 구분도 필요 없을 정도였다. 역전의 기사와 부사관들조차 절망에 빠져 포탄이 떨어질 때 마다 울부짖고 있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성벽이 무너지면 신속하게 철수 명령을 내렸던 것이 후회되기도 한다.
차라리 지키지 못할 성벽일지라도 결사적으로 지키고 싸웠더라면··· 한 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자멸 위기에 몰리진 않았을 테니까.
음···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중간에 사상자들이 생겼다면 이 최후의 공간에서 인구밀도가 조금은 완화되었겠지만, 사기는 훨씬 심각하게 떨어졌겠지.
어쩌면 폭동이나 대규모 탈주가 일어나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선택지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버틴다면··· 사흘? 나흘? 수비군의 사기와 불쾌지수가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전에 엘랑키아 군이 최후 총공격을 한다면··· 여기 있는 5천 명이 넘는 인명은 모조리 학살당할 것이다.
최전방 성채의 성주이자 선제후를 섬기는 기사로서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싸움, 어쩌면 싸움조차도 아닌 대학살에서 휘하 병력과 백성들을 비참하게 죽게 만드는 것은 기사로서 할 일이 아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성문을 열고 나가 최후의 싸움을 한다면···.
‘로델베르크 수비군 전원은 이대로 엘랑키아 군의 포위망을 공격한다! 그것으로 네프셀시엔 선제후 전하께 받은 은혜에 보답한다!’
병사들 앞에서 무기를 치켜들며 그렇게 외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헛웃음이 나오고 만다.
자신은 그렇게 뜨거운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네프셀시엔 선제후 역시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충성을 바치게 되는 군주는 아니다.
아마 휘하 병력도 따르지 않겠지. 본래라면 진작에 구원군이 도착해 포위가 풀리고, 수비군은 야전군에 합류해 결전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애초에 로델베르크 주둔군은 수성전을 상정한 전력도 아니다.
성벽을 포기하며 마구간도 포기했지만, 기병 전력도 꽤 충실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허나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주군, 선제후 전하가 그리는 대전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설계 안에 로델베르크가 없는 것은 분명했다.
‘구원군이 오지 못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우리의 희생은 다른 전략적 성취로 보답받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주군을, 통치계급인 엘프를 신뢰한 적은 없었다.
결론은 났다.
로델베르크는 할 만큼 했다.
더 비참해지기 전에 성문을 열자.
“성에 백기를 올려라. 그리고 다시 사절을 준비해라.”
“...남작님? 그 말씀은···.”
“그래, 네 생각대로다. 전투는 끝난 거야.”
“남작님, 저희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위를 과시라도 하겠다는 듯, 어깨를 펴며 항변하는 어린 종자의 모습을 보며, 핀타펠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지금은 책임을 질 때다. 백기를 올리고 성문을 연다. 아니, 사절은 됐네 내가 직접 가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나마 깨끗한 망토를 걸치고, 떡진 머리를 대충이라도 정리한다. 포위가 시작되고 이틀 째 부터 전혀 다듬지 못한 수염이 엉망으로 자라 있었다.
타국의 군주를 만날지도 모르는 데 이런 꼴이라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수염 깎겠다고 시간 끌다가 포탄이라도 더 떨어지면 큰 일이다.
집무실에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며 마주친 기사들의 눈빛에 불안함이 가득하다. 항복한다고는 해도,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는 알 수 없으니까.
오로지 적의 자비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이겼다아아!”
성벽 위에 올라간 백기를 본 것인지, 성 밖에서는 엘랑키아 군의 함성 소리가 울린다.
이제 더 이상 포탄이 떨어지지는 않겠지.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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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클라크 경, 로델베르크가 함락당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로델베르크가··· 믿을만 한 정보인가?”
“폴름스의 정찰병들을 우연히 만나 들은 정보라고 합니다. 엘랑키아 군이 화약 무기를 사용해 외곽 성벽부터 차근차근 무너뜨려··· 몰린 끝에 항복했다고 합니다.”
“휴우··· 그랬군.”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군···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로델베르크의 성주 핀타펠트 남작을 기억한다.
하급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이라기 보다 군인의 커리어를 쌓았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껴서인지,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다.
그런 이가 고립무원 상태에서 싸우다 항복했다니··· 안타까운 일이고, 아군 전체의 손해였다.
만약에··· 미터스하임에서 이처럼 시간이 끌리지 않고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면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
물론 단독으로 엘랑키아 국왕의 친정군에 들이받는 것은 자살행위겠지만, 그래도 브라우나인의 지원군을 합치면 2만 가까이 되는 야전군이다.
이런 병력이 로델베르크 남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 해도, 엘랑키아 군은 상당한 대응 병력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포위를 풀고 주력으로 추격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거대로 큰 일이지만, 지형에 익숙한 것은 이쪽이니 엘랑키아 군을 허송세월하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냥 지나가는 오르막길이었던 미터스하임을 통과하는 데 엿새나 걸렸기 때문이다.
미터스하임의 고갯길을 악전고투 끝에 돌파··· 하고 나흘이 지났다.
이것을 돌파라고 할 수 있기는 있을지.
공격은 커녕 언덕 아래까지 밀렸고, 브라우나인이 자랑하는 포병대가 모조리 폐품이 된 끔찍했던 전투는 폴름스 남부와 브라우나인 군 모두에게 재앙이었다.
실질적인 피해도 끔찍했으며, ‘공격하는 측이었으나 역으로 언덕 아래까지 밀렸다’라는 상황을 겪은 병력이 곧장 전장에 투입될 수는 없었다.
황급히 전선을 물리고, 병력을 재편성하고, 공격 계획을 바닥에서부터 재수립했다.
물론 병력을 뺀 이유 중 하나는 이쪽 포병대가 박살났기 때문이다.
점화구에 박힌 나무 못을 뽑아내는 것도 큰 일이었고, 망가진 포가를 수리하는 것도 큰 일이었다.
게다가 브라우나인의 사령관인 세두시온이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호언장담한 공세에서 압도적인 전력차로도 철저하게 박살이 났기 때문인지. 눈 앞에서 측근인 데르네스의 몸이 조각나는 꼴을 봤기 때문인지.
부하의 피를 뒤집어 쓴 미청년 엘프가 절규하는 것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으나, 미클라크에게는 불신과 혐오를 쌓았을 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브라우나인의 중견지휘관들 역시 무언가 체념한 듯 열성을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나마 긍정적인 점은, 독선적이고 고압적이던 세두시온이 침울해진 덕에 좀 상식적인 논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까.
결국 병력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재건하는 데는 이틀하고도 한나절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미터스하임 고갯길에 마왕처럼 도사리고 있는 엘랑키아 군을 마주할 수 있었고.
브라우나인 사령부와 협의하여 세운 돌파 계획은 야습이었다.
적은 우리가 병력을 물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밤의 어둠을 타서 새벽 시간에 맞춰 기습공격한다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솔직히 졸렬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었다.
당연하지만 밤에는 병력 통제가 잘 되지 않는다. 당연히 대군의 기동에는 불리한 요소였다.
그런 상황에서 불분명한 기습 효과를 노리며 병력을 밀어넣는 건 도박이나 다름이 없었고··· 병력이 우세한 아군이 취할 방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다시 대열을 짜서 대낮에 언덕을 오를 엄두를 아무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에 걸친 공격 준비가 끝난 후, 마침내 야습이 결행되었다.
준비는 확실했으며, 앞사람을 따라 조심스럽게 오르는 진로도 큰 문제 없었다.
유일한 문제는, 가는 길에 시체가 너무 많아서 부딪칠 때마다 소리가 자꾸 났다는 것일까.
정확히 해 뜨는 시간에 맞춰서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언덕을 오른 아군은 이가 갈리는 적의 참호선을 드디어 넘었다!
거의 피해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기습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적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어두컴컴한 와중 지키는 이가 없는 비탈을 오르고 참호를 넘느라 2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공격 방향이 한 군데라 아군끼리 충돌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었다. 그런 일까지 벌어졌으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아무튼 간신히 엘랑키아에게 공격당하는 폴름스 본토로 통하는 길이 열렸는데···.
아직도 네프셀시엔 선제후의 본대는 본성 폴름스를 떠나지도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악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