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로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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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델베르크 공방전은 누가 봐도 끝나가고 있었다.
사실은 진작에 끝났어야 할 전투였지만, 엘랑키아 군이 소극적으로 나섰기에 지금까지 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전투의 주역은 누가 뭐래도 왕도 베르마유로부터 끌고 온 공성포들과, 각종 장비를 다루는 공성공병들이었다.
덕분에 엘랑키아 군은 시간과 화약을 병사들의 목숨 대신 지불하며 차근차근 성벽과 공간을 장악해나가고 있었다.
확실한 계획 덕택에 심지어 시간마저도 그렇게 길게는 지불하지 않으면서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무리해서 성벽을 오르다 대량의 사상자를 낼 수도 있는 일인데, 이렇게 착실하게 진행이 되니 엘랑키아 보병들은 신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국왕의 사촌 동생이라는 신분이면서도, 공병대를 이끄는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은 아마도 그 보병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지휘관일 것이다.
그는 국왕의 명에 따라 성전에 참전, 엘랑키아 북부에서 소집된 대군을 이끌고 이단토벌의 명목으로 블랑독을 쳤던 사령관이었다.
하지만 생뢰르반에서 크게 패배하여 철군한 이후, 오랫동안 공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칩거 기간을 허송세월만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 주디칼리의 델로나 대학에 유학하여 공학을 공부했던 에티엔 공작은 수비군의 시야를 계산하여 항상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하고 있었다.
철저한 ‘기술에 의한 공성’은 아직은 엘랑키아 군에게 익숙한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결과를 목도하고 있었다.
아마 며칠 내, 빠르면 오늘 밤에라도 공성용 푝발물인 페타드를 통한 성문 돌파가 성공한다면 단숨에 내성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으리라.
“이제 슬슬 적도 못 견딜 때가 된 것 같은데···.”
“성벽 말입니까, 공작님? 지금도 전혀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지금 이 남은 구역··· 적이 차지하고 있는 좁은 구역에 최소 2천 명이 넘는 적병과 주민들이 몰려 있을 것이라네.”
“아··· 그렇군요.”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은 지도에서 방금 함락한 구역을 아군 지역으로 표시하면서, 적이 가지고 있는 구역을 재확인한다.
마지막 남은 좁은 구역들은 명실상부한 요새의 핵심부였다. 분명 방어하기 좋은 곳이고, 억지로 공격하다가는 큰 피해를 입기 쉬운 곳이다.
어느 방향에서 접근해도 두 방향 이상에서 수비군의 사격에 노출될 것이다.
다만 특이한 점은 거기에 ‘살려서 보낸’ 적 수비병 대부분이 우글우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요새 내에 수비군이 많다’는 점은 공격자 입장에서 걱정스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요새가 가진 수비군 수용 능력을 아득히 초과한 숫자가 바글대고 있다면?
게다가 먹고 마시고 쉬어야 하는 것은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자리를 깔고 누울 장소도 부족할 것이다.
식량과 식수도 말도 못하게 부족하겠지. 성 내의 식량 창고는 이미 두 곳이나 점령했고, 우물도 한 곳을 빼면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을 뿐더러, 편히 쉬지도 못하는 병사가 잘 싸울 수 있을까?
에티엔은 솔직히 사촌 형님, 다고베르 2세의 전술에 감탄했다.
랄렌 강을 건너기도 전부터 세웠던 공성 계획은 큰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 덕에 엘랑키아 군은 거의 손해 없이 이 성을 손에 넣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전술 센스가 좋다거나, 기발한 방안을 생각해 낸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소한 일 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서, 로델베르크의 요새를 함락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다.
에티엔은 자신의 힘들었던 한 때, 생뢰르반 전투에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베르마유 왕궁으로 귀환해 자숙하던 때를 기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로델베르크 공성전의 준비는 바로 그 때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바로 국왕과 에티엔의 머리속에서 말이다.
얼마 후, 형님 폐하는 근신중인 자신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엘랑키아의 기사단은 대륙 최강이다.
그렇기에 사령관으로서 최강의 카드에 의존하고야 만다.
심혈을 기울여 키운 왕실 근위군조차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야전에서는 더 강한 적을 이기면서도, 요새나 험지에서의 싸움에 약해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네가 이걸 극복해 보거라.’
다고베르 2세의 생각은 이랬다. 블랑독의 트랑카벨 가문이 아무리 부유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실제로 병사도 말도 부족했다.
그걸 이 변경의 제후들은 ‘싸우는 방식’을 통해서 극복해냈다.
엘랑키아 왕실군은 이걸 배워야 한다. 국가의 체질이 다른 이상, 라솔의 방식도 그룬발트의 방식도 따라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한 지방인 블랑독이 해낸 일이라면, 엘랑키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 결론이었다.
그 후로 에티엔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는 한편, 생뢰르반 참전자들과 면담하며 자료를 정리했다.
그 다음은 법황의 성전군이 붕괴되는 과정을 조사했다.
아넥시라는 작은 요새 도시 주변에서 벌어진 대전투, 그리고 마르사코르에서 벌어진 마지막 결전에 대한 조사였다.
중간중간 왕실군의 지휘관과 참모들은 물론, 다고베르 2세 본인과도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당연했다.
결론은 ‘기술의 도입’이었다.
지휘관의 순간적 판단력이나 기사와 병사들의 무용 또한 중요하지만, 블랑독의 군대는 거기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뭐 예를 들자면 표준화되고 가벼운 야포, 체계화된 포대 배치와 같은 것들 말이다. 보병 전술의 경우도 보다 작은 단위의 철저한 훈련을 거친 것이 분명했고.
전통적인 엘랑키아의 강점인 강력한 기사단과 용감한 병사들에 그것들을 추가하자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고베르 2세가 아니었다면 전통적인 북부 엘랑키아 기사들의 반발이 있었겠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지지를 받는 국왕인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 정책의 연장선의 한 끝에 있는 것이 에티엔이 직접 편성, 지휘하는 엘랑키아 왕실 공병대의 창설이었고.
다른 한 끝에 있는 것이 블랑독과 트랑카벨 군대의 포섭이었다.
그리고 두가지 모두, 심지어 당사자끼리도 잘 모를 정도로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했다.
그 결과가 지금 잘 나온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에티엔의 공병대는 다리를 건설해 보급로를 지탱했고, 로델베르크도 빠르게 장악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트랑카벨 군대가 일부이긴 하지만, 국왕의 군대에 종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에티엔 공! 사령부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폐하의 전령입니다!”
“폐하께서? 무슨 일인가?”
“옛, ‘급한 일이 있으면 먼저 처리하고 오늘 내로만 사령부로 출석할 것’ 이라고 하십니다!”
“...가능한 빨리 가겠다고 전해드려라.”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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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공격을 미루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래.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너나 공병들에게는 미안하군.”
“아닙니다, 폐하. ‘그런 전투’ 라는 것은 저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설명까진 안 해도 되겠는데 이거?”
에티엔은 같은 진영에 머물면서도 대화를 나누는 것은 꽤 오랜만인 형님 폐하의 얼굴을 본다.
비록 아직 격렬한 단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최고 사령관인 다고베르 2세가 들어야 할 보고와 판단을 요구하는 사항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때문에 상당히 피곤해보이고, 살이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보였고, 서글서글한 눈동자는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떤 점에서는 평생의 목적인 그룬발트 침공을 하고 있는 중이니, 꿈을 이루고 있는 중이라고 하지 못할 것도 없으니까.
에티엔 자신이 말한 ‘그런 전투’라는 것은, 이 로델베르크 전투는 실제로는 로델베르크를 함락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함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과정일 뿐, 로델베르크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폴름스의 엘프 놈들, 이렇게까지 꽁꽁 숨어서 안 나올 줄은 몰랐군.”
“그만큼 신중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로델베르크를 공격하면서 일부러 늦장을 부린 이유는 당연히 적의 주력을 야전으로 끌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변경의 요새를 지키는 성주가 주군을 위해 최후까지 싸우는 것은 미덕이다.
반대로 주군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변경의 성주를 구원하러 가는 것 또한 미덕이다.
이 두 가지는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봉건 체계의 다른 많은 ‘규칙’들 처럼, 실체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었다.
에티엔은 굳이 주군이자 형님인 다고베르 2세에게 의도를 묻지 않는다.
아마도 폴름스의 선제후가 전방의 성채 도시를 구원하지 않고 버리는 매정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겠지.
구원을 기다리며 아우성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그룬발트 수비대를 연출하려는 것 일지도.
어차피 무엇이든 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속 로델베르크에서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적이 반응할 때 까지?”
“그건 아니지. 길어야 사흘, 그래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전장을 좀 더 동쪽으로 옮기는 것도 고려해 볼 생각이다.”
“그러시군요.”
“물론 그 전에 로델베르크는 함락해야겠지만.”
“언제라도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에티엔의 확고한 태도에, 다고베르 2세가 기쁜지 씨익 미소를 짓는다.
좀 더 동쪽으로 옮긴다는 것은 당연히 그룬발트 제국의 심장부로 진격한다는 것이겠지.
분명 그룬발트 제국에 타격을 입히는 행동이 되겠지만, 그만큼 엘랑키아 왕국이 감수해야 할 위험도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아까 남쪽에서 보고가 도착했네. 소식이야 알았지만, 상세한 보고서를 써서 보냈더군.”
“남쪽이요? 아··· 트랑카벨의 대리사령관이 이끄는 부대 말입니까?”
“맞아. 지금은 생뢰르반 군이지. 읽어보겠나?”
“그래도 되겠습니까?
대충 훑어봐도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된 보고서였다.
냉정하게 전투 진행 과정, 아군의 피해, 확인된 전과와 확인되지는 않았으나 추측되는 전과, 향후 기대되는 간접 전과까지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어느쪽이나, 로델베르크 전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각 군에 내려진 사령부의 기대를 한껏 웃도는 전과였다.
“적의 합류를 이틀에서 사흘 정도 늦춰주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아주 묵사발을 내놓았더군.”
“정말이군요··· 대단한 전과인데요? 과장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네가 보기에, 그 자는 전과를 부풀려 말하는 자인가?”
“아니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더 대단하군. 이럴 줄 알았으면 병력을 좀 더 딸려 보낼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네.”
팔짱을 끼고 그렇게 말하는 다고베르 2세의 얼굴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당연히 전술적으로도 큰 성과이다.
소수의 별동대로 2만에 가까운 이웃 선제후령의 지원군을 차단했다.
실질적으로 최소 3천에서 4천 정도의 적병을 쓰러뜨렸고, 적군을 무려 6일 동안이나 발을 묶었다.
기대치인 2일에서 3일의 무려 두 배나 되는 기간이었다.
그 뿐 아니라 생뢰르반 파견대는 거의 온전하게 전력을 유지하며 후위대의 아르밀 공작과 합류하기 위해 무사히 행군하고 있었다.
뭐 장기적으로 보면 전략적으로 의미는 퇴색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작은 격차가 모여 전쟁의 승리가 되는 법이다.
어쨌든, 다고베르 2세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다.
마치 정말로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선물로 받은 어린아이에 가까운 순수한 즐거움이라고 할까?
어떤 점에서는 다고베르 2세에게 전쟁은 가장 좋아하는 통치 활동이었으니까. 물론 형님 폐하가 전쟁광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다가올 미래의 전투가 기대되는군, 하하하하!”
“...얼마든지 모시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전쟁광일지도 모른다. 엘랑키아의 군주라는 위치를 잊을 정도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지만.
그를 보고 마주 웃는 에티엔 자신에게도 전쟁광의 영향이 조금은 있을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폐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들어오게!”
그때, 새로운 보고가 도착했다.
“폐하, 로델베르크의 성주가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항복에 대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