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9.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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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으쌰!”
“읏쌰아아!”
“좋아, 거기, 거기야! 완벽하다 조금만 더!”
“으쌰아아아!”
아직 서늘한 봄날씨지만,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남자들이 밧줄을 잡고 힘껏 당기자, 다리를 지탱하는 통나무 기둥이 올바른 자리를 찾아간다.
대기하고 있던 목공들이 서둘러 상판을 연결하고, 재빠르게 준비된 나무 못과 밧줄로 육중한 구조물들을 고정한다.
“좋아, 모두 수고했다. 잠시 휴식!”
“휴우우!”
“수고하셨습니다!”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의 명령으로 세워진 다리는 여전히 굳건히 세워져 있었다.
이미 적국 그룬발트 영내로 깊이 진격한 엘랑키아 군을 지탱하는 보급로로서 활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적지 않은 기병과 보병이 오가고, 보급품 수레와 가장 무거운 공성포열들이 건너다니다 보니 다리는 매일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다.
애초부터 영구히 유지하려 만든 다리도 아니었고, 제한된 재료로 기습적으로 뚝딱뚝딱 만든 다리니까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24시간 숙련된 공병들이 다리 위나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상황을 체크하고, 문제가 생기면 즉각 해결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선에서 사용될 각종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스무 대가 넘는 보급부대가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새로운 충격과 무게가 가해지자 얇은 널빤지로 된 상판이 쿵쾅거리며 흔들렸지만, 응급처치가 제대로 먹혔는지 고정은 단단하게 된 모양이다.
“자네 일을 꽤 잘 하는군! 그냥 농부 출신은 이런 거 잘 못하는데, 도시에서 일한 적 있나?”
“아뇨, 그건 아니지만 용병 시절에 진지 공사나 다리 공사는 한 적 있습니다.”
“허어, 좋은 걸 배웠구만?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겠군!”
“밥값은 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동료의 말에 야로스 발렌켄드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는 지금, 다리를 유지보수하는 엘랑키아 공병대를 돕는 인부로 일하고 있었다.
당연히 강제 징집이나 노예 노동도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이리 되긴 했지만 분명 원해서 하는 일이었다.
일이 좀 고되고 간혹 자다가도 불려 나오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식사는 잘 나오는 편이었고 일당도 적당히 받고 있었다.
그때, 관리소 천막 쪽에서 장교 한 명이 다가왔다.
“모두들 고생하고 있군. 이번에 동쪽에서 소식이 왔다네! 폐하의 군대는 여전히 로델베르크를 포위 공격하고 있고, 절반 이상 장악했다고 하는군.”
“오오, 전쟁이 끝나는 겁니까?”
“아니지, 로델베르크는 시작일 뿐이지! 그룬발트 선제후라는 놈은 성에 틀어박혀서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있으니 그 다음은 거기가 되지 않겠나?”
“그룬발트 선제후는 여자 엘프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글쎄! 그렇다면 제발 꼭 좀 보고 싶구만!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구경하러가야지!”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퍼진다. 엘랑키아 공병대는 엄연히 군사 조직이고 직위의 높낮이도 있지만 대체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간부를 맡고 있는 이들도 귀족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모두가 공학자들이었고,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외국 출신이 많다보니 생기는 일 같았다.
힘을 쓰고 무거운 것을 다루는 일이니, 누군가 실수하면 다른 누군가가 다친다는 것은 전투나 다름 없으니 지켜야 할 규칙은 엄격하지만, 그 선을 넘지 않으면 대체로 쉽게 어울리는 편이었다.
덕분에 신입인 야로스도 특별한 괴롭힘 없이 함께 일하고 있었고.
“그리고 승전 소식이 몇 개 더 있네. 북쪽으로 향한 군대는 북해에 면한 해안 지대를 파괴하고 눌른준트라는 도시를 함락했다고 하는군.”
“오오오오오!”
“남쪽으로 향한 군대도 있는데, 좁은 산길에 매복했다가 그룬발트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준 모양이야. 그룬발트 놈들이 다섯 배는 됐는데도 말이지.”
“와아··· 이러다 전쟁이 끝나 버리겠는데요? 어떻게 이긴 겁니까?”
“글쎄··· 아무튼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우리 엘랑키아 군이 전쟁터에서 떠나고 사흘이 지나서야 겨우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하네.”
이어지는 승전 소식에, 공병들도 흥분한 모양이다.
“그룬발트 놈들이 어지간히 쫄았나 보군요! 엘랑키아 기사들은 그룬발트 놈들이 두 배쯤 많아도 상관없이 뚫고 지나간다고 하던데요?”
“아아, 남쪽에서 이긴 부대는 기사분들이 아니고, 남쪽에서 온 용병인지··· 아무튼 보병 부대라고 하더구만. 산길을 지키면서 그룬발트 놈들 혼을 쏙 빼 놓은 거지.”
“오오··· 그렇게도 되나요?”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후방에 머물고 있지만, 승전보에 흥분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두둑한 보상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로델베르크에 공성공병을 한 부대 더 보내기로 했다네. 오늘 저녁에 명단을 공개할 생각이지만, 혹시 지원자 있다면 알려주게. 기왕이면 하고 싶은 사람이 가면 좋지.”
공성공병은 각종 공성병기, 특히 화약을 다루는 페타드 등 다양한 병기를 운용하는 인력이다. 위험하지만 그만큼 보상을 받기 좋았다.
젊고 야심 넘치는 젊은 공병 몇의 눈이 빛나는 것을 야로스는 놓치지 않았다.
무턱대고 슈토르히 연대에 지원하던 시절, 자신의 눈도 저랬으려나?
그가 뜬금없이 엘랑키아 공병대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는 것은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지름길이라 생각해서 랄렌 강을 따라 엘랑키아로 돌아가는 배를 탔던 게 화근이었다.
그게 밀수선이라 사공들은 미리 도망쳐 버리고, 애꿎게도 야로스를 비롯한 머저리 승객들만 붙잡혀 조사 받았다.
특별히 고문을 당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비참한 경험이었다. 얼마 안되는 재산은 또 몰수당하고, 형편없는 밥을 먹으며 조사당하는 매일이었다.
어찌하여 자기 인생은 이렇게까지 꼬였나, 야로스는 하루도 눈물 없이 잠에 든 적이 없었다.
“아, 거기 새로 온 친구? 야로스라고 했나?”
“예? 저 말씀이십니까?”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밀수범과 각종 좀도둑들로 가득한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 계기는 엉뚱했다.
일관되게 ‘슈토르히 용병단의 콘도티에레가 지휘하는 부대를 찾아가려고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나가던 공병 장교가 들었기 때문이다.
공병총감인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의 휘하에서 근무했던 이 공병 장교가 어렴풋이 상관에게 들었던 몇몇 고유명사를 기억해낸 것이다.
그 장교가 지금 전황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사람 좋게 생긴 건축가 출신 장교이다.
다만 명확하게 누가 어디에서 종군하고 있는지, 어느 부대가 어디에 배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공병들의 작업을 돕고 있다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 자네도 함께 가지. 그러면 그 찾고 있는 동료 용병인가 하는 부대를 만날 수 있겠지.”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됐네!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 전쟁통까지 찾아온 게 아니던가?”
“하하···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주변에서 축하해주는 동료들의 말에 웃으며 감사를 표하기는 했지만···.
야로스는 내심 별로 슈토르히의 동료들을 만나러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인생을 찾고 정착하겠다며, 나우데사에서 제대하고 떠났다가 알거지가 돼서 돌아가다니··· 대체 무슨 얼굴로 예전 동료들을 본단 말인가.
심지어 다시 만난다고 해도, 뭘 하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뭐 다시 슈토르히에 입대하고 싶다고 해도, 받아 줄런지도 의문이지만서도.
정말 나우데사에 정착하겠다고 제대한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멍청한 판단을 한자신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고 싶었다.
이소브론 대공의 호위대에 입대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 부터가···.
원치도 않았던 주테르베이크 연대장이 된 것도 코미디였지만, 순식간에 매국노로 전락하면서 모든 걸 잃어버렸다.
갑자기 얻었던 벼락 출세 자리를 잃어버린 거야 그렇다 치자.
그래도 목숨 걸고 용병생활을 하면서 알뜰하게 모은 쥐꼬리만한 재산까지 몰수당한 것은 이가 갈리도록 열 받는 일이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라는 자포자기에 빠진 것도 당연했다.
그에 비해서, 최근 익숙해진 다리 유지보수하는 인부 일은 보람있고 좋았다.
애초에 뭐랄까··· 다른 이유를 댔을 뿐이지, 사실은 그다지 전쟁터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우데사 내전 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본질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쪽을 겨눈 적의 총구를 향해 걸어갈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라거나, 쏟아지는 동료들의 피와 신체 일부를 비처럼 맞으며 거점을 사수하는 느낌이라거나···.
결코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돈을 제법 많이 벌기는 하는데, 많이 벌면 뭐 하나. 그러다 죽어버리면 한순간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전투가 끝나면 도박이나 주색잡기에 돈을 전부 탕진하던 일부 동료 용병들이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먹는 거 입는 거 아껴가면서 모았던 돈을 홀라당 나우데사 의회가 몰수해 갔으니까!
빌어먹을 놈들, 만약에 나우데사를 침공하는 군대가 있으면 거기 종군하고 싶을 정도로 원한이 가득하지만···.
그래도 이제 전쟁은 싫었다.
여기도 전쟁 후방이라고는 하지만, 엘랑키아가 된통 당하기 전에는 전장이 될 위험은 적었다.
뭐, 호화롭지는 않아도 밥도 잘 나오고, 일은 힘들지만 일당도 나쁘지 않았고, 특식으로 배급되는 엘랑키아 포도주도 먹을만 했다.
가능하면 그냥 여기서 좀 상처입은 마음도 치료하면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애초에 한 말이 있으니··· 사실 슈토르힌지 뭔지 사실 알 바 아니고 그냥 여기서 다리나 고치면서 지내면 안 되냐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었다.
“좋아, 오늘 밤에는 내일 떠나는 친구들과, 야로스 군의 앞길을 축복하며 한 잔 하도록 하지. 특식을 배급하겠네!”
“와아아아아!”
“친구들 꼭 만나길 바랄게!”
무수한 축하 세례에 그저 웃고만 있는 야로스 발렌켄드는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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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과과광!
같은 시각,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직접 이끄는 친정군이 포위 공격중인 로델베르크는 또 하나의 성벽을 잃어가고 있었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조심하라고?”
“으아아아아악!”
오랜 포격으로 이미 구조가 약해져 있던 성벽은, 공성공병대가 밤새 땅을 파 묻어두었던 화약이 폭발하자 견디지 못하고 쏟아지듯 무너져 버렸다.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뒤섞여 무너지는 가운데, 불운한 그룬발트 수비병 몇 명이 고장난 인형처럼 휩쓸려 내동댕이쳐진다.
돌가루와 흙먼지가 화약연기 이상으로 뿌옇게 시야를 가리다가 가라앉은 후, 성벽에는 폭 5미터 정도의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자, 전진! 무너진 성벽을 ‘접수’한다!”
그 틈으로 지켜보던 엘랑키아 보병들이 나아가기 시작한다. 느릿느릿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돌더미를 넘는다.
하지만 저항하는 수비군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부상을 입거나, 혼이 나가 우왕좌왕하다가 포로로 잡히는 소수가 있을 뿐.
대다수는 더 안쪽 구역으로 통하는 쪽문을 통해 빠져나가기 위해 우루루 달려가고 있었다.
만약에 억지로 그 뒤를 추격하기 위해 따라붙으면 충분히 따라붙을 수 있는 거리였다.
만약에 그런다면 내성 수비대는 백병전을 각오하고 성문을 지키거나, 냉혹하게 동료들을 적지에 두고 문을 잠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엘랑키아 군은 굳이 추격하지 않았고, 앞장선 소수가 적을 몰아대듯 총을 쏠 뿐이었다.
덕택에 눈 먼 총알에 맞아 죽은, 정말 운이 나쁜 소수를 제외하면 수비군은 대체로 아직 안전한 내성 쪽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거대한 고대 요새, 로델베르크 성의 무수히 많은 내부 성벽과 망루로 구분지어진 구역들 중 70퍼센트 정도가 이미 엘랑키아 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동안의 공방전은 한결같았다.
공격측인 엘랑키아 군이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성문을 뚫어 공격하게 되면, 수비측인 그룬발트 군은 더 안쪽으로 퇴각해 문을 걸어 잠근다.
그럼 엘랑키아 군은 다음 구역에 대해 또 같은 공격을 반복한다. 돌파에 성공하면, 그룬발트 군 역시 똑같은 후퇴를 반복하는 식이었다.
“모두 수고했다. 페타드 공격은 오늘 밤, 해가 지면 시작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모두 지형을 익혀두도록!”
공병대를 지휘하고 있는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은 지도를 펼치고 공병 장교들과 둘러선다.
이미 함락한 구역에 X표시를 한다. 이제 적에게 남은 것은 전체 성의 규모를 생각하면 손바닥만한 중심부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