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21화 (421/556)

42-18.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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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좀 챙기시죠! 당신네 브라우나인 가문의 소중한 후계자분이 아닙니까?”

“아, 알았소.”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령관으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전장을 살피러 나오는 건 훌륭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말렸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알았다고 하지 않았소···.”

호위대와 지휘 막사를 지나 한참 후방으로 이동한 후에야,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브라우나인의 참모진을 비난했다.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엘프들인 그들은 갑작스러운 비난에 화가 난 듯 했으나 면목이 없는 듯 시무룩한 표정을 지을 뿐 강하게 반발하지는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칫하면 그들이 모시고 있는 후계자 세두시온 공이 죽을 뻔 했기 때문이다.

적은 명백하게 장거리에서 포격으로 멀리서도 잘 보일 지휘부를 노리고 있었으며, 불과 2미터 정도 차이로 사령관을 빗겨나갔다.

지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세두시온의 값비싸보이는 하늘비단 망토에 튄 피는 측근 데르네스의 피이다.

엘프들의 권력관계는 몰라도, 미클라크가 보기에도 꽤나 지위가 높아 보이던 데르네스는 전조도 없이 날아온 단 한 발의 포탄에 몸이 두쪽 나고 말았다.

겨우 몇 미터 차이로 그게 세두시온도, 미클라크 본인도 될 수 있었다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해진다.

데르네스와는 심하게 말다툼도 했었고, 역겨운 녀석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군 지휘부’인데··· 충격적인 일이었다.

“데르네스 경이··· 그렇게 되다니···.”

세두시온 공이 신뢰하던 참모인지, 측근의 죽음에 정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빨리 정신차리지 않으면 데르네스 경 뿐 아니라 남은 병력까지 깡그리 말아먹게 생겼습니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어서 전군의 통제를 되찾아야 합니다. 대기중인 예비대도 소집하시고 만약에라도 언덕 아래까지 밀리진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알겠소, 그렇게 하겠소.”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세두시온 공과 후방을 부탁드립니다!”

미클라크는 당부의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 전선으로 돌아간다.

마음같아서는 멍청한 놈들이라고 쌍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아군, 어쨌거나 1만을 훌쩍 넘는 대병력을 이끌고 도와주러 온 이웃한 동맹이다.

정말 얼굴도 마주하기 싫을 정도로 싫지만, 어서 통제를 되찾아 주도권을 이어가 주기를 바란다.

휘하 병력, 폴름스 남부의 병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개인적인 혐오와 분노 정도야 얼마든지 숨길 수 있으니까.

“와아아아아!”

“자리를 벗어나지 마라!”

“대열을 유지해!”

전장의 소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늘을 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중간에 잠시 있었던 소강상태를 제외하면, 정말 오늘은 하루 종일 싸우고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이 교전이 아무리 되면, 더 싸우고 싶어도 어두워져서 싸우기가 힘들게 되리라.

전선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병력을 후퇴시키고 교전을 회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심 기대하는 것도 없지 않았다. 만약 적이 무질서하게 눈 앞의 승리에 취해 언덕 아래까지 공격해 왔다면?

수적으로 압도적인 이쪽의 예비대를 무작정 투입해 역으로 포위, 분위기 반전을 이끌 수 있으리라.

그게 전선은 물론 전투에 나선 병력의 절반 이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현재 기대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상황이었다.

그런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머리속으로 그리며, 미클라크는 서둘러 전장이 보이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야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끄아악! 도망쳐!”

“멈춰! 막아라!”

지금은 비어있는 지휘천막을 지나자 후끈한 전장의 열기가 느껴진다.

수천의 병력들이 서로 죽고 죽이려고 기를 쓰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목 뒤가 찌릿하게 소름이 돋을 정도니까.

미클라크 역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조금 다른 종류의 소름이었다.

“빌어먹을! 이거 망했구만!”

절로 우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적의 초장거리 포격에 데르네스 경을 잃고 정신이 나가버린 세두시온을 끌고 잠시 후방으로 빠진 사이였다.

사령부 바로 정면에 브라우나인이 자랑하는 포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아니··· 지금은 있었었다라고 말해야 하는지···.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반평생을 전장에서 두 다리로 싸웠던 용병 출신이다. 이 정도 뛰어다녔다고 힘이 풀릴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다리가 떨리는 것은 심리적 요인일 것이다.

세두시온 공이 후방으로 대피하면서 사령부 앞을 지키고 있던 직할 호위대도 함께 물러섰다. 당연한 일이었고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다.

···문제는 그들이 맡은 역할은 세두시온을 비롯한 사령부의 호위 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소 후방이긴 했지만, 언덕 위를 노리며 포탄을 쏘아 보내는 포병대를 지키는 역할 또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키는 이들이 아무도 없어진 포병대를 걱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전선이 언덕 중턱 아래까지 밀린 상태일 지라도 말이다.

당연히, 아군 사령부의 정면일 정도로 후방이고 안전한 곳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적 기병들이 여기까지 내려와서 포병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인가!

분하고 답답해서 피라도 토할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안됩니다, 대장님!”

무심코 권총을 뽑아든 미클라크를 호위병들이 막는다. 몇 명 안되는 호위병들이 나서 백 명은 족히 되는 기병들에게 덤벼봤자 개죽음은 당연하다.

게다가 나름 일군의 수장이 목숨을 걸어야 하며, 그런다고 기병대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수십 미터 정도 거리에서, 일사불란하게 브라우나인 포병대를 무력화시키고 있는 엘랑키아 기병들을 지켜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저들이 미클라크가 지휘관급의 먹음직스러운 표적이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된다 느꼈는지, 경험 많은 용병들인 호위병들은 미클라크를 몸으로 가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랑키아 기병들은 포병대 무력화에 정신이 없었다.

그들을 막았어야 할, 아니 ‘보호받았어야 할’ 브라우나인 포병들은 어디론가 도망쳤거나, 대포 옆에 쓰러져 죽어있었다.

“모두 서둘러라! 포에 깔리지 않게 주의하고!”

“못 남은거 있나? 못 남은 거!”

“여기! 여기있습니다! 망치도 드립니까?”

분명 전투에 익숙하고, 특히나 포병 무력화라는 특이 상황에서도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훌륭한 경기병대였다.

점화구에 나무 못을 박아 넣거나, 충분히 들어가지 않았다면 입구 부근에서 부러뜨린다. 이러면 재장전을 하더라도 점화를 할 수 없어 포가 무력화 된다.

몇 명은 도끼를 휘둘러 포가의 바퀴살을 부순다. 바퀴를 완전히 부숴 망가뜨릴 필요도 없다.

연달아 몇 개 정도만 부숴도 포격시의 반동을 이기지 못해 얼마 쏘지 못하고 주저 앉을 테니까.

그런가 하면, 몇 명은 알뜰하게도 포탄이 쌓인 나무 상자를 뒤집고 화약통을 엎어 버린다.

크고 작은 구형 포탄이 무익하게 데구르르 굴러가고 소중한 검은 화약이 흙바닥에 쏟아진다.

포를 식히고 포신 내부를 닦아내는 데 필수적인 물이 담긴 통을 엎어버리는 건 포대를 무력화시키는 아주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이 모든 꼼꼼한 분탕질이 저질러지는 데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기병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받았고 통제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이 포대에서 행한 파괴 행동들은, 복구하려면 복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근본적으로 포를 못쓰게 만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며칠, 최소한 오늘 하루는 절대로 복구할 수 없는 피해이리라.

한두 가지면 몰라도, 이렇게나 꼼꼼하게 작살을 냈다는 것은 분명 포병대가 움직이는 방식에 대해서 잘 알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보통 지체 높은 기사들은 이런 행동을 천하다 여겨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부러 포구 무력화용 나무 못 까지 챙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절반 정도 내려 빠르게 20여 문의 포대를 꼼꼼하게 무력화 시키더니, 다시 빠르게 말에 오른다.

“모두 마지막까지 주변을 챙겨라!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소년의 목소리처럼 날카로운 명령과 함께, 기병대는 빠르게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한다.

팍! 파파팍!

어찌나 꼼꼼했는지, 바닥에 뿌려진 화약에 불씨를 던져 여기저기서 얕게 뿌려진 화약이 타오르는 소리까지 들린다.

무리하게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는 등, 사고 위험이 있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점이 확실하게 훈련받은 조직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만약 전문적인 포병에 대한 지식 없이, 마음만이 앞서는 부대였다면 무리해서 불을 붙이려다가 괜히 불필요한 희생까지 발생할 수 있으니까.

빌어먹을··· 쌍욕이 나올 정도로 철저한 개자식들이었다.

그룬발트의 기병대들은 이렇게나 철저하게, 효율적으로 포병대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부대가 얼마나 될까.

저쪽 사령관은 이런 혼전의 와중, 철저하게 훈련받은 경기병대를 내보내 고립된 포병대를 망가뜨리고 돌아갈 정도로 용의주도한 인물이다.

그에 비해서··· 이쪽 사령관은 그 염병할 귀만 큰 세두시온이다.

머저리 같은 놈, 머저리 같은 놈! 미클라크가 하는 욕설의 절반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자기가 뭐라고, 그냥 세두시온은 측근들에게 맡겨 안전한 곳으로 빠지게 하고, 자신은 방어선을 마저 지휘했어야 하는 것인데.

무력감에 힘이 빠진다. 방금 빠른 속도로 무력화되는 대포들을 보고 아무 행동도 못한 무력감에, 훨씬 우세한 병력으로도 이 꼴을 막지 못한 무력감이 더해진다.

“아니 그런데! 저 자식들은 어떻게 언덕을 돌파해 여기까지 온 거지?”

“우측부터 비스듬히 전선이 밀려 내려와 있습니다··· 저 틈으로 기병들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중앙부가 완전히 뚫려 버렸습니다.”

“하아···.”

오랫동안 전장에서 함께해온 호위의 말대로였다.

저 기병대는 단순히 포병대를 공격하기 위해 뚫고 들어온 결사대가 아니었다.

우측의 아군이 심하게 밀리면서 발생한 아군 대열 사이의 커다란 간극, 그 사이로 측면 공격을 강해 중앙의 아군을 밀어내는게 우선 목적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측면이 노출된 중앙 부대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몇몇 부대는 그대로 붕괴되어 사방으로 도망친 것 같다.

흩어져서 어쩔 줄 몰라하는 병사들을 보니 그렇다.

중앙이 뻥 뚫려버린 사이, 유유히 들어와 포병대를 박살나고, 온 길로 돌아간다.

그걸 지켜보고만 있는 폴름스와 브라우나인의 보병대를 보고 있으니 분통이 터졌지만,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원래 전선에서 보병 부대는 그런 것이다. 섯부르게 밀집 대열을 풀었다가는 몇 안되는 기병에게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다.

하물며 언덕 공격을 위해 얇은 카드 형태로 배치했던 것은 세두시온 공,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던가.

야전에서 1~2개 중대 정도의 기병대가 연대급 부대를 맴돌며 도발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데 넘어가지 않고 굳건히 버티는 것이 보병의 미덕이기도 하다.

오히려 소수 기병대에 정신이 팔려 쉽게 대열을 풀거나, 부대 일부를 외부로 파견하면 그게 문제다. 더 중요한 전선 유지를 못하게 되니까.

···그런데 그 소수의 기병대가 무방비한 후방 포병대를 덮치리라고는 생각 못했겠지.

그리고 포병대가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으리라고는 전방의 보병 지휘관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겠지.

시간도 불과 몇 분. 뒤늦게 심각해진 상황을 확인해봤자 소용 없었다. 브라우나인 포병대가 입은 피해는 한동안은 복구 불가능한 것이다.

어쨌거나 더 이상 방관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었다.

“부대로 돌아간다! 너희 둘은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부대는 움직이지 말고 제2 방어선을 만들라고 전달해라!”

“예, 대장님.”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 남은 병력이라도 챙겨야 했다.

아니, 살리기라도 해야 했다.

최소한 해가 질 때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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