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6.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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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야, 너는 언젠가 저 성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어린 다를 쿠에상을 강변에 데리고 나가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남쪽의 탐욕스러운 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강을 건너 저 흉물스러운 성채를 지었다.’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증오스러운 눈으로 그 성벽을 올려다 보고는 했다.
저 성벽 안에 도사린 탐욕스러운 일족은 외할아버지의 친척들을, 이웃들을 무참하게 죽였다고 한다.
그 성이 어디인지, 거기에서 사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어린 시절 막연하게 그 회색 성벽을 미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성은 다름아닌 벨모제, 트랑카벨 가문의 자작령 중 로데브 강 이북에 있는 장대한 성채였다.
데릴사이로 들어와 쿠에상 가문을 이은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벨모제 성의 트랑카벨 가문과 계약을 맺고 물건을 내다 팔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다를은 그런 아버지가 싫었던 적도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따라 벨모제 성내에 다니게 되었다.
거기에서 공부했고, 거기에서 일을 얻었으며, 어느새 자연스럽게 벨모제의 성주 마슈레 가문을 섬기는 가신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대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는 잘은 모른다.
하지만 현 당주 아롱드 트랑카벨이 통치하는 벨모제에 적대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재산이라고는 척박한 땅덩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블랑독 중부의 소지주 따위가 대항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거니와.
벨모제 성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손자에게 이야기 하던 외할아버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손자는 지금 벨모제를 지키는 연대장이 되었다.
대신 쿠에상 가문은 몇 배로 번창했다. 그의 형제들은 다들 벨모제 인근에서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자식과 조카들도 마찬가지였다.
트랑카벨 가문이, 벨모제가 그의 가족에게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타탕! 탕! 타타탕!
그것만으로도 다를 쿠에상이, 그리고 조카들이 주군 트랑카벨 자작가를 섬기며 종군할 이유로는 충분했다.
“콘도티에레께 전령은 보냈나?”
“옛, 연대장님!”
“좋아!”
엘랑키아 왕국이 어찌 되든, 어쩌고 2세라는 국왕 폐하가 무엇을 원하든 아무 상관 없었다.
“중대장, 주목!”
“옛!”
다를 쿠에상이 이역만리 그룬발트에서 싸우는 이유는 오직 트랑카벨 가문을 섬기고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니까.
“돌격은 좌측의 3개 중대로 실행한다! 감사하게도 드 레뮤즈도 후속해서 2개 중대를 보내주시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방식은 설명한 대로, 문이 열리듯 우측의 6중대가 축이 되어, 나머지가 일제히 적을 몰아낸다! 각자 중대로!”
명령을 들은 세 중대장이 방어선 뒤편을 지나 자기 부대로 돌아간다.
“타르올 경, 선봉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맡겨주십시오, 다를 경. 저의 주군 드 몽파르지에 공작의 이름으로, 돌파구를 열어 보이겠습니다.”
“맡기겠습니다. 우리 제18 연대 병사들을 부탁합니다.”
콘도티에레는 갑작스러운 자신의 요청을 허락해 주었을 뿐 아니라, 든든한 지원군까지 보내주었다.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 주었는데 하는 수 밖에.
그리고 지금, 딱 그가 바라던 상황이 오고 있었다.
가뜩이나 적극적이지 못하고, 마지 못해 싸우던 눈치의 적군의 마음이 이제 산산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자기 편 한 가운데에 잘못 떨어진 포탄 한 발이 만든 파문이 공포와 불안, 그리고 패배감이라는 감정을 적진 구석구석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 결과로, 적은 더 이상 적극적으로 참호선 앞의 흙더미를 넘으려 들지 않는다. 불과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서 말이다.
원래 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감정은 전염병보다도 빠르게 옮아가는 법이다.
트랑카벨 가문의 영토 중, 가장 다양한 인간 군상이 오가는 관문 도시인 벨모제에서 오래 근무한 다를에게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날 것의 감정을 드러내는 전쟁터인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적과 교전하며 느꼈던, 적병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 속의 응어리.
지금 그것이 깨져 나간 것이다.
“돌격 나팔을 불어라!”
날카롭고도 웅장한 돌격 신호가 참호선을 따라 울려 퍼졌다.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의 나팔수로서는 처음 불어 보는 돌격 신호이다.
바로 이어서···.
“트랑카벨을 위하여! 돌격 앞으로!”
다를 쿠에상 연대장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나팔소리보다도 크게 울려퍼졌다.
“돌격 앞으로오!”
“으아아아아! 트랑카베엘!”
“이야아아아아!”
이미 오랜 전투로 지쳤으나, 중대장의 설명을 듣고 사기가 충천한 상태였던 트랑카벨 보병들이 지금껏 지키기만 했던 참호를 타 넘는다.
블랑독 전체에 큰 위기였던 성전 내내,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는 대부분의 기간을 로데브 강 이남에서 보냈다.
그렇게 얻은 건 방어선 공사 하나는 끝내주게 한다는 평판이었고.
그 병사들이 자신이 쌓아 두었던 참호 벽을 타고 넘는다.
“우와아아아아아!”
“뭐, 뭐야, 미친 새끼들 아냐?”
“막아! 막으라고! 도망치지 마!”
갑자기 방어선 너머의 트랑카벨 군의 분위기가 확 바뀌자 설마 하던 그룬발트 군은 당황한다.
우리가 공격하는 쪽 아니었나? 우리가 수적으로 유리한 것 아니었어?
그리고 무엇보다 상황이 나빴던 것은.
병사들 마음 속에 ‘이제 후퇴해서 다음 차례 아군과 교대한다’는 생각이 막 생겨나던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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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압!”
“컥!”
타르올 드 매믈랭,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를 섬기는 젊은 기사는 엉겁결에 창을 들어 방어하는 그룬발트 보병을 그대로 검으로 내리쳤다.
모범적인 양손 내려 베기 공격은 그대로 창대를 깨끗하게 자르고 어깨에 박혔다. 투구를 노렸다면 튕겨 나갔을 수도 있었으니까.
빗장뼈와 함께 중요한 혈관이 잘렸는지 무서울 정도로 피가 뿜어져 나와 타르올의 얼굴에도 튄다.
이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면 숨통을 끊을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 비명 지르는 적병을 밀치고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분명 적은 언덕을 공격하기 위한 밀집 대형을 취하고 있었을 텐데, 어느새 다음 열의 적은 몇 걸음이나 물러선 상태였다.
적들은 모여서서 이쪽으로 무기를 겨누고는 있으나, 공포에 질린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전술적 목적으로 대열을 갖춘 게 아니다. 마치 약한 짐승이 불안하여 무리를 짓듯, 본능적으로 모였을 뿐인 무리.
이건 완전히 등을 돌려 도망치지만 않았다 뿐이지, 적 대열은 이제 부대로서의 역할을 못 한다.
나이가 많지는 않아도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하며 나름 전황을 보는 눈을 길렀던 기사 타르올에게 상황은 너무도 명확했다.
다음 상대를 노리기 위해 검을 노리고 전진하려는 데, 누군가가 그를 앞질러 간다.
“이야아아!”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간 트랑카벨 병사가 상하로 마구 휘두르는 것은 다름 아닌 부러진 창대였다.
저기 맞는다고 죽지야 않겠지. 하지만 죽을 만큼 아플 테고, 어쩌면 골절 등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 기세에 눌린 그룬발트 보병이 몇 번 막아내더니, 발을 잘못 딛고는 그대로 뒤로 굴러 떨어진다.
이곳은 비탈, 게다가 여기저기 시체들이 널려 있어 뒷걸음 치기에 결코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어쩌면 이게 맞는 전술일지도 모른다. 정면의 적 한 명 한 명을 쓰러뜨리려 하는 대신, 집단의 힘으로 집단을 밀어 언덕 아래로 쫓아 버린다.
“트랑카벨! 벨모제에!”
“우와아아아!”
이기고 있다는 감각, 그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한다는 충실감은 어떤 피로나 공포도 잊게 한다. 지금 트랑카벨 보병들은 그런 ‘열광’에 빠져 마구 돌격한다.
어떤 대단한 싸움법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저 기세에 몸을 맡기고, 손에 쥔 것은 무엇이든 무기 삼아 휘두른다.
방금처럼 부러진 창대로 적을 후려치는가 하면, 육중한 둔기가 되는 화승총은 양반이고, 참호 파는 데 썼던 괭이 또한 훌륭한 무기의 반열에 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그 괭이는 지금 처음으로 무기로 쓰이는 것이 아닌지, 날 부분에 찐득찐득한 피와 연갈색 머리카락이 한움큼 붙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 더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퍼렇게 날 선 기사의 검 보다 핏덩이와 머리카락이 붙은 뭉툭한 괭이 날이 말이다.
실제로도 착실하게 전과를 쌓아 가고 있는 모양이고.
“으아아아아! 죽어라!”
남달리 요란한 기합소리가 들린다 싶었더니, 다름아닌 다를 연대장 본인이 그룬발트 장교를 마구 몰아 붙이고 있었다.
상대는 간신히 막고는 있으나, 힘과 기세에 몰려 계속 물러날 뿐이었다.
다소 뚱뚱한 풍채 때문에 그럴 줄은 몰랐지만, 다를 연대장의 검술은 동작이 작으면서도 매우 빠른 실전적인 형태였다.
게다가 덩치 차이에서 오는 힘 차이까지 있으니 상대가 기겁을 하고 방어만 하는 것도 당연하다.
“전진! 전진!”
“멈추지 마!”
“연대장님을 따르라아!”
자기 생각이 틀렸다. 타르올과 드 몽파르지에의 기사들이 돌격을 이끌게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말이다.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는 자체적으로도 충분히 강하고 용감했다. 그들이 만들어 낸 파도가 그룬발트 군을 언덕으로 부터 쓸어 내리고 있었다.
이끌지는 못하더라도 뒤쳐질 수는 없었다. 타르올 자신도 그 파도에 섞이기 위해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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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내 이럴 줄 알았다!”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달려 내려가며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도 모를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지금 그의 부하 연대는 대열을 갖추고 천천히 물러서고 있었고.
마음 같아서는 최대한 빨리 언덕을 내려와 안전한 곳에 집결하라고 하고 싶었다. 더 이상 이런 빌어먹을 전장에서 한 명도 더 잃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지금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는 브라우나인 보병들이 끝장이 날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어쨌거나 같이 싸워야 할 동맹군이다. 최대한 살려서 돌려 보내야 재도전을 하든가 말든가 할 테니까.
세두시온 공! 세두시온 공!”
아무튼 그건 그렇고, 지금은 빨리 ‘패배’를 준비해야 했다. 잘 이기는 것도 힘들지만, 잘 지는 건 더 어려우니까 말이다.
저 멀리 화사한 옷을 입은 엘프 무리가 보인다. 특히 한 가운데 넉넉하고 격식있는 하얀 옷을 입은 것은 지금 그가 찾고 있는 이가 분명하다.
하늘 비단인지 구름 비단인지, 빌어먹게 비싸다는 옷이 저녁 해를 받고 한층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세두시온 공,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언덕 아래까지 다가온 이 전투의 사령관, 세두시온 공은 아까의 냉엄함이나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이··· 이게? 어, 어째서!”
엘프 특유의 단정하고 하얀 얼굴에는 핏기가 완전히 빠져 나가고 대신 경악만이 남아있다.
“어째서 무너진 것인가? 지금 언덕 위에 있는 아군 병력만 해도··· 적을 압도하는 수가 아닌가?”
“세두시온 공, 이제 승리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퇴각해오는 아군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적이 행여나 기세를 타고 비탈을 장악하게 두면 안됩니다!”
“안 된다! 이 몸은 폴름스 구원의 명을 받고 브라우나인의 대군을 이끌고 있다! 이 정도 열세 쯤···.”
“빌어먹을, 대체 뭐 하는 거요 진짜!”
결국 미클라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또 한번 고함을 지른다. 이미 감정이 흔들릴대로 흔들린 세두시온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무엄하다! 이 무슨 망발···.”
대신, 옆에서 다른 측근 엘프가 나서 고함을 지른다. 아까 폴름스의 보병들을 뒤에서 쏘고 나서 합당한 전술 어쩌고 했던 그 녀석이다.
“무엄하긴 옘병, 그럴 거면 이기던가! 그 소중한 브라우나인의 대군 여기서 전멸시킬거요 당신들!”
“브라우나··· 억!”
퍽, 콰드득.
순간, 미클라크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잠시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상한 소음이 나고, 뜨거운 액체가 뿌려지나 싶더니···.
눈 앞에서 눈을 부라리던 측근 엘프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으, 으아아! 데르네스 경? 데르네스 경!”
“데르네스 경!”
애써 침착을 가장하고 있던 다른 엘프 참모들이 고함을 지른다.
데르네스? 그 기분 나쁜 엘프의 이름인가? 미클라크는 잠이 부족해 따끔거리는 눈을 잠시 감았다 뜬다.
자신이 잘못 보았다. 눈을 부라리던 데르네스라는 이름의 엘프는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일부’만 사라진 것이다.
왜냐하면 방금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상체의 일부가 기괴하게 뜯겨 나간 나머지 시체가 파들거리며 피를 뿜어내 격식 차린 복장을 붉게 적시고 있었으니까.
마치 눈길 만으로 인간을 찢어 버리는 기프트를 가졌다던, 신화 속의 악귀가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 것은 미클라크가 누구보다 잘 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세두시온의 팔목을 붙잡고 달린다.
“포격이다! 세두시온 공을 후방으로 모셔라!”
실책이다. 언덕 바로 아래니, 얼마든지 적에게 노려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밉살스러운 상대지만, 그룬발트의 군인으로서 이 전투의 사령관이자 이웃 가문의 차기 선제후를 적에게 내 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