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4.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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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뒈져! 뒈지라고!”
“뒈지긴 뭘 뒈져 이 새끼야!”
“커으윽!”
흙더미 위에 올라서서 참호 안쪽으로 마구 창질을 하던 그룬발트 보병이, 납작 엎드린 채로 접근한 엘랑키아 총병의 단검이 허벅지에 박히자 비명을 지르며 넘어진다.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가 이틀에 걸쳐 준비한 참호 방어선은, 맨 땅에 사람이 들어갈 깊은 구덩이를 만든 형태는 아니다.
오히려 소대급 병력이 얕은 전열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다는 데서, 오히려 성을 지키는 해자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거기서 나온 흙은 앞에 쌓아서 작은 더미를 만든다.
이 흙더미가 적의 총탄을 막고, 포탄을 굴절되게 하고, 시야까지 가려주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자연히 방어선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전은 이 흙더미를 두고 벌어지게 된다.
“커흑, 큭!”
“후열은 장전해! 우리가 막는다!”
“머리통을 쏴버려!”
언덕을 오르는 쪽인 그룬발트 보병들은 수적 우세를 발휘하기 위해서인지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어차피 저쪽은 엄폐물을 끼고 있으므로 거리를 둔 화력전으로는 결정적인 피해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올라간다! 나를 따르라!”
“가자! 돌겨억!”
“으와아아아아아!”
기세를 탄 그룬발트 창병들이 똘똘 뭉친 채로 한꺼번에 비탈을 올라 참호 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속도의 우세를 살린 돌격은 아니지만, 빽빽한 창 끝이 한꺼번에 밀려들자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창병과 총병이 뒤섞여 저항력이 열세인 제18 연대 병사들이 뒤로 나동그라진다.
“막아! 막아아!”
“뚫렸다! 전군 돌격!”
퍽! 파각! 타앙! 퍽!
“커헉!”
하지만 성공적이 될 뻔 했던 그룬발트 창병 소대의 용맹한 돌격은 뜻하지 않은 집중 사격에 선두 대열이 쓰러지며 좌절되었다.
쇠가 깨지고 가죽을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병들의 흉갑이 박살나고 피가 튄다.
선두 서너 명이 그렇게 맥없이 쓰러지자, 이제 막 흙더미를 넘으려던 후속 병사들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그틈을 타 전세를 가다듬은 수비측이 다시 창대를 나란히 하고 적을 몰아낸다.
누군가는 창 끝이 부러진 창대를 마치 길다란 몽둥이처럼 위에서 아래로 휘두른다. 투구에 맞으면 튕겨 나갈 것이나 상당히 아플 것이다.
결국 악착같은 방어에 참호에 침투했던 그룬발트 창병들은 쫓겨나고 만다. 네 구의 시체를 남긴 채로.
“장전! 장전해! 명중 필요 없고, 무조건 빨리 쏘는 게 중요하다!”
얼마 전, 카르카냑에서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선발 사수 소대장이 된 얀 고티에가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물론 자기 자신도 재장전하느라 바쁜 손을 쉬지 않는다.
젖은 천을 끼운 꽂을대로 총열 내부를 닦아내고, 화약을 부어 넣은 다음 화약 다지기는 생략하고 곧바로 총알을 넣는다.
총열 청소도 생략하고 싶었지만, 벌써 이 전투에서만 쉴 새 없이 총을 쏘고 있었기 때문에 화약 찌꺼기가 심하게 끼어서 재장전에 방해가 될 지경이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쓰는 총은 생뢰르반에서 노획한, 첼레스티나 교관도 명품이라며 칭찬했던 주디칼리제 청동 화승총이다.
이런 지근거리에서 쏘기에는 아까운 총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위력도 좋긴 했다.
방금 전, 위기 상황에서 앞장선 그룬발트 창병의 흉갑을 쪼개듯 부숴 버린 것도 얀이 가장 먼저 쏜 총탄이었다.
얀 자신을 포함한 휘하 소대원들, 총 5명의 선발 사수들은 2중으로 구성된 참호선의 두 번째 참호에서 엄호 사격을 하고 있었다.
본래는 다른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소속 병사들이나, 지원 온 드 레뮤즈 가문의 병사들도 두 번째 참호선에 함께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격화되고 적이 끊임없이 몰려들면서 대부분은 정면 참호를 지원하러 옮겨 간 상태였다.
그래서 휑한 참호에 남아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자신들과 같은 선발 사수가 대부분이었다.
“적이 물러갑니다!”
“그래 보인다. 하지만 장전을 쉬지 마! 예비용 총도 장전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대장님.”
그 말대로 적이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였던 함성과 고함, 무기 부딪치는 소리와 화약 폭발하는 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남은 것은 거듭된 백병전에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이 숨을 고르는 소리와, 상처 입은 부상병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흘리는 신음소리였다.
안타깝지만 어느 쪽도 배려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다.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음에도 환호성이 들리지 않는 이유가 다 있었다.
“적이 또 옵니다···.”
“휴우···.”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선 그룬발트 보병대열과 교대하듯, 새로운 대열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아침부터 따지면 총 네 번째 계속되는 공격이다.
적은 병력이 얼마나 많은지, 계속해서 깨끗한 복장과 갑주로 무장한 새 병력을 보내오고 있었다.
대체 언덕 아래 적은 얼마나 될까? 못해도 만 명은 훌쩍 넘어 보이던대.
“...각자 백병전 무기도 챙겨 두자. 언제 여기까지 방어선이 밀릴 지 모르니까.”
“예, 소대장님.”
장전을 마친 모두가 허리춤에 찬 무기를 만져 확인해보거나, 참호 벽에 꽂아놓은 칼자루를 만져본다.
“수도사 대장님은 괜찮아요? 단검 빌려 드릴까요?”
“아, 나는 괜찮네. 작업용 망치가 있거든.”
“그걸로 그룬발트 놈들 머리통 깨부수는 겁니까! 교회에서 배우신 건가요?”
“하하, 방어 교회에서는 무기를 따로 갖추기보다 있는 도구를 활용하는 방식을 추천한다네.”
너털웃음을 짓는 아르옌 그로반은 얀 고티에가 지휘하는 소대의 부소대장이었다.
지금은 계율을 버리고 환속했으니 수도사가 아니라고 극구 말하지만, 모두가 그를 수도사라고 부르자 이제는 포기한 모양이다.
얀과 아르옌은 선발 사수 1기 동기였다.
나중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걸었으면서도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얀이 샹다메리 전투에서 국왕군과 싸우고 있는 동안, 아르옌은 아넥시에서 법황군과 싸우고 있었다.
이어서 법황군을 격멸한 마르사코르 전투에도 함께 참전하였으며, 생뢰르반 전투에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다른 길이 있었으나, 그걸 마다하고 선발 사수에 지원하게 되었다는 점도 비슷했다.
“적이 거리에 들어왔다 싶으면 알아서 사격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고가치 표적부터 먼저.”
“알겠습니다.”
선발 사수들은 모두 옆에 2~3정의 총을 눕혀놓고 있었다.
첫 날 전투에서 노획한 그룬발트 제 화승총들이다. 당연히 성능은 크게 문제 없었으며, 선발 사수들을 위해 예비용으로 지급되었다.
이런 난전에서는 정확도 보다도 한 발이라도 적진으로 더 투사하는 것이 삶과 죽음, 승리와 패배를 가르게 된다.
총을 여러 정 가지고 있는 것도 가급적 총을 잘 다루는 선발 사수들이 최대한 빠르게 여러 발을 쏠 수 있도록 배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최소한 첫 발 째는 익숙한 중화승총으로 가치 높은 표적을 쓰러뜨리고 싶었다.
기수든, 장교든, 투구에 이상한 장식을 단 녀석이든.
각자가 가늠쇠 위에 나름의 표적을 올리기 위해 다가오는 적 대열을 바라본다.
거리··· 충분. 바람··· 은 적진의 장식이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없음. 숨을 들이쉬고, 방아쇠에 힘을 넣는다.
타앙!
이미 쏜 이후에는 화약 연기에 가려진 표적에 대한 미련 따위 없었다.
그저 맞았으면 좋겠다 속으로 생각하며, 곧바로 뜨거운 총구로 꽂을대를 밀어 넣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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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엉!
첼레스티나가 공들여 조준한 대포가 폭음과 함께 포탄을 뱉어낸다.
“전원 대피!”
방금 포를 다루던 포수들은 평소처럼 재장전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반동으로 밀려난 포가 멈추자, 좌우에서 포가 손잡이를 붙잡고 질질 끌며 비스듬한 후방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비교적 안전한 흙벽 뒤편으로 숨는다.
한참 반응이 없다. 1분 여의 시간이 흐르고 포수들은 슬그머니 흙벽에서 나와 재장전을 시작한다. 물론 다음 포가 발사될 위치는 전혀 다른 곳이다.
첼레스티나와 포수들이 이처럼 난리법석을 떠는 이유는 물론 적의 대포병 사격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처럼 포탄이 날아오는 것도 아닌데 과도한 처사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실제로 이미 적의 포격에 대포 한 문이 망가지고 포수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망가진 포가는 나중에 고칠 수 있고, 포수들도 직접 포탄에 맞은 게 아니라 파편에 맞은 경상이긴 했지만.
첼레스티나가 간헐적으로 포격하며 노리는 것은 적의 포대이다.
이번 전투에서, 그룬발트 군이 보유한 화포의 숫자는 아군이 가진 10문의 2배를 웃돈다.
게다가 구경도 더 커서 화력이나 사거리 측면에서도 불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만약 서로 피하지 않고 힘싸움을 한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것이었다.
때문에 내 허락을 받은 첼레스티나는 공간만은 충분한 언덕 위, 미터스하임 마을의 도로를 따라 달리며 화포를 이용한 게릴라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쪽 입장에서도 제대로 조준하기 어려우니 명중률이 그다지 높지 않지만, 언덕 아래의 적은 아예 포의 위치를 알 방법이 없다.
그나마 포격 직후, 포탄이 날아온 방향이나 포연으로 추측해야 하는데 그때는 이미 포격을 마친 아군 화포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 다음인 것이다.
어느정도 유효타를 기대하는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첼레스티나와 포병대의 고생 덕에 적 포병대를 성가시게 만드는 데는 성공하고 있었다.
최소한 몇 문 정도는 첼레스티나의 유령 포병을 노리기 위해 허공에 포를 쏴대는 것 같았고, 그 만큼은 방어선의 우리 병사들이 받는 압박을 줄이는 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적이 정말로 작정하고 끝도 없이 방어선을 교대하며 공격해오고 있었다. 아직 잘 싸우고는 있지만 병사들의 피로도가 걱정이다.
“콘도티에레 각하, 지금까지 공격해온 것은 폴름스 선제후령의 군대, 다음 차례로 접근하는 게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군대라고 합니다.”
전령으로부터 뭔가를 듣더니, 수석 참모 리타르몽 드 당세르가 나에게 보고했다.
“브라우나인? 우리가 있는 미터스하임 마을이 폴름스의 영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브라우나인이라고?”
“그렇습니다. 브라우나인의 선제후는 화약 무기 양성에 관심이 많다 합니다. 포로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화약 무기 양성에 관심이 많은 선제후라. 그래서 상당한 규모의 포병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포로라니.
“포로? 그 사이에 포로 심문을 한 건가? 하하, 다들 부지런하군.”
“아, 그건 아닙니다, 콘도티에레 각하. 다만 아까 병원에서 중상을 치료받은 포로가 한 말이 있어서 정보를 맞춰 보았습니다.”
병원에서 포로라니··· 물론 적군이라 해도 여유가 있으면 치료하는 것이 트랑카벨 의무대의 방침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딱히 심문을 한 것도 아닌데 아군에게 유리한 정보를 주었다는 말인가. 아직 전투가 끝나기도 전인데.
“그게, 적이 쏜 포격에 정강이가 부러진 포로였다고 합니다. 고열로 신음하면서 ‘브라우나인 자식들 죽여버리겠다’ 라고 절규했다 합니다.”
“...그랬군. 적장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말로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지금이야 통제가 잘 되어서 그렇지, 실수도 아니고 조준된 포격에 동료가 얻어맞는 꼴을 본 병사들이 잘 싸우기는 어렵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전투를 계속하고 있지만, ‘후방의 지휘관은 언제라도 아군을 쏠 수 있는 인간이다’ 라는 인식은 해독이 불가능한 독약처럼 병사들의 마음 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으리라.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배후에 적을 두고 잘 싸울 수 있는 병사는 없다.
그런데 아군의 정점, 지휘관과 그가 명령을 내리는 포병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병사들은 대체 어떤 생각일지···.
한편으로는 그런 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한 발 더 후방에서 얻어맞게 되면 그때는 전투고 뭐고 다들 도망쳐 버리겠지?
적 후방에 침투해 한 발 쏘도록 한다거나··· 그런 건 안되겠지. 아직은 잘 버티고 있는 전방의 병사들이 걱정되어 헛생각을 해 본다.
“콘도티에레 각하! 다를 연대장께서 전언을 보내셨습니다!”
“다를 연대장이?”
나는 깜짝 놀랐다. 지휘부에서 보기에는 아직 심각하 상황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혹시 내가 보지 못한 열세 상황이 있었나? 예비대가 필요한가?
걱정을 하며 손을 내밀어 리타르몽 참모가 내미는 접힌 종이를 받아 든다.
종이에는 다를 쿠에상 연대장 답다고 해야 할지, 선이 굵은 필체로 적힌 단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