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3.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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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 전까지 대기해라! 못 참으면 지는 거야.”
다를 쿠에상,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장은 총을 들고 쪼그려 앉은 부하들 뒤편을 지나가며 그들을 격려했다.
사격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쪼그려 앉거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총을 세로로 세우고 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돌려 신뢰의 눈빛을 보낸다.
타타탕! 타탕!
따당! 타타타타탕!
이미 적이 빠르게 접근한 방어선에서는 이미 요란하게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사격 명령은 언제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는 장교가 내릴 것, 이것이 콘도티에레가 훈련에서 말한 철칙이다.
연대장급의 고위 장교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부대 구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상관이 머저리같이 굴어서, 사격 명령을 받지 못하고 장전된 총을 쏴 보지도 못한다면 세상에 그런 억울함도 또 없겠지.
때문에 과감하게 중대장, 필요하다면 소대장에게까지 사격 권한을 위임한다. 이렇게 자잘하게 분산배치된 상황에는 사격 결정권자가 소대장이다.
“...이런··· 포탄에 당했나.”
“안타깝군요···.”
다를과 연대 참모들은 참혹한 시체를 보았다. 참호 흙더미 너머로 적진을 살피다가 운 나쁘게도 적 포탄에 직격한 것 같았다.
머리 한쪽이 박살난 트랑카벨 영지군 장교가 축 늘어져 참호 벽에 기대어 앉아있고, 그 위편으로 선혈이 마치 모자이크 화처럼 들러붙어있었다.
어쩔 수 없는 불행한 희생이다. 시체는 전투 후에 수습하면 된다. 적어도 전투 중에 연대장이 신경써야 할 우선순위는 낮았다.
다를은 가급적 이름 모를 부하 장교의 유해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도 운이 좀 더 나빴다면,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었다.
다행히 방어선 근처 구역은 다른 장교가 지휘하고 있었다.
“쏴라아!”
타타탕! 타타타타탕!
소대장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총병들이 일제히 흙더미 앞에 달라붙어서는 적진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귀가 윙윙 울리고 화약 연기에 코가 따갑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는 모양이다.
“흐어억!”
적탄을 맞은 병사가 피를 흘리며 참호 안쪽으로 무너지듯 쓰러진다.
머리 위로 적이 쏜 총탄이 휙휙 지나간다. 당장 참호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적진을 살피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만 참는다.
지금 그가 연대장으로서 할 일은 독전하며 전선을 살피고, 결정적인 순간 예비대로서 활동하는 것이다.
검을 뽑아 어깨에 기댄다. 왼손으로 권총 손잡이를 만지작거린다. 처음으로 그에게 덤벼드는 적병은 분명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아직 제비처럼 날렵한 몸매를 가지고 머리숱도 지금보다 세 배는 많았던 시절, 그는 벨모제에서 손에 꼽히는 기사였으니까.
타타탕! 타타타탕!
총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다행히 적은 방어선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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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왁!
총탄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가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선명하게 들린다.
용병대장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놀라서 어깨를 움찔거렸으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런 후방까지 날아올 정도면 조준하고 쏜 게 아닌 눈 먼 탄환이다. 게다가 총알이 지나간 후에 겁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미클라크 대장님! 선두 전열이 적 방어선에 진입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지금까지의 전투와는 달리, 미클라크는 휘하 연대의 바로 후방에서 직접 부하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다시 공격입니까? 바로 지금 말입니까?’
앞서갔던 동료들이 비참하게 패배하고 퇴각한 것을 똑똑히 보았던,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던 후위 부대에는 즉각적인 재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연대장 중 한 명은 당연히 철수 명령이 내려질 것으로 생각했는지 경악한 표정으로 저렇게 반문했었다.
허나 그 연대장은 절대로 겁쟁이가 아니다. 오래 함께 복무해온 미클라크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용병 동료였던 둘은 젊었던 시절, 검과 총을 쥐고 함께 적 방어선을 돌파했던 경험도 있었다. 동료의 절반이 쓰러진 끔찍한 전장에서였다.
어지간한 총격 쯤은 가랑비 정도로 예사롭게 여길 역전의 용사도 경악할 정도로 비상식적이고도 지독한 명령이었다.
‘우리 애들 절반의 머리 위에 포탄을 떨궈 놓고, 나머지 절반으로 그 시체를 넘어 진격하라는 말입니까? 죽어도 못합니다!’
아마도 그 연대장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무리한 명령임은 아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일 아니겠나.’
‘제가 좋고 싫은 게 문젝 아니라 병사들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알고 있네. 이번에는 내가 직접 지휘하겠다. 앞장서 줄 수 없겠는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직속상관인 미클라크의 명령까지도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적도 얕은 수를 한 번 더 쓰지는 못하겠지. 정직하게 힘과 힘 싸움이 된다면 숫자에서 유리한 이쪽이 무조건 유리하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막대한 사상자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속이 아파오지만···.
그럼에도 여기서 멈추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은 그 오만한 엘프 지휘관, 세두시온 공과 동의하는 바였다.
공격을 안 했으면 모를까, 이만한 사상자를 내고 멈추느니, 더 싸워서 어떻게든 뚫어내는 것이 맞다.
폴름스 남부 병력을 지휘하는 용병대장인 자신이나 다른 영주들 역시 선제후 주군을 구하러 가지 못해서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전진! 전진!”
“빈 틈을 만들지 마라!”
타타타탕! 퍼펑!
따다당! 탕탕! 타타탕!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부하들의 전투 소음을 들으며, 미클라크는 후방, 언덕 아래에 집결하는 브라우나인 선제후군 연대를 바라본다.
이번 공격에는 기병 돌격을 통한 기습 계획은 아예 배제되어 있었다.
아까 실패했던 공격에서도, 괜히 정예 흑기병인지 흑기산지 길 만들어 준다고 공격의 맥이 끊기지 않았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전과도 못 올리고 적의 기습에 휘말려 퇴각하면서, 적에게는 역습의 빌미를 주지 않았던가.
이번은 다르다. 아예 산 비탈을 십여 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언덕을 오르는 보병 중대로 가득 채워 버리기로 했다.
중대 단위로 측면이 약할 수밖에 없는 폭이 얕은 횡대를 취하고 있다. 만약에 적에게 측면 공격을 당한다면 또 치명적이겠지.
하지만, 적이 측면 공격에 나설 공간이 아예 없다면 어떨까?
지금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적이 기병을 내보내 측면을 노린다면, 가파른 비탈을 내려오다가 목이 먼저 부러질 것이다.
정면에서 공격해온다면? 얇은 횡대라지만 그런 대열이 무려 여섯 개가 있었다.
기세로 두어 개 정도는 돌파할 수 있을지 몰라도 최종적으로는 붙잡힐 것이며, 비탈에 가득한 보병의 바다는 덫이 되어 적 기병을 옭아맬 것이다.
이 총 여섯개의 대열은 정면의 적에게도 끝 없는 제파 공격의 지옥을 선사해 줄 것이다.
지치고 피해가 누적되었다 싶으면 다음 대열로, 또다시 체력이 떨어지고 피해가 커지면 또 다음 대열로.
이걸 여섯 번 반복할 수 있다.
하지만 적도 상황에 따라서 방어선의 병력을 교대해 줄 수 있을까? 아마 어렵겠지.
지난 공격에 참여했던 장교들의 보고에 의하면, 적 보병은 2개에서 3개 연대 규모로 추정된다.
지금이야 기세가 올랐고 비탈과 참호 방어선이라는 지리적 우위에 의존해 잘 싸우고 있지만···.
아무리 용맹하고 사기가 왕성한 병사라도 없는 화약을 만들어서 총을 발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전투가 거듭되다 보면, 후방에 화약에 잔뜩 쌓여있는 데도 일선의 총병 부대에 보급이 닿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전령 보내기도 힘들 정도로 치열한 전투 와중에 총탄이 떨어진다면, 거기서부터 균열이 시작 될 것이다.
콰앙! 쾅! 뻐벙!
“이런 시팔, 뭐지?”
요란한 포성에 미클라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근처를 스치고 지나가던 총알에서 놀라지 않았던 그였지만, 부하들을 쏴버린 세두시온 공의 정신나간 행위를 겪은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포성은 후방으로부터 들리고 있다. 브라우나인의 포병대가 지원 포격을 개시한 모양이다.
“어딜 쏘는 거지? 아군은 이미 적 방어선에 도달하지 않았나! 설마 또···.”
불길한 생각이 든다. 설마, 설마 싶지만···.
“아, 아닙니다, 대장님. 아까처럼··· 아군 포병이 우리 연대를 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행히도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눈 앞에 보이는 부하들의 등을 아군 포탄이 쓸고 지나가는 지독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보고를 해온 부관 역시 놀랐는지 얼굴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포병대의 표적은 더 언덕 위쪽이나, 그 너머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엘랑키아 군 포병대를 노리는 대포병 사격이 아닐지···.”
“그렇군···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인가?”
“부, 분명 우리 폴름스의 네프셀시엔 선제후 전하께서 좌시하지만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겠지.”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아는 네프셀시엔 선제후라면··· 과연 아군의 포격에 죽어간 인간 보병들을 위해 분노해줄 것인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병사들의 입장을 생각해서는 아니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분노한다면 그게 그녀에게, 폴름스 선제후령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겠지. 최악의 고용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간적으로 정이 가는 인물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 얼굴 반반하고 귀만 큰 족속에게는 도무지 정을 느낄 수 없었다.
“자꾸 뒤를 돌아보지 마라! 전진! 전지인!”
“선두가 물러나면 다음은 우리 차례다!”
“적군에게 쉴 틈을 주지 마라!”
앞에서 갑자기 긴장감이 느껴진다. 자기 차례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 중대장들이 부하들을 다잡고 있었다.
그나저나 ‘뒤를 돌아보지 마라’라니··· 언덕 오르기도 힘들 이럴 때 나올 말이 아닌데.
미클라크가 보기에도, 앞서 가는 휘하 병사들이 자꾸 흘끔흘끔 뒤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정확히 브라우나인의 포대가 언덕 너머로 포격을 개시한 이후 부터였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다. 병사의 마음이 이런 것이다.
세두시온 공이 아까 실행했던 아군이 피격되는 것을 불사했던 포격, 아니 아군이 맞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쐈던 포격.
그건 나름 경험 많고 용맹한 폴름스 남부 출신 보병들의 마음 속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분명 그 흔적은 한참, 최소한 이번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은 영향을 미치겠지.
유난히 발걸음이 내키지 않은 듯 미적거리고, 포성이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빌어먹을···.
아군의 포격 소리에서는 원래 든든함이 느껴져야 한다.
내가 나서서 싸우기 전에 적 부대가 공격 받는다.
나를 때려야 할 포대를 아군 포대가 먼저 노린다.
어쩌면 오늘은 포병 덕에 괴로운 전투 없이도 쉽게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포병의 역할이다. 적에게 실질적으로 입히는 피해 이상으로, 적어도 이쪽이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도록 한다는 심리적 영향도 매우 크다는 말이다.
허나 여기서는 정반대 효과가 나고 있다. 마음 놓고 전방의 적에게만 신경써도 부족할 병사들이 ‘아군 포병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다고 똑바로 싸우지 않느냐? 라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전히 뚝심있게 언덕을 오르며, 적의 총탄을 몸으로 받아내며 용감히 싸우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미클라크는 주변에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라리 포격을 멈춰 달라고 전령을 보낼까?
···그건 너무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됐든 브라우나인 포병대는 아까 그 일 말고는 아군이 분명하니까.
지금은 부하들을 믿고 견디는 수 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귀만 큰 놈들···.”
다시 욕을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랠 방도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