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2. 랄렌 강 너머
“정말입니까, 콘도티에레? 여기서 적이 더 늘어나면··· 어이구야.”
적의 증원군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다를 연대장이 남달리 넓은 이마를 찰싹 때리며 과장되게 반응한다.
내가 가급적 자연스럽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 것과 같이, 이런 반응 역시 주변에는 상황을 덜 심각하게 인지시키게 될 것이다.
아무튼 배짱 하나만은 대단한 사람이다. 톨마르 마슈레 영감님도 그렇고, 벨모제 사람들은 다 이런가 하는 헛생각을 잠시 한다.
아무튼 내 말투나, 다를 연대장의 반응이나 실질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는 데엔 도움을 주지 못할 테지만.
“그룬발트 군에게 이 언덕 마을은 지나쳐야 할 통로일 뿐이지, 전술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아, 그야 그렇겠지요.”
“그런데 적장의 지휘를 보면, 사상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곧장 후속 공격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허, 우리 입장에서는 고약한 인간이군요.”
“네에, 그룬발트니까··· 인간이 아니라 엘프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오?”
“핫핫핫, 그렇습니다, 부관님. 분명 그 귀 길다란 종족일지도 모르겠군요.”
첼레스티나가 불쑥 끼어들자 다를이 껄껄거리며 호탕하게 웃는다. 나도 쓴웃음을 짓는다.
도무지 세 배나 되는 적을 앞에 두고 있고, 추가 증원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논의하는 지휘부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콘도티에레 각하, 탄약 배급을 마무리했습니다. 부상자 후송도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손을 빌려 주었던 병사들이 위치로 복귀 중입니다.”
“수고했네, 리타르몽 경.”
적이 잠시 물러간 사이, 꼼꼼하게 여러가지 일을 처리한 리타르몽 드 당세르 수석 참모가 믿음직스럽게 보고했다.
“그럼 저도 부하들에게 돌아가 보겠습니다, 콘도티에레! 전방은 걱정 말아 주십시오. 아까 온 만큼 더 와도 얼마든지 버틸 자신이 있습니다!”
“믿겠습니다, 다를 경. 위험해지기 전에 반드시 무슨 수를 내겠습니다.”
“하핫, 저희도 믿겠습니다!”
다를이 살집 있는 몸으로 날렵하게 전선으로 돌아간다.
방금 그의 말대로, 겨우 이틀 만에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준비된 아군 방어선은 아까 같은 공격이 다시 와도 거뜬히 막아 낼 것이다.
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공격이 한 번 더 온다면?
하루에 세 번에 걸친 공격도 똑같이 막을 수 있을까?
그나마 이번에는 적의 선두를 완전히 붕괴시켜 쫓아냈기에, 방어선을 전체적으로 한 번 재구축하고 화약 등 보급품을 분배할 시간이 있었다.
만약 지친 전위와 쌩쌩한 후위의 공격이 교대하듯 이어졌다면 상황이 훨씬 나빴을 것이다.
특정 지점이 과도하게 소모되었는데,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새로운 적을 맞이했다가는 방어선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한 번 생겨버린 균열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최악의 경우 복구가 안 될 가능성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휘부에서 끊임없이 살피고는 있지만.
솔직히 적의 첫 공격을 격퇴하면서 아군이 입은 피해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 손해 교환비만 따지면 완벽한 승리에 가깝다.
하지만 전투에서는 눈에 보이는 병력과 장비의 피해 이상으로 ‘소모’되는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병사들이 느끼는 피로감일 테고.
가령, 이제 적은 아군 방어선의 구조에 대해 거의 완전히 알게 되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참호를 파 흙더미를 앞에 두었기에, 언덕 아래에서는 방어선 구조를 알기 힘들었고 포격에 의한 피해도 최소화 할 수 있었다.
강렬했던 측면 공격이 마법처럼 성공했던 것도, 적이 아군 방어선 구조를 모른 상태로 무턱대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무형의 유리함은 기대하기 어렵겠지.
그런 깜짝 기습이 아니라면 다시 기병을 투입해서 보병의 후방을 흔드는 전술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적 보병으로 가득한 비탈길에서 겨우 수백 기의 경기병이 길을 잃는다면··· 전멸하는 데는 정말 몇 분 걸리지 않을 테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적을 흔들만한 수가 하나 쯤 더 있다면 좋을 텐데··· 이건 뭐 이쪽이 흔들리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도 정신이 없으니.
“콘도티에레, 건의를 드려도 될까요오···.”
생각에 빠져있던 나를 첼레스티나가 불렀다.
아까부터 종이에 뭔가를 쓰면서 고민하더니, 안 그래도 말을 걸 때가 되었겠지 싶었다.
“물론이지. 무슨 건의인데? 혹시 포대 위치를 옮기고 싶은거라면 얼마든지 첼레스티나가 원하는 대로 해.”
“네에? 어, 어떻게 아셨나요! 역시 콘도티에레의 숨겨진 기프트는 생각을 읽어버리는 것이었나요오!”
“...진심으로 그런 기프트가 있다면 좋겠네. 그건 아니지만 포대 배치하기가 마땅치 않은 지형이니까, 그러지 않을 까 싶었어.”
“네에, 맞아요오··· 무엇을 해도 언덕을 오르는 적을 안정적으로 타격할 각도가 나오질 않아서요. 그렇다고 대포병 사격을 하기에도 애매하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포대는 첼레스티나에게 맡길게.”
“네에! 헤헤헤, 감사해요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가 나름 절도 있게 북방식 경례를 하더니, 신난 발걸음으로 돌아간다. 명백하게 이럴 때의 그녀에게는 참견을 할 필요가 없다.
슈토르히 시절, 포병 담당은 루트비히였지만 진지 위치를 정하는 것은 언제나 총병 담당인 첼레스티나였다.
그녀의 말로 표현 못할, 마치 전장을 입체적으로 내려다 보는 듯한 공간 감각은 다른 사람이 따라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현재 아군의 포병 화력은 적에 비해 열세이지만, 첼레스티나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줄 것이다.
나는 나대로, 머리속에 방어선의 형태를 떠올리며 개선할 것이 있나 고민해본다.
으음, 역시 어렵다. 결국은 병력이 부족하다. 빠듯하게 짜내듯 편성한 소수의 예비대 말고는 자유롭게 증원해줄 병력도 없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병력을 조금 더 데려올 걸···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만 해도 지연전이긴 하지만 독자적으로 전선을 하나 맡을 줄은 몰랐지.
트랑카벨 정규 연대가 1개 연대만 더 있었다면···. 보병이든 기병이든 좋았다.
그랬다면 이 언덕을 적이 이틀이 아니라 한 달은 통과하지 못하도록 철벽같은 방어선을 만들 수도 있었을지 모르지.
다른 부대라도··· 다른 부대라도 여유 병력이 조금 있었으면···.
예를 들면 슈토르히라던가.
하아, 없는 걸 생각해서 뭐 하나. 여기서 최대한 지켜보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계산이 서면 무사히 후퇴시킬 것을 고민하는 게 낫겠지.
“콘도티에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약간 날카롭지만 경쾌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간호사들을 제외하면, 이 전장의 유이한 여성 지휘관,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의 목소리였다.
“보고가 늦었습니다, 콘도티에레! 저희 드 몽파르지에 기병대는 재편성을 마치고 언제라도 출격할 수 있도록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네, 티테니아 경. 남은 전투 잘 부탁하겠네.”
“물론입니다!”
평소처럼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엘랑키아 최고 명문 귀족가 출신의 여기사가 대답한다.
첫 전투에서 충격이라도 받지 않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친오빠인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도, 전투에는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점이 있었지.
여동생인 티테니아에게도 같은 기질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가신들을 이끌기 위해 그런 자신을 가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이번 전투를 잘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그런데··· 이 기사들은 무슨 일인가?”
말에서 내린 티테니아의 주변에는 열을 맞춰 함께 뛰어온, 20여 명의 기사들이 보인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있지는 않았다.
모두가 건장한 청년들이고, 훌륭한 갑옷과 검, 그리고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몇몇은 상처를 입고 붕대로 팔이나 이마를 감싸고 있기도 했고, 최대한 손질한 흔적은 있으나 망토나 흉갑이 얼룩으로 지저분하기도 했다.
“이 자들은 드 몽파르지에 가문의 가신들입니다. 지난 전투에서 군마의 손실이 많았기 때문에···.”
“아···!”
티테니아는 어딘가 부끄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녀가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었다.
전장은 잔혹한 공간이다. 인간에게도 위험하지만, 말에게도 위험하다.
특히 가장 앞장서서 적을 추격했고, 아직 질서를 갖추고 있던 적 보병의 측면을 공격해 붕괴시켰던 티테니아의 기병대이다.
이들은 그 와중에 싸우다가 군마를 잃은 기사들이라는 이야기겠지. 확실히 보고에 의하면 죽은 말이 60마리를 넘었었으니···.
“예비마를 분배했으나, 이 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군마를 지급할 수 없었습니다, 콘도티에레. 하지만 하나같이 훌륭한 기사들입니다!”
“그랬군. 그럼 그 지휘권을 사령부에서 맡아도 되겠나?”
내 질문에 다소 시무룩해 있던 티테니아의 표정이 활짝 펴진다.
“물론입니다, 콘도티에레. 여기 타르올 경이 저희 드 몽파르지에 하마기사대를 이끌 것입니다.”
“타르올 드 매믈랭이라 합니다. 콘도티에레께서 지시하시는 전장이라면 어디라도 목숨을 바칠 각오입니다.”
“고맙네, 티테니아 경, 잘 부탁하겠네, 타르올 경.”
머리를 짧게 깎은 타르올이 경례하자, 다른 기사들 역시 경례한다.
기사로서 훈련을 받은데다 갑옷으로 잘 무장하고, 검과 권총을 가진 기동 예비대라니, 든든하네.
대부분이 젊은 청년들이다. 모처럼 전장에 나섰는데, 말을 잃는 바람에 전선 후방에서 대기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혈기가 들끓을까.
조만간 그 혈기를 방출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예비대가 필요한 상황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지만···.
“준비! 모두 침착해라!”
“명령 없이 쏘지 마!”
“아까 해 봤지? 그걸 한 번 더 하면 된다. 피곤하겠지만 참아라. 아마 적이 더 피곤할 것이야, 하하하핫!”
전방에서 장교들의 호령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명백하게 다를 쿠에상 연대장의 것이 분명한 호탕한 목소리가 멀리까지 들린다.
확실히, 저런 사람과 함께 전선에 서면 마음이 한결 안심되지 않을까.
병사들 뿐이 아니지. 훌륭한 장교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생각에 내 마음도 안심된다.
쾅! 콰쾅!
파팍! 투콱, 콰콱!
“위험합니다, 콘도티에레! 실례하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리타르몽 드 당세르 참모가 내 팔을 잡아끌고 비교적 안전한, 부서진 건물의 석축 뒤편으로 이동한다.
포격이 떨어지는 동안은 잠시 조심하는 게 좋겠다.
방어선에 포탄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적군이 마지막까지 기다리던 사전 포격을 개시한 모양이다. 조만간 보병 공격이 시작된다는 말이겠지.
이번에는 적의 포탄이 마을 너머로까지는 많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또한 적이 경험을 통해 조준을 보정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까 초전에서는 사실상 마을을 조준한 탓에 머리 위로 넘어가는 뻥포탄이 많이 나왔었는데.
참호라는 강점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희생 없이 넘어가기는 힘들 것이다.
탕! 타탕!
타앙! 탕! 탕··· 탕!
띄엄띄엄 총소리가 들린다. 따다다닥 하는, 콩볶는 듯한 총병 전열의 일제사격과는 다른 소리.
아마도 매복한 선발 사수나, 적이 전위로 내세운 경보병들이 응전하는 소리겠지.
“오? 어어어? 우오오오오!”
“맞았다! 우와아아아!”
“장난 아닌데! 명사수잖아?”
갑자기 근처 방어선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온다. 뭐가 맞았다는 소리일까?
“선발 사수가 초탄으로 적 기수를 명중시킨 모양입니다. 적 중대 깃발이 쓰러졌습니다.”
“아하, 그랬구나.”
참모 중 하나가 상황을 보고 있었는지 보고해온다.
사실 깃발이 쓰러진다고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금방 다른 기수로 대체될 것이고.
하지만 이런 작은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 사기를 크게 움직이며, 더 나아가 승패를 결정하는 다양한 요건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타타타탕! 따다당!
타타타타탕! 타타타탕!
요란한 총소리가 울린다. 가까이에서, 또 멀리서. 적이 접근한 방어선부터 일제사격이 시작 되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또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