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1.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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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짓이야!”
용병대장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화를 버럭 냈다. 방금 그가 지휘하는 폴름스 선제후령 남부 병사들은 후방에서 아군의 포격을 뒤집어썼다.
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아군의 무기로 아군을 쏘는 ‘오사’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아군을 적으로 오인하고 쏘는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포수가 아무리 숙련된다 해도 장비의 한계로 원치 않는 위치에 떨어지는 포탄은 종종 발생한다.
때로는 교전중인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아군이 맞을 위험을 각오하고 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이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걸 당할 수도 있는 보병의 경우, 유쾌하지는 않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로 인해서 최종적으로 부대가 입을 피해가 적어진다면?
하지만 방금은 무엇인가, 아무리 아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적을 노렸다고 쳐도··· 맞아도 상관 없다는 조준이 아니던가?
아니, ‘맞아도 상관 없다’ 조차도 아니다.
밀도가 적군 기병보다 아군 보병이 훨씬 높은 상황에서 적군이 빗나가더라도 아군은 반드시 맞을 수 밖에 없다.
이건 ‘아군이 맞아도 신경쓰지 않겠다’가 아닌가?
“빌어먹을! 포격을 멈춰라! 멈추라고!”
“포, 포격은 멈췄습니다, 미클라크 경.”
분노한 이웃 선제후령의 지휘관이 들이닥치자, 브라우나인 소속 포대장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인다.
포대장과 다른 포수들의 얼굴을 그냥 보기만 해도, 그들 역시 즐기면서 아군을 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수가 훨씬 많은 아군 보병을 쏜 이상, 자칫하면 린치를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또 그걸 떠나서 인간적으로 아군을 쏘는 게 즐거울 리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잘못한 이상,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어떤 자식이냐? 아군 머리 위로 포탄을 떨구다니 제정신이야!”
“고정하십시오, 미클라크 경.”
빌어먹게도 침착한 목소리가 분노한 미클라크를 말린다.
엘프, 하지만 브라우나인의 사령관인 세두시온은 아니다. 더 키가 크고 얼굴이 길쭉한, 처음 보는 상대이다.
아마도 이번 포격을 명령한 세두시온의 중견 지휘관 중 하나겠지.
허나, 세두시온의 측근이 아니라 본인이 와서 말리더라도 고정하란다고 고정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고정이요? 적과 대적하는 상황에서 아군의 포탄에 목숨을 잃은 병사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전부 세두시온 공의 명령입니다. 결과적으로 상황은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이게··· 이게 해결이 된 것입니까?”
“적 기병의 후방 기동을 막았고, 포위 당했던 아군은 다소 피해를 입었으나 일단 적의 전멸당할 위험에서는 벗어났습니다.”
얼굴이 시뻘겋게 된 미클라크와 반대로 세두시온의 명령을 전하는 엘프 참모는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잘도 떠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그게 더 화가 났다.
“전멸당할 위험에서 벗어났다고요? 그건 3열 이후 후위 보병들의 지원으로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적의 기병 포위망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불과 몇백 미터 뒤에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아군 보병들이 있었으니까.
그대로 버틴다면 거대한 보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진 압착기에 끼어버리는 꼴이 될 테니까.
그러니 그 전에 최대한 피해르 입히고, 포위망에 붙들린 보병들의 혼을 뽑아 놓으려고 했겠지. 절반 쯤 성공하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 열린 포위망을 통해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병사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미클라크 휘하의 2개 연대가 중앙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위망에 갇혔던 보병들 중 태반이 폴름스 선제후군이었으며 아군 포탄에 노려진 것도 그들이었다.
가슴이 아팠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러면 후위 보병부대가 도망치는 아군에 휩쓸려 전투력을 상실하지 않겠나요?”
“...뭐라고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미클라크는 반문했다.
지금 저 이름 모를 엘프 참모의 말은 이것이다.
만약, 후위 보병이 전위 보병을 구하기 위해 접근했다면, 기병의 포위망을 뚫고 동료들을 탈출시키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포위망에서 벗어나 도망치는 동료들과 뒤섞여 함께 후퇴해야 했을 것이다.
대열은 당연히 무너지겠고. 전투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오늘은 퇴각해서 재편성에 전념해야 할 수도 있었다.
전장에서 흥분과 공포는 생각보다 전염성이 심하니까.
다만 지금같은 경우, 전위와 후위 사이에 거리가 있었기에, 양측이 뒤섞이지는 않았다.
후위 부대는 중대 단위로 길을 만들어 도망치는 동료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비켰고, 패주 대열이 지나가면 다시 대열을 회복할 수 있겠지.
···정신적으로 전염된 흥분과 공포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방금 대화로 알게 된 것은, 브라우나인 선제후군을 이끄는 세두시온은 오늘의 전투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후위 부대를 아직 후속 공격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방금 전의 위험한 포격을 지시했다는 말이다.
이가 갈릴 정도로 지독한 전술이지만 나름의 계산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 해도 이해할 생각도, 대충 넘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한 번 적의 기책에 당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아군의 절반은 전장에 발도 들여 놓지 않았습니다.”
“다시 공격하시려는 겁니까?”
“적이 ‘계산된 아군의 무질서’를 보고 추격해 내려왔다면 좋았겠지만··· 적장은 아주 침착한 인물인 듯 하군요. 부대 통제도 잘 되는 것 같고···.”
“아니 지금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까!”
“세두시온 공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오늘, 브라우나인과 폴름스 연합군은 저 언덕을 오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혔다. 평생을 용병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미클라크와, 날 때부터 신분제도의 가장 위에 있었던 엘프 혈족의 사고방식 차이란 말인가.
대체로 용병의 신입 홀대는 유명한 편이지만, 일단 동료로 받아들인 이후 용병 조직은 비교적 평등한 편이다.
실력과 전과 중심의 세계이기도 하고, 유능한 동료는 자신의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서로 무장한 입장에서 미운 털 박혀서 좋을 것도 없었고.
···만약 용병대 내부에서 전술적 목적을 이유로 아군을 뒤에서 쏘게 만들었다?
그 구실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었다고 한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뒤에서 칼침을 놓고 싶어할 인간을 생존자 숫자만큼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다.
“자, 설명이 되었습니까? 미클라크 경은 어서 부대를 지휘해 다음 공격을 준비해 주셔야 합니다.”
“젠장할, 저 꼴을 눈 앞에서 보여줘 놓고 병사들을 다시 밀어 넣으라는 말입니까?”
“흐음, 그게 귀경의 역할이 아닙니까?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면 즉결처분을 해서라도 전장으로 돌려 보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어지간한 불합리함은 참고 넘기고, 그룬발트 출신이라면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엘프와 인간 사이의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미클라크는 지금, 마치 그 선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말을 나오는 대로 막 하는구만! 인간들 목숨이 목숨으로 안 보이는 거요?”
“미클라크 경, 말을 함부로 하시는 것은 귀경입니다!”
“내 병사들은 소모품이 아니다. 도련님들 병정놀이의 장기 말이 아니라고!”
지금껏 남의 이야기라도 하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말만 전달하던 엘프 참모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진다.
“그렇지 않소.”
일촉즉발 상황까지 이른 두 사람 사이를 차분한 목소리가 가로막는다.
“귀경의 병사들은 장기 말이 맞소. 그리고 귀경이나 나 또한, 승리를 위한 말이오. 매겨진 가치가 조금 다를 뿐이지.”
“세, 세두시온 공!”
브라우나인 선제후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며, 차기 선제후 계승이 유력하다 알려진 세두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클라크 경, 휘하들이 소중하다면 지금 부대로 돌아가 이끌어야 하지 않겠소?”
“이대로 돌아가란 말씀입니까?”
“퇴각해온 부대를 수습하고, 다음 부대의 공세를 준비하시오.”
“....”
“적이 퇴각하는 보병들의 뒤를 쫓아 내려왔다면, 일거에 역습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소. 다음 공격은 쉽지 않겠지만, 그건 적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아까 이름 모를 엘프 참모도 말했지만, 진짜로 퇴각하는 선두 부대를 적이 뒤쫓을 것으로 예상했던 모양이다.
전술적으로는 합당하다. 얼마나 많은 군대가, 단단히 지키던 거점을 포기하고 추격에 나섰다가 파멸하고 말았던가.
하지만 적이 생각 이상으로 침착하고 통제도 잘 되고 있다. 엘프 참모의 말대로였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엘프 족속들은 장병들의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않는다. 마치 승리를 위해 언제라도 써버릴 수 있는 잔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전투에서 이기려는 생각은 끊임없이,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이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게 역겹지 않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된 이상, 중간에 전투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미클라크는 고개를 돌려 언덕 위쪽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수천 명의 보병들이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그 자리에는 무수히 많은 시체가 쌓여있다.
선을 그어 겹겹이 쌓인 그룬발트 보병들의 시체가 마치 회색 비늘처럼 보일 정도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저항이 거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도 다소 안일하게 대처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은 물러 가겠습니다.”
“다음 공세를 준비해 주시오. 무운을 빌겠소, 미클라크 경.”
“세두시온 공께도 말입니다.”
분하지만 세두시온의 말이 영 틀린 것은 아니다. 지금 자신이 여기서 떠든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언덕 위에서 흠씬 얻어맞을대로 얻어맞고 돌아온 부대를 위로하고 재편성해야 하며, 그럼에도 다시 언덕을 올라야 할 부대를 이끌어야 한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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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이거 또 오는군요.”
잠시 사령부와 함께 다음 전술을 논의하고 있던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장, 다를 쿠에상이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금 적을 쫓아낸 이후,
이 사람은 전장의 한 가운데인데도 전혀 긴장한 것 같지 않다. 마치 ‘오늘은 바람이 시원하군요’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말투이다.
방금 격전 속에서 훌륭하게 휘하 연대를 이끌었던 그의 흉갑에는 피얼룩이 점점이 튀어 있었다. 아군의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
또한 살집 있는 손가락에 새까맣게 화약 찌꺼기가 끼어 있는 것을 보면, 혼전 와중에 본인도 몇 번 전투에 휘말렸던 것 같다.
“벌써 세 번째, 아니 네 번째 공격이군요. 이틀 사이에 네 번이라! 적장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은 횟수군요!”
“그만큼 우리 군 역시 무리하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를 연대장의 농담을 받았다.
적장은 성급하지만 상당히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 이 정도 깨졌으면 놀라서라도 병력을 수습하고 상황을 볼 만도 하지 않나.
그리고 적을 관찰한 결과, 머리속에서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도 적의 후속 전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가능한 차분하게 내 생각을 설명한다. 원래 불리한 이야기일 수록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