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0. 랄렌 강 너머
“적 우익이 무너졌습니다! 중대급 총병들이 들을 돌려 도망치고 있습니다!”
보고하는 수석 참모, 리타르몽 드 당세르의 외침에는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언제나 다소 어두워 보일 정도로 이성적인 이 키 큰 남자도 아군이 승기를 잡은 순간에는 그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승기를 잡는다는 것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벗어난다는 안도감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남달리 책임감이 강하고 걱정이 많은 수석 참모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전선 좌측에서 갑작스러운 포격과 이어진 기병 돌격에 그룬발트 공격의 중핵인 보병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대편,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우측에서도 갑작스럽게 엘랑키아 기사들이 공세를 시작했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여기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당한 반격의 충격은 크다. 잘 싸우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파문처럼 퍼져나간다.
지금 전장에 나선 양측의 병력의 강약은 명확하다.
만약에 현재 양쪽이 어떤 지리적 유불리도 없이, 그 누구도 심리적 영향을 받지 않으며 최후의 1인까지 싸운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승자는 대규모 보병 집단을 보유한 데다, 수적으로도 우세한 그룬발트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전황은 그렇게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갑주를 입고 말을 타고 권총을 휘두르는 것도, 동료들과 어깨를 맞대고 빽빽한 장창을 겨누는 것도, 그 보호를 받으며 화승총을 장전하는 것도 모두 ‘인간’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지휘관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정확히는 인간의 심리는 불합리하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전술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공포에 질려 전선을 이탈하는 것도 인간,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전술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것도 인간이다.
지금 그룬발트 군의 핵심인 중앙의 거대한 보병 부대, 약 2천에서 3천 가까이 되는 ‘보병의 덩어리’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저들을 무사히 살려서 본진으로 데려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자칫하면, 엘랑키아 기병들에게 반포위당한 상태로 죽죽 밀리다가 크나큰 손실을 볼지도 모른다.
정면에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의 참호 방어선을 그대로 둔 채로, 양 측면을 밀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병력이 움찔거리며 안전한 장소를 찾아 중앙으로 조금씩 이동하게 되고, 전선 한 가운데의 밀도가 높아졌다.
저기 포격을 쏘고 싶다고 생각한 찰나···.
콰쾅! 퍼억!
쾅! 파팍!
요란한 폭음과 함께, 첼레스티나의 포대가 발사한 포탄이 순차적으로 작렬한다.
나도 놀라서 그 방향을 바라보니, 비탈이 시작되는 뭉툭한 봉우리 위에 포를 놓고 쏴대는 곡예를 부리고 있었다.
저렇게 디딤이 불안한 위치에서 포를 쏘는 것은 명중 문제도 있고, 언덕 아래에서 저격당하거나 반동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으면 포를 잃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레스티나는 할 수 있다 생각한 모양이다.
확실히, 겨우 두 발의 포격이었지만 적진에서 가장 밀집도가 높던 지역에 떨어진 덕에 엄청난 효과가 발생했다.
얼마나 많은 적을 쓰러뜨렸냐의 문제가 아니다.
조금 전까지는 다소 뒤섞여 있더라도 부대 구분이 갔다면, 포탄이 떨어진 이후는 당황한 적 보병들이 사방으로 날뛰는 바람에 대열이 무너져 버렸다.
중앙에서 힘을 받쳐줘야 할 주력이 저 꼴이 났으니, 외곽에서 아군의 공격에 저항하는 부대도 무사히 싸울 수 있을리 만무하다.
적 후위에는 아직 전투에 투입되지도 않은 보병, 후열 부대가 있기는 하다. 병력 규모도 이미 교전 중인 부대와 맞먹을 정도로 상당하다.
하지만 그들이 명백히 참전을 꺼리고 있다.
병사들 입장에서야 두려운 게 당연할 테고, 장교들 입장에서도 어설프게 접근하다가 패주하는 동료들에 휩쓸리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리라.
게다가 아까 무질서하게 도망친 검은 갑주 기병대가 보병 사이를 뚫고 지나가면서 대열을 흐트러뜨린 데다가 공포까지 전염시켰을 수도 있고.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사령관의 단호한 명령과 방침일 텐데··· 적장이 어떤 판단을 할지는 모르겠다.
아군은 아군대로, 이 거대한 처치곤란의 ‘보병 덩어리’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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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로 도망치는 적을 억지로 막지 마라! 적 보병 주력을 포위하고 서서히 조이는 것이 우리 임무다.”
“알겠습니다!”
좌측의 엘랑키아 기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카렐 드 상포리앙은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생뢰르반 파견대에 종군하고 있는 엘랑키아 기병대는 잡다한 지역 출신들이 뒤섞인 혼성 부대였다.
드 레뮤즈 백작가나 드 상포리앙 백작가 등 생뢰르반 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엘랑키아 남부와 중부의 기사들을 중핵으로 하긴 하지만···.
드 누아 백작가 등 블랑독 출신 기사나, 그 영향력이 미치는 이스키비르 강 건너의 라솔 출신 기사들이 섞여 있는 등 대단히 이질적인 구성이다.
그럼에도 자신, 드 상포리앙 백작가의 후계자인 카렐이 지휘권을 맡게 된 것은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의 호의 덕분이다.
아마도 드 레뮤즈 백작가와 트랑카벨 자작가 다음으로 많은 병력과 비용을 제공한 드 상포리앙 백작가에 대한 존중 때문이겠지.
자신의 재능이 뛰어나거나, 당연히 얻을 만한 위치에 있어서 지휘관이 된 게 아니다. 항상 그런 생각을 잊지 않으며 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실제로, 여러 세력에서 조금씩 모였다는 특성상, 나름 크고 작은 가문에서 골라서 보낸 정예들이 많았다.
때로는 이 부대의 지휘관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관록과 지위를 갖춘 이들 조차도 일개 중장기병으로 종군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잘나서 이 자리에 이른 것이 아니다, 라고 카렐은 몇 번이나 스스로 다짐했다.
첫 출전에서 보였던 추태를 생각하면서.
카렐 드 상포리앙이 경험했던 첫 출전은 리니 능선 전투, 다름아닌 블랑독의 트랑카벨 가문을 위부 세력이 공격했던 첫 전투였다.
신임 콘도티에레 에트 경이 지휘하는, 이제 막 창설된 트랑카벨 영지군의 모체가 될 소규모 부대가 지키는 능선을 향해서. 카렐은 500여 명의 보병을 이끌고 진격했었다.
멍청하게도 트랑카벨 군 방어선 앞을 가로지르는 좁고 긴 늪지대에 정면으로 돌격하고 말았다.
재질 강화라는 기프트만 믿고 억지로 비탈을 오르다가··· 콘도티에레에게 총알을 두 발 얻어맞고는 심장이 터져나가는 통증과 함께 기절하고 말았었지.
그게 사실상 꼴사나운 첫 출전의 끝이었다.
그 사건은 카렐의 인생에 너무나 큰 그림자를 드리웠었다.
일부러 강한 척을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다시 전장에 나선다는 생각만 해도 공포에 질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소년 시절부터 빼먹지 않고 부지런히 지속했던 무술 연습도 언제부턴가 손을 놓았으며, 그토록 자랑스러워 했던 갑옷도 입기는 커녕 보는 것도 두려워 옆으로 치워두기도 했었다.
당시에는 적성에 맞지 않는 군문에서 계속 일하느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백작가의 후계자 수업을 계속한다라는 핑계였지만···.
결국은 도망치고자 했던 것이다. 두려움으로부터 말이다.
그렇게 하고자 하면 못할 것은 없었다. 현 가주이자 아버지인 그레비 드 상포리앙 백작도 아들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특별히 문제삼지 않았고 말이다.
엘랑키아 대귀족의 의무는 기사로서 종군하는 것 외에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블랑독에서 벌어진 성전 기간에 사절 역할을 하며 전장을 오가면서 그렇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남부 귀족들이 라솔 침공에 대항해 연합하게 되면서 더더욱, 또렷하게 자기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느꼈다.
괴로웠다. 이대로는 백작위를 이을 수도, 귀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도 없다 느꼈다.
가신과 병사들을 전장에 몰아놓고 후방에서 기도만 할 수는 없었다. 누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여를 허송세월하고 나서야, 다시 무기를 손에 잡을 수 있었고, 갑옷을 입고 기프트로 다시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두번째 출전, 실수만은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부대를 이끌고 있다.
‘뭐라 말로 표현은 못하겠지만, 콘도티에레의 명령을 따르다 보면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트랑카벨 가문의 장교들과 교류하며 들었던 말이 있다.
‘이게 될까? 하는 의문이 어느 순간 이게 되네! 라고 바뀌는 겁니다. 그걸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의문을 가지는 게 바보같은 일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신념이나 선전, 혹은 세뇌 선동을 통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트랑카벨 영지군에서 1년 이상 종군했던 장교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 자신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에트 경의 명령에 대해서는 걱정도 하지 말고, 의심도 하지 말자고 말이다.
어떤 점에서는 첫 출전부터 콘도티에레, 에트 경의 세례를 받았던 자신이 아니던가.
그게 상대편이라서 그랬지···.
방금 전 출격 명령을 받았을 때는 걱정과 기대감으로 심장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는 잘 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통솔이 뛰어나서라기 보다는, 주요 장교들이 사전에 역할과 의도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상태였고 경험도 많은 기사들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으아아··· 도망쳐!”
“사, 살려주시오! 항복하겠소!”
“아아아! 아아아아아!”
적군은 이제 완전히 붕괴하고 있었다. 병사고 장교고 자기 위치를 지키는 자들이 거의 없었다.
지금 카렐이 이끄는 기병의 수는 예비대를 두고 왔기 때문에 전부 500여 기로, 포위망은 촘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금만 운이 좋으면 무기를 질질 끌거나, 아주 팽개치고 도망치는 적들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전력이 아니다. 최소한 이 전투, 오늘은 다시 전장에 복귀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나머지 적들만 통제하여 다시 정신을 차리거나 무사히 퇴각해 본대와 합류하는 것만 막아내면 된다.
지금 적들이 마치 우리로 몰리는 양떼처럼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죽죽 밀려나가는 꼴을 보자면 이는 어렵지 않게 완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퍼억!
“어엇? 무슨 일이지?”
갑자기 저쪽편에서, 흙먼지와 함께 피안개가 뿌려졌다. 군마 하나가 포탄에 맞아 다리가 잘려 나갔다.
“으악! 으아아아!”
“포탄? 어디서?”
“흐이익, 살려줘! 살려달라고!”
쾅! 퍼퍽! 파악!
콰쾅! 쾅!
포탄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방향으로 봤을 때 절대 첼레스티나 부관의 포대가 오인 사격한 것은 아니다.
“카렐 경, 적 포병입니다. 언덕 아래의 적 포병이 쏘고 있습니다!”
“언덕 아래에서? 자기 편 보병들을 쏘고 있다는 건가!”
“그, 그렇습니다!”
확실히 쏟아지는 포탄은 카렐이 지휘하는 엘랑키아 기사들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놀란 말들이 위치를 벗어나고, 말과 기사들이 포탄에 맞아 죽거나 큰 상처를 입고 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포탄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의 그룬발트 보병들 사이로 뚫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밀도 면에서도 기병보다 포위당해 몰린 보병들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으니 엘랑키아 기병 하나 잡겠다고 그룬발트 보병 대여섯이 쓸려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적장은 제정신인가! 어찌 이럴 수가 있지?”
“포위당한 자들은 신경 안 쓰는 모양입니다··· 카렐 경,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으음···.”
잠시 망설인다. 기병은 포격에 노출되었을 때 절대 그 자리에 머물면 안된다··· 기병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안전한 장소로 물러서거나, 혹은 포격의 원점을 향해 돌격하거나.
하지만 이런 상황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재 적을 포위하며 교전 중인데, 적은 동료를 쏠 위험을 감수하고··· 아니 적군과 아군을 동시에 쏠 작정으로 포격을 하고 있었으니까.
쏟아지는 포격에 당황하는 아군 기병과, 포탄을 피해 오히려 언덕 위쪽, 트랑카벨 보병들이 지키는 방어선을 향해 몰려가는 적 보병들이 눈에 들어온다.
빠르게 결론을 내린다. 에트 경의 말대로, 이번 전투에서는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 이상으로 아군 전력을 온존하는 게 중요했다.
“적 후방으로 부터는 철퇴한다. 이를 사령부의 에트 경과, 반대편의 티테니아 경의 기병대에게도 전령을 보내 알리도록!”
“포위망을 포기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쉽지만, 어차피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혹시라도 에트 경의 질책이 있다면 책임은 내가 지겠다.”
“옛, 카렐 경!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속은 쓰리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그게 가장 나은 판단이었다.
엘랑키아 기사들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둘러 적의 후방이자, 적 포대의 정면으로부터 철수하기 시작한다.
콰앙! 퍼엉!
“으아아아아아!”
“끄아악! 내 다리! 내 다리이!”
포위망이 열리자 우르르 도망치던 그룬발트 보병들의 머리 위로 한 타이밍 늦게 발사된 포탄이 떨어진다.
전장은 이처럼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다. 카렐 드 상포리앙은 최소한 아군의 포탄에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 생각하며, 바닥에 나뒹구는 적병을 동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