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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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티에레께 명령을 듣고 왔습니다! 명령을 전달합니다, ‘첼레스티나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상입니다!”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가 당찬 목소리로 첼레스티나에게 말한다. 엘리스토프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의 판단에 맡긴다니··· 첼레스티나는 괜히 가슴 한켠이 뜨거워졌다. 콘도티에레의 더 할 나위 없는 신뢰의 표시.
그 신뢰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찬찬히 생각해본다. 마침 첼레스티나 자신도 이대로 퇴각하는 적을 방치하는 것은 아쉽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하지만 기동 전력을 가지지 못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었는데···.
방금 콘도티에레가 그녀의 손에 가장 필요한 전력을 쥐어 준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찬찬히 생각한다.
첼레스티나는 자신이 기병 지휘 경험이 많지 않음을 명심하고 있었다.
애초에 슈토르히는 보병 연대니까, 필요에 따라 기병을 임시 고용해 함께 싸웠던 적이 없진 않지만, 그 역할은 주로 다른 사람이 맡았었다.
하지만 또한, 첼레스티나는 자신감이 넘친다.
그런 자신에게 콘도티에레가 믿고 소중한 병력을 맡겨 주었다. 그러니 그녀에게는 분명 이 일을 해 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게 분명하다!
방금 적이 돌격하기 전 징후, 그건 바로 꾸역꾸역 언덕을 올라오던 적의 예비대가 기병이 활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즉 적 보병의 연속성이 끊겼으며, 적 기병은 혼란에 빠진 상태로 도망쳤다. 그게 또다른 혼란을 전염시키듯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능한 빨리, 기병대를 투입해 약점을 드러낸 적을 공격해야 한다.
적군이 올라온 길은 또한 아군이 내려갈 수 있는 길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잠시 전황을 살핀 첼레스티나는 조금 더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티테니아 경, 엘리스토프 경 두 분은 현재 병력이 얼마나 되나요오? 원래 이끌고 계시던 병력 전원을 데리고 오셨나요?”
“맞습니다 첼레스티나 경. 드 몽파르지에의 기병 300명이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희 제32 델레망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4개 중대, 총 4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왔습니다.”
“네에, 그렇다면···.”
분명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의 기병대는 300여 기의 경기병. 그리고 엘리스토프의 마르크릭의 기병대는 2개 중대의 추격기병과 2개 중대의 용기병이다.
아마도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은 엘리스토프 쪽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트랑카벨 영지군 중 가장 바삐 돌아다닌 것으로 유명한 로베르 드 나뵈프 연대장 휘하에서 추격기병대를 지휘하다가 신규 연대장 후보로 발탁되었을 정도니까.
다만 그 휘하의 추격기병들은 덩치가 작은 몽세나 산악마를 탄다. 지구력이 좋고 오르막길도 잘 오르지만, 폭발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정면 돌격에는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용기병의 경우에는 아예 훈련받은 짐말을 타고 있다. 본격적인 백병전에는 아무래도 아쉬운 점이 없지 않으리라.
그에 비해서··· 티테니아의 기병대는 경기병이라고는 하나, 그 ‘명문 군사 귀족’ 드 몽파르지에 가문의 기사와 종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원 손색없는 엘랑키아 군마를 타고 있으며, 갑주를 가볍게 걸쳤다 뿐이지 무장도 훌륭하고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게다가··· 비록 티테니아가 실전은 처음이라고 하지만, 지난 겨울 카르카냑에서 간부 특성화 교육을 받으며 기병 장교로서 자질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걸 보조 교관으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첼레스티나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는다는 말인가.
설령 그녀가 다소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드 몽파르지에 가문을 섬기는 기사들이 훌륭하게 지탱해 주리라 믿는다.
다름 아닌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이 여동생을 전장에 보내면서 보좌를 맡긴 가신들이니까.
머리속으로 마음을 정한 첼레스티나는 명령을 내린다.
“티테니아 경의 기병대가 선두예요. 그리고 엘리스토프 경의 제32 정찰 연대가 그 뒤를 따르고요.”
“옛! 임무 수행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생애 첫 출격, 그것도 선봉을 명령 받은 티테니아는 자기 딴에는 진지한 척을 하려 한 것 같지만 기쁨을 참을 수 없었는지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에 비해 엘리스토프는 다소 아쉬워 보였으나 납득한 것 같다. 애초에 추격기병들의 역할이 한정되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테니까.
“자아, 두 분 여길 보아요.”
첼레스티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는 바닥에 막대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왠지 콘도티에레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가 우리 위치, 적이 올라오는 방향이에요. 이 선을 따라서···.”
하지만 작전 지시는 짧고 명료하다. 승기를 잡은 지금 즉시 행동해야 하니까. 두 명의 기병 지휘관은 진지한 표정으로 흙바닥 위에 그려진 전장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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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고도 새로운 소음이 내 고막을 때린다.
“와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뿌우우우우···.
이미 총소리와 고함, 비명을 포함한 전장의 소음이 사방에 가득한 와중에 오른편에서 강렬한 새로운 외침이 들려온다.
단순히 고함소리와 나팔소리 뿐만이 아닌, 강렬한 기세가 느껴지는 움직임.
“으음?”
평소처럼 다소 구부정한 자세에 음울한 표정으로 전황을 지켜보던 리타르몽 드 당세르가 갑자기 상체를 쭉 펴자, 마치 탑이 일어서는 느낌이다.
“콘도티에레 각하! 첼레스티나 부관님이 반격을 시작하신 모양입니다!”
“그런 모양이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러서는 그룬발트의 검은 갑주로 무장한 기병대를 쫓아 한 무리의 기병대가 전장을 비스듬히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검은 갑주의 기병이라, 분명 그룬발트의 선제후 가문 중 하나가 그런 정예 기병을 육성한다는 말은 들었었는데. 상당한 정예 총기병이라고 했던가.
“드 몽파르지에의 문장! 티테니아 경의 기병이 적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허나 정예고 뭐고 지금은 티테니아의 기병대에 쫓겨 언덕 아래로 달아나는 중이다.
수백 기의 기병이 갑작스럽게 적진 한 가운데로 불쑥 나타나자, 전장 상황이 급변한다.
항상 하는 말이며 생각이지만, 배후에 적을 두고도 잘 싸울 수 있는 병사는 없다.
혼란과 충격이 적진에 파도처럼 퍼져가고, 그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결과로 공포가 남는다.
첼레스티나는 숙련된 기병 지휘관은 아니다. 하지만 전장 상황을 구조화하여 머리속으로 이해한다는 측면에서는 내가 아는한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아마 본인에게 말한다면 얼굴이 빨개지면서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겠지만··· 애초에 포병으로 그렇게 아프게 찌를 수 있다는 것은 전술적 식견도 뛰어나다는 것이고.
그러니 분명 완벽한 타이밍을 찾아냈을 테고, 계산된 각도로 기병대를 ‘발사’ 했을 것이다.
“밀어내! 적이 동요하고 있다!”
“전진! 전진!”
“뭐, 뭐야? 무슨 일이야!”
“물러서지 마라!”
치열하지만 평범한 힘싸움이었던 중앙 전선에도 슬슬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된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귀로 들리지 않더라도 수많은 인간들이 뭉쳐있는 집단에서는 의외로 정보가 쉽게 준비된다.
말을 전하거나 글을 써서 전달된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의 눈치, 뭔가의 기운.
온 몸을 철갑으로 감싸 아무리 둔한 보병이라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유리함과 불리한 상황이 귀신같이 전달된다.
그런데 배후에서 적 기병이 날뛰고 있고, 정면의 적 보병대가 갑자기 힘을 얻은 듯 보인다?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심리적 상황은 당장 효과를 발휘하지는 않지만 마치 천천히 효과를 발휘하는 독처럼 적진을 좀먹어 들어간다.
멀리 드 몽파르지에 기병대 한가운데, 가문의 깃발을 치켜들며 돌격을 이끌고 있는 티테니아의 모습이 보인다.
경애하는 주군의 여동생을 핵심으로 한 매서운 돌격진이 허둥대며 물러서는 적 기병들을 흩어버리고 있었다.
아마도 패기 넘치는 여기사 입장에서는 철저히 몸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부하들의 ‘과잉 충성’에 불만을 가질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에서 위험에 노출시키기에 그녀의 신분은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약간은 그런 점을 고려해서 드 몽파르지에의 기병대를 파견했다는 인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저렇게나 활약하고 있으니까, 그 계산은 확실한 결과를 내고 있는 것이고.
다음 순간, 적 기병대를 바짝 따라가던 드 몽파르지에 기병대가 서서히 속도를 늦춘다.
빠른 속도로 추격하느라 이쪽도 무너져 있던 어느정도 복구하고, 흩어진 병력을 수습한다.
현재 위치는 적진 한 가운데, 여기서 멈추는 것은 어찌보면 위험한 상황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적의 어디든 칠 수 있는 위치이다.
이것 또한 첼레스티나가 미리 준비한 계획이겠지.
그리고 분명, 나에게 자신의 주도권에 맞춰달라는 신호가 분명하다. 역시 그녀는 전쟁을, 전투를,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걸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리타르몽 경! 좌측 기병대에게 전령을!”
“옛, 콘도티에레! 카렐 경에게 미리 작성한 전언을 전달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아돌아간다. 어느 정도는 사전에 계획한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다양한 상황에 맞춰 즉흥적으로 대응하는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시간 낭비 없이 순차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한편, 적 한복판에서 잠시 숨을 고른 티테니아의 기병대는 방향을 바꿔 적 보병의 후방을 노리기 시작한다.
또한, 그 뒤를 따르던 신임 연대장 엘리스토프의 제32 반 연대 역시 적 기병에게 길을 비켜주느라 다소 복잡하게 밀집해 있던 적 보병의 측면을 때린다.
타타타탕! 타탕!
타타탕! 타타타탕!
“대열을 정돈해!”
“적의 사각에 들어가지 마라! 공격! 공격!”
지금 적의 큰 문제는 언덕을 공격하느라 크게 4개의 대열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포격을 포함한 집중 사격에서 피해를 줄일 수 있고, 수적으로 불리한 언덕 위의 아군에게 제파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애초에 보병들이 밀집 대형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서이다. 충분한 폭과 예비대 없는 보병대는 어지간히 화력이 강하더라도 도저히 기병을 상대할 수 없다.
설령 접근하는 기병에게 화력을 투사해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더라도, 마침내 돌격에 성공한 소수에게 대열이 무너지고 마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지금 적의 상황이 딱 그렇다.
얇은 카드 형태로 연이어 배치된 적군은, 정면의 보병을 상대로 한 지속적은 공격에는 어울리지만, 어느 틈에 측면에 후면에 파고 든 기병을 상대할 방도가 없다.
창병도 총병도 대열이 얄팍하다.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은 기병의 마상 사격에도 눈에 띌 만큼 결원이 생길 만큼 나약한 대열이며, 위험을 무릅쓰고 안쪽으로 파고 든 단 한 명의 기병도 포위해서 끌어내릴 만한 인원이 되지 않는다.
기병의 충격력을 흡수할 완충 역할을 해줄 후방 대열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비탈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펑! 퍼엉! 쾅!
그리고 그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기병대를 쏘아 보낸 첼레스티나의 포대가 비스듬하게 적을 훑고 지나간다.
폭이 깊지는 않고, 발사되는 포탄의 수도 많지는 않지만 정확히 측면에서 때리는 완벽한 사격이다.
포탄에 쓸려나가며 창대가 우르르 쓰러지는 것이 본진에서도 똑똑히 보인다.
공격을 준비하면서, 언덕 비탈에서 후면에는 기병, 측면에서는 정확한 포격을 맞게 될 거라 예상한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쪽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아군 보병 대열의 한 가운데이니까.
허나 기병이 지나갈 여느라 잠시 틈이 생겼고, 정신 없이 비탈 아래쪽으로 도망치는 검은 갑주의 기병들 때문에 후속 보병들이 도와줄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타타타탕! 타탕!
“돌격! 돌격!”
“앞으로오!”
마침내 전령이 도착한 좌측에서도 새로운 공격이 시작된다.
이쪽은 기병이 없다. 하지만 숫자가 훨씬 많은 기병들이 있다.
종일 비탈을 오르고,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느라 지쳐버린 그룬발트 보병들이 마치 돌맹이처럼 언덕을 굴러 떨어진다.
막혀있던 공간을 억지로 비틀어 열고, 지금까지 계속 기다리던 엘랑키아 기사들이 돌격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