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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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부관님! 언덕 위쪽은 위험합니다!”
“괜찮아요오··· 조심해서 보고 있어요.”
첼레스티나는 미터스하임으로 향하는 언덕 우측편의 뭉툭한 봉우리 위에서 엎드린 자세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측이 만들어내는 자욱한 화약 연기 사이로 치열한 공방전이 눈에 들어온다.
참호에 들어가 방어 중인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와, 거의 언덕 위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한 그룬발트 보병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선이 일관된 직선이 아니고, 지역마다 집중된 화력이 다르다보니 전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어딘가에서는 후속 병력까지 포함해 참호선까지 적이 밀고 들어와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도 있었으며, 또 어딘가에서는 참호에 다가오는 족족 저격당해 시체만 쌓여가는 곳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참호로 들어오지 못하게 어떻게든 막기만 하면 안과 밖의 높낮이 차이 때문에 후열 참호의 총병들이 화력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참호 안팎에 쓰러지는 적병의 숫자는 늘어만 가고 있었다. 후속 중대가 도착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전멸당했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걱정되는 점이 없지는 않다. 투입된 적의 숫자가 훨씬 많다는 것과, 이제 겨우 두 번째 대열의 공격이라는 점.
그리고 잘 준비된 참호 방어선의 이득을 본다 할지라도 제18 연대 보병들의 체력은 무한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러다 결국 무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첼레스티나의 머리속을 스쳤다.
···만 곧바로 지워 버렸다.
그건 첼레스티나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음음, 나에게 보이는 점이 콘도티에레에게 안 보일리는 없지! 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안심이 되는 것이다.
만약 곁에서 참모로서 보좌하는 도중이라면 보고 정도는 올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혹시라도 콘도티에레가 보지 못하더라도 그 멀대 참모가 바로 확인하겠지. 키도 커서 잘 보일 거야.
문득 첼레스티나 자신도 그렇게 키가 훌쩍 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콘도티에레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크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튼 첼레스티나는 괜한 걱정 대신 자기 일이나 확실히 하기로 결심했다.
이번 전투는 벌써 이틀째지만, 첼레스티나가 지휘하는 10문의 포병대는 한 번도 발사한 적 없다.
일단 가파른 내리막을 방어 중이라 포대를 설치할 장소가 애매했다.
물론 비스듬히 측면에서 쏘거나, 언덕 아래를 노리거나 활용할 방도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일단은 아껴 놓기로 한 상황.
첼레스티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언덕 아래에 늘어선 적 포대를 노려본다. 숫자가 제법 많다. 24? 25문인가?
지금은 여기저기서 백병전이 벌어져 아군을 쏠 위험 때문에 포격을 멈춘 상태지만.
만약 적 포격이 위력을 발휘했다면 대포병 사격으로 노려보았겠지만··· 다행히 적 포격은 거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차적으로는 참호가 적 포탄의 위력을 크게 반감시켰다. 포탄 자체가 폭발하는 것이 아닌, 철이나 돌로 만든 구체이기 때문이다.
원거리 포격에서는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 일단 땅에 떨어진 후, 구르거나 튕기면서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쓸어버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참호가 있으니 높낮이 차이로 넘어가 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쌓아놓은 흙더미에 그대로 박혀 위력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었다.
2차적으로는 적의 조준점이 애초에 좀 높게 잡혀 있어 방어선을 넘어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이 비어있는 미터스하임 마을의 건물들을 무의미하게 때릴 뿐이다.
물론 언젠가 돌아올 마을 주민들에게는 미안한 일이 되겠지만, 비싼 화약을 태운 것 치고는 의미 없는 성과이다.
이는 포격하기 좋은 기준점이 애매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적 포병은 평소보다도 낮은 위치인 참호선 너머에 숨어있는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대신 미터스하임 건물을 노리고 있었다.
눈이 가다보니, 조준점도 자꾸 올라가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참호 앞에 떨어져도 과연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상황과 달리, 참호를 너머 마을에 떨어지면 뭔가가 부서지고 흙먼지가 일어난다.
‘명중’시키고 있다는 확실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게 분명히 성실하게 명령대로 포격에 임했을 그룬발트 포병들을 ‘속이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포병들의 신경과 화약을 빨아먹는 신기루, 생각보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이건 마을 자체에는 수비대가 거의 없는 생뢰르반 파견군의 상황을 그룬발트군 관측병들이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오면, 확실하게 휘하 포술장들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첼레스티나의 포병대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의 포대는 적보다 수는 적은 10문이지만, 그래도 전투의 흐름을 한 번 바꿀 정도의 화력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만약 중앙의 보병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참호 정면의 흙더미를 넘으려 드는 적을 표적으로 쏴버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직 다를 쿠에상 연대장으로부터 요청은 없고, 첼레스티나가 보기에도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은 아니다.
특히 몇몇 포가 장전하고 있는 ‘특별한 탄환’을 생각하면 두어 개 중대 정도는 지도에서 지워 버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겠지.
비탈을 오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빽빽한 그룬발트 보병들의 모습이 보인다.
첼레스티나는 잔혹한 기대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명령 한 마디만 내리면 저들 중 상당수가 순식간에···.
바로 그 순간, ‘의외로’ 스마트한 그녀의 머리가 순식간에 평소로 돌아온다. 공세중인 적 진영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않은 움직임은 아니다.오늘 새벽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여러분, 적이 뭔가 꾸미고 있어요!”
“준비 태세는 문제 없습니다!”
“든든하네요오···.”
물론 그녀의 부하들도 준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터스하임 마을을 중심으로 양 측면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뒤로 빠진 방어선의 앞을 지나는, 좁고도 좁은 길.
적 입장에서는 단숨에 적 후방으로 빠져 나갈 수 있는 활로로 보일 수도 있다.
혹은, 시야가 가려진 비탈 너머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죽음의 길로 보일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지부진한 중앙의 힘싸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갈 한 수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때로는 적이 번한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병력을 밀어 넣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 때가 있다.
혹은 그렇게 착각하게 되거나.
어느 쪽이건, 그룬발트 군의 지휘관은 미끼를 무는 선택을 했다.
이 전투는 생뢰르반 파견군 입장에서는 지연전이고, 그룬발트 군 입장에서는 돌파전이다.
병력 차이는 단순 숫자로 보면 거의 세 배 정도로, 이 만큼의 병력이 주력끼리의 싸움에서 서로 빠져 있음을 생각하면 무조건 이쪽이 이득이다.
즉 이대로 시간이 끌리면 이쪽이 유리, 저쪽이 불리라는 것이다.
물론 콘도티에레가 ‘최후의 한 명까지 전선을 사수하라!’ 따위의 명령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첼레스티나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종합해보면, 콘도티에레는 분명 아군과 적군의 피해, 그리고 벌어들인 시간을 따져 최적의 상황을 도출해낼 것이 분명하다!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첼레스티나는 콘도티에레와 함께 전선을 돌아다니며 약점이 될 수 있는 지점들을 찾아 놓았다.
그리고 당장 전선에 투입되지 않는 기병과 포병들로 이 지점들을 대비토록 했다.
바로 이곳 처럼.
“온다! 와요오! 모두 준비!”
“모두 준비이! 절대 명령없이 점화하지 마라!”
상황이 예상대로 돌아가자, 첼레스티나는 비탈에서 구르듯 내려와 포대 쪽으로 달려왔다.
재료가 부족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 쪽에서 보면 날카로운 말뚝을 향해 들이박는 형국이 되도록 설치해둔 마방책 뒤로 여섯 문의 야포가 대기하고 있었다.
“모두 준비!”
두두두두, 분명 아까까지는 없었던, 땅울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 번이라도 전장에 나서 보았다면, 최소한 연대 단위의 훈련을 참관이라도 해 보았다면 모를 리가 없는 진동이다.
잘 훈련된 기병의 이동.
“진정해요. 신호 전에 포격하면 안돼요?”
“옛, 부관님!”
나란히 늘어선 여섯 문의 야포.
긴장한 채로 점화봉을 쥐고 있는 포수의 어깨에 첼레스티나가 가만히 손을 얹는다.
이들은 트랑카벨 영지군 소속이 아니라, 드 레뮤즈 영지군의 포병들이다.
대부분 생뢰르반 전투 이후에야 포술 훈련을 받았고, 최소한 1년 이상 훈련을 받아온 트랑카벨 포병들에 비해서 숙련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으읏!”
갑자기 눈 앞으로 검은 갑옷을 입은 기병의 무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포수의 어깨가 움찔하며 떨린다.
언덕 비탈을 달려 올라왔으니 당연하지만, 긴장한 눈에는 아무것도 없던 장소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타타탕! 타탕!
탕! 타타타타탕!
참호선이 꺾이는 모서리를 지키던 드 레뮤즈 총병들 역시 놀란 듯 대응 사격을 실시한다.
몇몇 기병들이 말에서 떨어지지만, 가까운 거리에서의 사격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효과는 나지 않는다.
다소 사상자가 발생하는데도 그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검은 갑옷의 그룬발트 기병대는 측면으로부터의 사격을 무시하고 똑바로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권총을 치켜들고, 함성을 지르면서.
다음 순간, 첼레스티나가 포수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주며 외친다.
“쏴!”
쉬익, 퍼엉!
점화구에서 마치 뱀이 위협하는 듯한 소리가 불꽃과 함께 들린 직후, 포구가 굉음과 함께 엄청난 화염이 뿜어져 나온다.
수십 개는 되는 콩알만한 납탄도 함께 말이다.
“2번포, 쏴!”
콰앙!
몇 초 후, 이번에는 오른 편의 포가 불을 뿜는다. 쾅, 쾅, 콰앙! 쾅! 그렇게 순차적으로 모두 여섯 문의 포가 불을 뿜는다.
포대들이 만들어낸 것은 좁은 부채꼴의 지옥이었다.
인간과, 말과.
금속과, 나무와.
육체와 선혈, 그리고 뼛조각들이 만들어낸 지상의 작은 지옥.
혹시라도 눈 먼 산탄에 측면 참호선의 아군 병사들이 맞을까봐 일부러 방향을 틀어 범위를 좁힌 상태였지만, 그렇기에 밀도는 더더욱 높았다.
무수히 많은 전장을 경험했고, 콘도티에레의 수족이 되어 총병과 포병을 지휘했던 첼레스티나조차도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하얀 연기 속에서, 낯선 광경이 떠오른다.
가슴보다 위쪽이 벌집이 되어, 상대적으로 멀쩡한 하체가 경련하는 군마.
나지막한 반대편 봉우리 사면에 촘촘하게 박힌 산탄 자국 위에 기분 나쁜 취향의 모자이크화처럼 뒤덮여 있는 찐득찐득한 무언가.
사지 중 하나 이상을 잃었으나, 용케도 여전히 살아남아 비틀대며 걷거나 기고 있는 기병.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를 덮을 정도로 신선한 피냄새가 화악 하고 퍼져나간다.
그 지옥을 목도하고도, 검은 갑옷의 기병대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뒤에서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 창병 앞으로오! 총병 사격 개시!”
역전의 첼레스티나조차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에 경악해 명령이 몇 초 늦었다.
그녀의 명령에 포병들이 뜨겁게 달아오른 포들을 방치하고 물러서고, 대신 뒤에서 대기하던 창병 중대가 달려와서는 창벽을 만든다.
“발사!”
타타타탕! 타타탕! 따다다당!
탕탕! 타타타탕! 타앙!
산탄 포격이 진행되는 동안 참호 전면의 비탈 뒤편에 숨어있던 드 레뮤즈 총병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꾸역꾸역 밀려오는 적 기병들을 쏘기 시작한다.
“으윽!”
“함정, 함정이다!”
“멈출 수 없어! 전진!”
“멈추라니까! 끄아아악!”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병대는 당장 멈출 수 없다.
정면에는 포병과 자리를 바꾼 창병과 마방책.
좌측면에는 반대편이 가파른 사면이라는 것을 아는 나지막한 비탈.
우측면에는 참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 총병들의 매서운 사격.
그럼에도 어디론가 갈 수 밖에 없다.
그대로 나아가서 창과 마방책의 말뚝에 찔리거나, 좌측으로 밀려나서 사면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우측으로 밀려나서 참호에 숨은 적에게 붙들려 말에서 끌어 내려지거나.
물론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는다. 검은 갑옷의 기병들은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정예 기사들이고 질 좋은 권총으로 무장하고도 있다.
문제는 제대로 조준하기는 커녕, 말을 제대로 몰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꾸역꾸역 중대 단위로 개죽음을 향해 몰려들던 기병 대열이 조금 질서를 찾는다. 그 와중에 무수히 많은 희생을 지불했음은 물론이다.
이걸 이제 어쩐다··· 첼레스티나는 고민한다.
아직 그녀에게는 장전된 4문의 대포가 있었다. 다만 지금은 각도가 나오지 않아 쏠 수 없다. 창병들이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면과 참호선의 창병들을 전진시킬까?
지금이라면 창병들이 슬금슬금 창끝을 모아 나아가기만 해도 적 기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전과를 확대하려면···.
“첼레스티나 경!”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그녀를 부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금 가장 필요한 존재들이 있었다.
“앗, 엘리스토프 경! 티테니아 경!”
첼레스티나가 활짝 웃으며 두 기병 지휘관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