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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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광! 퍼억!
파팍! 팍!
“헉헉···.”
“체력을 아껴라. 너무 서두를 필요 없어.”
미터스하임 마을로 향하는 오르막길. 폴름스의 선제후를 섬기는 보병들이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걸어 올랐던 길은 어제 이웃 연대와 산악병 중대가 올랐다가 끔찍한 피해를 냈던 그 언덕길이다.
소문에 의하면 연대장 중 한 명이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을 정도로 치열했고, 산악병 중대는 살아 돌아온 병력이 겨우 절반에 못 미쳤다고 한다.
대부분이 신병인 그룬발트 보병들은 불안함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슈우웅, 콰곽!
후방에서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포탄이 언덕 위를 때린다. 이는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지원군이 가지고 온 포병들의 지원 사격이다.
때로는 비탈진 흙에 박혀 사방으로 흙더미를 흩어 버리기도 했고, 때로는 적 방어선 후방의 미터스하임 마을에 골조만 남은 건물에 명중해 부숴버리기도 했다.
가끔은 자기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검은 흙을 받아내며, 맨 몸으로 오르는 것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참호를 파고 흙더미 뒤에 들어 앉은 적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안 쏘는 것 보다는 나으리라는 믿음은 있었다.
게다가 어제 무작정 비탈을 오르다가 큰 사상자를 냈던 공격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포병 지원을 포함해 몇 가지 보완이 있었다.
우선 투입된 병력의 수가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았다.
이전 공격이 ‘적의 화력이 집중된 너무 좁은 정면’에서만 이루어져 피해만 입고 실패했다 생각한 그룬발트 군은 접근로 전체에서 한꺼번에 공격하기로 했다.
브라우나인 선제후군의 지원을 받아 총 4개 연대가 좁은 비탈길에 빽빽하게 배치되어 적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거기에 후방에 배치된 예비대까지 포함하면 무려 8천에 가까운 병력이 이번 공격에 투입되었다.
또한, 4개 연대의 막대한 병력은 이전처럼 굳은 대열을 갖추고 언덕을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봤자 꼼짝도 못하고 빽빽하게 몰린 상태에서 적의 집중 사격에 일방적으로 쓰러진다는 것을 지난 전투에서 경험했으니까.
대신, 얇은 판 형태의 4개 대열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밀집도가 낮으니 적의 밀도 높은 사격에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을 테고, 네 차례에 걸친 제파 공격으로 적을 소모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또한, 4개 연대가 정면을 빽빽하게 채우고 올라가니 피해를 ‘나누어 입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얇은 전선의 단점은, 적이 대열을 갖추어 반격해오면 전혀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지만···.
적이 단단한 방어선을 포기하고 밀려 나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꺼워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비탈에 노출된 채로 포격을 포함한 이쪽의 집중공격에 녹아내리겠지.
그러니 그건 고려하지 않는다. 아니, 그래도 상관없다는 당당한 포진이다.
···물론 이것은 명령을 내리는 쪽의 전술적인 판단이며.
맨 앞에서 적의 총구를 향해 행진해야 하는 선두 보병들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째서 오랜만의 실전에 사 분의 일 확률로 맨 앞에 서야 했던가. 오늘의 운세를 저주하면서도 묵묵히 언덕길을 오른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의 임무는 ‘후속 대열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 이다.
맨몸으로 적의 화력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후속 병력을 안전하게 도달시킨다는 무시무시한 임무지만, 어쨌거나 끝이 있는 임무라는 것이 다행이다.
퍽, 퍼억! 콰악!
“으아악!”
부대의 머리 위로 날아간 포탄이 눈 앞에 떨어져서는 시커먼 흙무더기를 사방으로 흩어내며 적 참호선 너머로 떨어진다.
작게나마 비명 소리가 들린 것으로 봐서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나저나 방금은 정말 머리 위로 스치듯 지나갔다. 포격 지원이 든든한 것도 아까까지의 일이지, 이제는 그만 쏴 주기를 바라게 된다.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거점 툴른은 화약의 도시, 포병의 도시로 유명했다. 1천문의 포대로 보호받는 요새라는 이명이 있을 정도로.
폴름스의 선제후와 브라우나인의 선제후는 앙숙관계였기에, 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포병대에게 화력지원을 받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적과의 거리는 얼마 안 남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사격준비!”
가끔씩 고개를 내밀어 이쪽을 힐끗힐끗 바라보던 적의 투구가 갑자기 우수수 모습을 드러낸다. 세로로 받쳐 든 총열과 함께.
갑자기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얼굴이 뜨거워지며 숨이 가빠져 온다.
당장이라도 무거운 장창을 집어 던지고 뒤를 향해 달리고 싶다.
염치 없이 동료들의 등 뒤로 숨고 싶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발 끝에 뭔가 물컹한 것이 걸린다. 어제 언덕을 오르다 비참하게 죽은 동료 병사의 시체였다.
“쏴라!”
타타타탕! 타탕! 타타타탕!
슈슉, 슉! 파악! 퍼퍽!
“끄으으윽!”
“맞았어! 맞았다고!”
“아아아아! 주신이시여!”
눈 앞에 갑자기 하얀 화약 연기로 만들어진 벽이 생기며, 뭔가가 휙휙 날아오며 귓전을 지난다.
주변에서 막대기로 철판과 고깃덩이를 때리는 둔한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오른편과 왼편에서 뭔가가 후두둑 쏟아져 어깨와 뺨에 부딪친다.
뜨거운 액체가 느껴지며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내가 흘리는 피인지, 남이 흘리는 피인지도 알 수 없다.
선두 전열이 우루루 쓰러져 발 밑에 나동그라지며, 나는 이번에는 안 맞았구나 라고 안심하는 순간은 5초도 흐르지 않았다.
타타타탕! 타타탕! 타당 탕!
타탕! 탕탕탕! 탕탕!
“끄아아악! 으악!”
“커헉, 어··· 어억!”
“살려줘! 악!”
이제 절반은 쓰러져 밀도가 낮아져 버린 선두 창병 전열을 또 한번 납탄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다.
“커헉!”
가슴 한가운데 있을수 없을 것 같은 육중하고 뜨거운 충격이 느껴진 창병이 창을 놓치고 뒤로 튕겨지듯 쓰러진다.
바로 뒤에 선 동료가 몸으로 받아줘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는다.
흉갑에 맞은 납탄이 얇은 철판을 부수면서 칼날처럼 얇게 펼쳐졌다. 그대로 흉골을 뚫고 들어갔고 하필이면 기도를 뜯어내듯 박혔다.
운이 없었다. 만약에 근육과 뼈가 튼튼한 팔뚝 등에 박혔다면 경상으로 끝났을 수도 있는 상처였으니까.
“커헉, 커컥! 커억!”
마지막 숨 한모금을 차자 자신의 목을 긁으며, 그렇게 상체가 앞으로 쓰러진다. 다행히도 단말마의 고통은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그의 몸을 지나쳐, 동료 창병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발걸음이 조금 빨라진다. 어차피 맞았어야 했을 사격을 맞았다. 세금과 첫 일제사격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대로 접근해 참호 안에 창을 쑤셔 넣어 이가 갈리도록 미운 적들을 찌를 차례다.
언덕 아래에서 언덕 위를 공격하는 경우에도 장창은 나름대로 쓸만한 무기였다.
그렇게 몇 걸음 쯤 접근했을 때였다. 하얀 화약 연기가 가시고 뿌연 시야가 회복된다.
적의 얼굴이 뚜렷하게 보인다. 창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선두 창병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발걸음이 빨라진다.
일단 적진에 도달해서 발생할 수적 열세는 알 바 아니다. 지금은 단 한명이라도, 증오스러운 적 총병의 목덜미에 창 끝을 박아넣고 싶었다.
타타타타탕! 타타타탕!
슈욱, 슈슉! 슈욱! 빠각!
“...어!”
한 차례 더 총성과 함께 화약 연기가 터져나온 것은 거의 도착했다고 생각한 적 방어선의 뒤편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중 방어선이었다.
두번째 참호에는 첫 참호에 비해 숫자는 적었으나, 견제하는 데는 충분할 숫자의 총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방금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지나쳐 접근했던 창병은 투구에 강한 충격을 받으며 머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젖혀지는 것을 느꼈다.
보고싶지 않았지만, 맑은 하늘이 시야에 가득했다.
그게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그렇게 전선의 정 중앙을 향해 진출하던 폴름스 선제후군의 선봉 창병 중대는 적진에 도달하기도 전에 절반 이상의 피해를 입고 붕괴되었다.
중대장은 진작에 머리가 터져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고, 돌격을 이끌어야 할 장교들이 대부분 쓰러졌다.
젊은 후위 장교 혼자 혼이 빠진 얼굴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보지만 이미 공포로 정신이 나간 창병들은 통제를 듣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선봉 중대들이 그만큼 운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요행히 방어군의 탄막을 벗어났거나, 이웃의 동료 중대가 대신 얻어맞아 박살나준 덕분에 살아남은 자들인 꾸역꾸역 언덕을 올랐다.
혹자는 언덕 안으로 뛰어 드는 데 성공하기도 하고, 참호 바로 앞에서 대열을 갖춰 복수의 사격을 날리기도 했으며, 대응하는 적 창병과 창대를 얽기도 했다.
하지만 언덕을 오르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적진에 돌입했다 해도 수적 열세에 쫓겨 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공격을 이끄는 임무를 맡았던 선봉 부대들이 너덜너덜한 망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을 때, 비로소 후속 대열이 도착하고 있었다.
선두의 동료들이 끔찍한 사상자를 감수하며 버텨낸 덕에,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후속 대열들이 교전에 뛰어들 수 있었다.
미터스하임 전투 둘째 날, 처음으로 그룬발트 군 대열이 성공적으로 언덕을 올라 적 방어선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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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다! 그렇게 밀어 붙여!”
언덕 아래에서 공격하는 부하들을 올려다 보며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들었다.
물론 그의 응원이 부하들에게 들릴 리는 없겠지만.
이번 공격에 참여한 그의 휘하 병력은 2개 연대로, 사실상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있는 보병 전력의 전부였다.
이번에도 공격의 중앙을 맡고 있다. 당연히 적의 방비도 가장 잘 된 지점이겠지.
하지만 중앙을 담당하겠다고 한 것은 떠밀린 결과가 아닌, 미클라크 자신의 판단이었다.
전투의 주역을 동맹에게 넘겨주기 싫다라는 감정적 판단이 아닌, 고향 주변이라 지형에 익숙한 장교들이 많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선두 부대는 다소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무모하게 적진에 바짝 달라 붙었고, 단시간에 끔찍한 피해를 입어 너덜너덜해지는 모습을 보았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예상한 결과였다. 적이 만들어 놓은 화망은 어제 확인했고 아무 대가 없이 지나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후속 병력들이 달라붙어 적의 참호를 밀어 붙이고 있었다.
공격중인 연대에서 보내온 전령에 의하면 적의 예비대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소모전을 벌이면 대등한 것 이상의 결과를 기대 할 수 있으리라.
그 양 측면에는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연대가 각각 하나씩 언덕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 비해 훨씬 지형이 가팔랐고, 걸어서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지형이 좁았기에 대열이 어설프게 무너지고 적과 접한 정면도 좁았다.
그래도 그들이 측면에서 적의 화력을 분산시키고 있었으므로, 중앙의 폴름스 보병 연대들은 좀 더 수월하게 적과 싸울 수 있었다.
설령 현재 공격 부대가 패퇴 당한다 할지라도··· 브라우나인의 예비대는 넉넉하다. 오늘 중으로는 미터스하임을 지나는 길이 뚫릴 것이다.
냉혹한 판단이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주군 네프셀시엔 선제후의 부대와 합류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다소 사상자가 발생할지라도···.
“미클라크 대장님! 세두시온 공의 전갈입니다!”
“무슨 내용인가?”
“아군 보병이 적을 고착시킨 이 때, 기병을 투입해서 적의 좌측면을 비스듬히 공격하시려 하니, 길을 만들어 달라고 하십니다!”
“좌측면을? 지금 말인가!”
“옛, 적의 참호 방어선과 능선 사이의 공간으로 기병대가 충분히 돌입할 수 있다, 라고 하셨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기사대가 이미 이동하고 있습니다.”
“으음···.”
협력을 구하는 게 아니라 결정사항을 명령하는 꼴이다.
기분이 좋지야 않지만, 세두시온 공의 판단이 영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적의 양 측면, 참호선이 마을을 보호하듯 뒤로 꺾이는 지점 앞으로 이어진 좁은 평지는 약해 보인다.
···반대 편의 같은 지형은, 어제 미클라크의 휘하 병력이 빠져 나가려다가 실패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1개 중대 병력이 불과했던 보병들이 빠져 나가려다가 측면에서 사격 받았기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공격을 위해 대열을 갖추는, 검은 갑옷의 기병들이 보인다. 흑철기병이라고도 불리는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기사들이다.
브라우나인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기프티드 대장장이들이 만든 고강도 갑옷과 권총으로 무장한 총기병들이다.
저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연대 병력으로 빠르게 이동한다면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겠다고 전해라. 곧바로 후속 병력의 길을 트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미클라크 경. 서둘러주십시오!”
···아무리 지휘관의 격에서 밀린다고는 할지라도 미클라크가 세두시온의 부하는 아니다. 이런 취급을 받다니 화는 나지만 참을 수밖에.
적 대열을 한시라도 빨리 무너뜨리고 중앙에서 고전중인 부하들의 부담을 덜 수 있다면, 이 정도의 치욕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전령을 보내라! 브라우나인 기병대의 돌격로가 필요하다.”
“옛, 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