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09화 (409/556)

42-6. 랄렌 강 너머

###

“후퇴! 후퇴! 모두 물러서!”

“괜찮나? 내 팔 잡아!”

미터스하임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공격하던 그룬발트 보병들이 아우성치며 물러선다.

부상자들을 질질 끌거나 부축하여 물러서는 병사들의 표정은 죽다 살아난 모습이다. 처음에는 어느정도 질서 있던 후퇴가 어느새 완전한 패주가 되어버린다.

대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일부는 무기까지 분실한 채로 우르르 도망치는 장교와 병사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힐끔힐끔 뒤를 바라본다.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언덕 위의 적은 계속 사격하거나 추격해오지는 않는다.

“이겼다! 이겼다아!”

“트랑카벨! 벨모제에!”

“이겼다아아!”

대신 주먹을 치켜들고 투구를 치켜들며 승리를 만끽하는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를 언덕 아래에서 지켜보던 공격군의 지휘관, 미클라크 벨치 폰 귄터젠은 무력감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무력감이야 당연히, 자신의 명령에 따라 용맹하게 언덕을 오르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부하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는 데서 온 감정이다.

그리고 분노는, 이 무리한 공격을 명령한 것이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데서 온 감정이다.

“죄송합니다 대장님, 저희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닐세. 어서 상처를 치료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게나.”

“알겠습니다···.”

팔에 총상을 입고 돌아온 젊은 연대장이 울상으로 보고하자, 고개를 저으며 위로한다.

절대로 그 젊은 연대장의 잘못으로 공격을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이 공격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공격이다.

미클라크는 용병 출신 대리사령관으로, ‘폴름스 선제후령 남부 영지군’의 지휘를 위탁받은 군인이다.

폴름스의 남부 영지는 선제후령 본토에서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소 애매한 지휘 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심지어 대표할만한 대영주조차 없었다.

그다지 넓지도 않은 외떨어진 영지는 네 명의 자작, 세 명의 남작, 그리고 열 일곱 명의 기사들이 분할해 통치하고 있었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황실이 반포한 귀족법과 지역 실세 선제후들이 따르는 유구한 역사의 상속법, 거기에 지방의 관습법에 인접한 선제후령의 법령이 마구 뒤섞이다보니 종종 발생하는 문제였다.

이 스물 네 명의 소영주들은 각자 소병력을 이끌어봤자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주군인 네프셀시엔 선제후의 허락을 받아 군권을 용병대장 미클라크에게 위임했다.

미클라크는 본인부터가 이 지역 출신이기도 했고, 나름 경험과 지식, 실적도 있는 용병이었기에 이 임무를 명예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폴름스 남부군의 병력은 약 6500여 명으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또한, 벌써 4년 째 이들을 이끌고 있는 미클라크에게 이들은 단순히 클라이언트가 맡긴 병사들이 아니다.

훈련과 교육을 거쳐 길러낸 신뢰하는 수족이나 다름없다. 지휘관인 미클라크도, 휘하 장교와 병사들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 전투가 시작된 첫 날 이미 적지 않은 병사들이 무익하게 죽거나 다쳤다.

소중한 정예 경보병인 산악병들을 가치도 없는 탐색전에 투입했다가 박살났다.

적 숫자도 화력도 예상을 훨씬 웃돌았으며 산악병 중대들은 애초에 뭘 해 볼 기회조차 없었다.

여기서 멈춰야 했으나, 다음 공격 명령은 내려졌다.

그것이 방금 전, 2개 연대를 투입한 정면 공격이었다.

1시간도 안 되는 전투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 대가로 얻은 것은 적 방어 준비가 생각보다 훨씬 용의주도하다는 정보 뿐이었다.

공격에 나선 연대를 이끌었던 연대장, 다행히도 부상을 입지 않은 쪽의 연대장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찾아왔다.

“제2 연대와 제4 연대의 피해는 어느 정도나 되지?”

“대략 500여 명 가까운 병사가 귀환하지 못하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연대장이 내민 약식 보고서에는 출전했던 연대들이 입은 피해가 기록되어 있었다. 단기간의 전투에서 발생한 피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특히 중대장을 포함해 장교들이 거의 다 사망한 중대도 있었다. 우회로를 찾아보겠다고 움직이다가 매복한 적 참호선에 측면을 노출했던 중대였다.

“빌어먹을··· 알겠네. 부상병들을 포함해서 병사들을 잘 챙기고 있게. 초전을 이런 식으로 망치다니···.”

“알겠습니다, 대장님.”

미클라크는 분노에 차 몸을 돌린다. 그리고 성큼성큼 후방에 있는 커다란 막사쪽으로 향한다.

지금 그의 부대에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령관’의 막사였다.

막사를 지키던 호위병이 제지하는 것도 밀쳐내며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사령관’과 참모들이 지도를 펼쳐놓고 무언가 의논하고 있었다.

“세두시온 공!”

“미클라크 경 오셨소? 공격 결과는?”

“...실패했습니다. 선두 연대들은 2할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적 방어선··· 참호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적의 화력이 생각보다 강하군. 수고했소.”

사령관, 단정한 차림새의 엘프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태도에 미클라크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 나온다.

기묘한 광택이 흐르는 푸르스름한 하늘 비단 조끼를 걸친 엘프의 이름은 세두시온이다. 그는 브라우나인의 선제후 가문의 일원이다.

폴름스의 남동쪽에 세력을 가진 브라우나인의 선제후는 폴름스와는 앙숙이었다.

그냥 앙숙인 정도가 아니라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했던 사이이고, 최근 일은 아니지만 미클라크 역시 ‘주적’으로 상정한 것이 다름 아닌 브라우나인의 기습적인 공격일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번 엘랑키아의 공격에 맞서 동맹이라도 맺었는지, 이번에 폴름스 남부 영토로 들어온 브라우나인 군은 침략군이 아닌 구원군이었다.

게다가 지휘를 맡은 세두시온은 가장 고귀한 고대 혈족의 일원으로서, 몇백 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선제후의 유력한 후보라고도 한다.

이미 8천 명에 가까운 병력이 도착했고, 후속 병력이 계속해서 도착할 예정이다.

예전 관계야 어떻든, 후계자가 이끄는 대군을 보내주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문제는 세두시온이 미클라크의 부대를 마치 자신의 전위대라도 되는 것처럼 지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오늘 있었던 두 차례의 무모한 공격이다.

힐끗 세두시온과 참모들이 지켜보고 있는 지도를 보니, 그들은 아마 이곳 미터스하임 전투가 아니라 랄렌 강 동안 전체에서 벌어질 전략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이가 없었다. 이걸 이대로 두었다간 오늘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것만 같았다.

“세두시온 공!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말이오?”

“오늘 공격의 결과로 미터스하임에 대한 정면 공격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아, 그건 나도 보았소. 적의 방어선이 생각보다 단단하더군.”

“예, 맞습니다. 그래서 더 확실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포격 지원도 필요하고 말입니다.”

“흐음···.”

세두시온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더니 미클라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장인이 만든 석고상처럼 매끄러운 피부와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엘프라는 이름의 고대 혈족들은 마치 신이 공들여 깎아내기라도 했다는 듯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클라크는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엘프 족속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 그들의 외모와 태도에서 느껴지는 섬뜩함 때문이었다.

“공격은 내일 시작할 것이오.”

“하오나 세두시온 공, 전투에 참여했던 부대는 이미···.”

“폴름스의 부대가 입은 피해는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오. 이미 계획은 세워졌고 귀경은 이를 실행하기만 하면 되오.”

“이미 계획이 세워졌다니요···.”

“우리 참모가 곧 전달할 예정이었소. 내일의 공격은 귀경의 부대만 나서지는 않을 것이오. 브라우나인의 정예들이 함께 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무작정 미클라크의 부하들만 총알 받이로 보내지는 않는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언덕 위의 적에 대해서 파악이 부족한데다, 브라우나인 군은 이 지역에 대해 잘 모르는데 이대로 공격해도 될 지는···.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적의 병력과 배치에 대해서···.”

“폴름스의 선제후는 귀경이 섬기는 주군이 아니오? 이번 전쟁은 누가 전력을 먼저 집결시키느냐의 싸움이오.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빨리 저 언덕을 오르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오!”

세두시온은 거듭 의견을 말하는 미클라크가 불쾌했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물론 그의 시간에 대한 말은 정론이다. 멀리 있는 1만의 병력보다는 가까운 3천의 병력이 더 중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그의 부대가 언덕 비탈에서 경험한 적의 화력 밀도는 보통 걱정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브라우나인 선제후령의 후계자 마음을 상하게 해도 아무 도움이 되진 않는다. 답답함은 좀 더 마음에 담아두도록 한다.

“...알겠습니다, 세두시온 공. 말씀하신 작전 계획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

야로스 발렌켄드는 생각한다.

그는 실업자 용병이었다가, 이소브론 대공의 호위병이었다가, 얼치기 민병대의 지휘관이었다가, 벼락치기 연대장이었다가, 나라와 동료를 팔아먹은 매국노였다가, 재수 좋게도 적군에게 해방된 죄수였었다.

이제는 막연하게 남쪽으로 향하는 배를 탄 정처 없는 여행자였다가···.

“모두 멈춰! 멈추라고!”

“모두 손을 들어라! 꼼지락대는 놈은 저항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이제 또 뭔가로 전직할 위기에 처했다. 제발 그게 객사하여 강바닥에 던져진 물귀신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가 탄 배는, 랄렌 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뱃전을 부딪쳐온 엘랑키아의 순시선에 습격당했다.

알았어야 했다.

왜 이 허름한 나룻배의 뱃삯이 그렇게 비쌌는지.

왜 따로 나를 화물은 없다니까 그렇게 놀랐는지.

왜 오늘따라 검은 돛을 달고 불도 켜지 않은 채 밤에 항해했는지.

왜 그에게 비싼 뱃삯을 갈취한 선장은 물에 뛰어들어 모습을 감추었는지 말이다.

“너··· 너 뭐야? 선장이 누구지?”

“그게··· 저는 그냥 떠돌이 입니다···. 선장은 아까 나으리들이 불을 켜시자마자 물에 뛰어들어서 어디로 갔는지 잘···.”

야로스는 최대한 불쌍하고 솔직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한순간에 저 영광의 끝자락에서 나락까지 떨어져내린 그에게 자존심 따위는 없다.

물귀신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면, 군화 바닥이라도 핥으리라.

“너, 어깨에 매고 있는 건 뭐지?”

“이거는요···.”

야로스는 어깨에 기대고 있던 칼집에 들어간 검을 내민다.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군용 장검은 현재 그의 재산목록 1호였다.

“이거 검이다! 허리에는 권총까지 차고 있어! 이 자식 뭐야!”

“아이고, 나으리이! 이건 제가 일거리를 찾는 용병이라서···.”

“용병? 어디 출신이지?”

“그게 나우데사에서 태어나기는 했는데요···.”

“나우데사! 반란군의 끄나풀인가! 떠돌이 주제에 권총이 어디서 났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가 가지고 있는 권총은 그를 지하감옥에서 구해준 은인, 옛 상관이자 현 그로이엔펠트 셀커크 연대의 지휘관인 모르네드 셀커크가 준 작별 선물이었다.

원래는 연대가 지난 전투에서 노획한 물건으로, 고지식한 모르네드는 연대 병기관에게 금화를 주고 권총을 사서는 자신에게 준 것이다.

···이걸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믿기는 할까?

아마 야로스 자신이라도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겠지.

그래서 필사적으로 다른 구실을 찾는다. 이런 시기에 굳이 나우데사에서 엘랑키아를 찾아가는 구실을.

“엘랑키아 병사님들! 사실 저는 병사님들과 마찬가지로 엘랑키아를 섬기는 용병대 소속입니다!”

“용병이라고?”

“그, 슈토르히 연대라고, 엘랑키아 남부에··· 그 뭐더라, 블 어쩌구라는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부대인데 소집령을 받고 복귀 중입니다···.”

“슈토르히? 슈토르히라고 했나!”

병사는 이름을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야로스의 순도가 8할 정도 되는 거짓말은 통할 것인가.

“슈토르히가 뭔데?”

실패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