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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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앙··· 탕··· 타아앙···.
서쪽 언덕 너머 숲에서 희미하게 총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적은 길이 아닌 비탈을 통해 언덕을 우회해 보려 시도했던 것 같다. 거기 매복해 있던 아군이 기습했고 교전이 벌어진 모양이다.
어쨌거나 총소리는 상당히 멀다. 애초에 자신이 신경을 쓸 일도 아니고.
아르옌 그로반, 과거에 방어 교회 소속의 수도사였으며, 현재는 트랑카벨 영지군에 지원해 선발 사수로 복무중이다.
그는 마을에 몇 안되는 2층 건물 지붕 한가운데의 마룻대에 총을 기대고 전방, 다가오는 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구로 장전해야 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불편한 자세였다. 하지만 남들보다 먼 거리에서 가치 높은 표적을 노리는 저격수에게 적합한 위치기도 하다.
겨울 동안 카르카냑에서 받았던 지옥 훈련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장전하는 요령, 누워서 다리 사이에 총을 끼우고 장전하는 요령 등등.
‘통상 전열을 구성하는 총병들에게는 명중보다 연사를 신경쓰라고 하지만, 선발 사수는 연사보다 명중을 신경써야 해요.’
첼레스티나 교관은 그렇게 말했다. 주의 깊게 전장을 살피고, 표적을 찾아 조심해서 사격한다.
명중은 확률에 맡기고 총구의 개수로 밀어 붙이는 전열 일제사격과는 전혀 다른 전술이 필요했다.
게다가 좋은 위치를 잡았다 해도, 처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위치가 노출된다.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총연 때문이다.
위치를 들켜 반격을 받게 되면, 느긋하게 적을 살필 여유는 없어지고 심지어 위치를 옮겨야 할 수도 있다.
아마 이 지붕 위도, 목조 건물이 총알을 막아 줄 만큼 충분히 튼튼하지는 않으니 총격전이 시작되면 내려가야 할 수도 있었다.
선발사수들은 독특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소대 정원이 소대장을 포함하여 5명이고, 거기 또 부소대장까지 한 명 있다.
이는 소규모로 적합한 위치에 배치하기 위해서였으며, 부소대장이 있는 이유는 부대를 3명과 2명으로 또다시 쪼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첼레스티나 교관의 말로는, 언젠가는 각자 한 명 한 명이 독립된 부대로 행동하며 위치와 표적을 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은 먼 길이다.
‘일반 사수는 나에게 가장 위협적으로 보이는 상대를 노리면 되지만, 선발 사수는 종합적으로 위협적인 상대를 노려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일개 보병으로 싸울 때는 나를 노리는 적을 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로는 부족하다.
물론 그걸 위해 좀 더 안전하고 시야가 좋은 위치에 매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적의 총격을 받으면서도 전혀 다른 적을 노려야 할지도 모른다.
아르옌은 자세를 고쳐 앉고 몸을 앞으로 숙여 마룻대에 기댄다. 최근 지급받아 처음 걸친 투구와 흉갑이 아직 익숙하지 못하다.
마룻대 너머로 다가오는 적,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보병들을 살핀다.
“이번에는 사격을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옆에서 함께 매복하고 있던 소대장이 그렇게 말한다.
“조금 애매하긴··· 합니다.”
현재 부소대장인 아르옌 역시 동의했다.
이번 적의 공격은 대대적인 공세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중대 규모의 부대 몇 개가 산개 대형으로 우선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넥시의 성벽에서 내려다 볼 때 느꼈던, 조준 따위 하지 않아도 어딘가는 맞을 것 처럼 보였던 빽빽한 대군의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교전을 통해서 아군의 화력과 배치를 확인하려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저 선두 보병들은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아르옌은 갑자기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언덕을 오르는 그룬발트 보병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아마도 소대장의 말은 저런 중대급 부대에 굳이 노려야 할 가치있는 표적은 없다는 말이겠지.
분명 참호까지 파고 잔뜩 준비하고 있는 정면의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총병들에게 접근도 못해보고 쫓겨 날 것이 분명하니까.
소대장의 이름은 얀이라고 했다. 아르옌과는 선발 사수 동기로, 생뢰르반의 혈전 한가운데서 싸웠던 인물이라고 한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남들보다 2할 정도는 더 긴 총열을 가진 멋진 청동제 화승총은 그 전투의 전리품이라고 하던가.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아르옌도 잘 안다. 그쪽 전선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참혹한 부상병들의 상처를 붕대로 감쌌던 것이 바로 자신이니까···.
“우리는 적 본대가 올 때 까지는 사격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별도의 명령 전까지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확실히 역전의 용사다운 관록이 느껴지는 소대장이다. 아마 아르옌 자신이 지휘를 맡았다면 일단 쏠 생각만 했겠지.
현재 소대장과 부소대장들은 모두 아르옌과 동기, 그 밑의 소대원들은 다음 기수의 멤버들이다.
‘이게 군대란 성직자 조직과도 같아서, 모든 게 짬순이라네! 짬에서 밀려 어떤 수모를 당할 지 모르니까!’
스승님의 지혜로운 조언을 따랐던 덕분이었다. 과연 부소대장을 맡은 게 자신에게 더 좋은 일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탕! 타탕! 탕!
적진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며 산발적으로 사격이 시작되자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린다.
하지만 적은 언덕 위에 선발 사수들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는지, 총알이 이쪽으로 날아오지는 않는다.
일단 총을 발사한 선두의 적들은 멈춰서 재장전하고, 뒤이어 온 적이 몇 걸음 다가와 발사한다. 느슨하게 거리를 두고 이를 반복한다.
적은 대열을 갖추지 못한 게 아니라, 산개 대형으로 행동하는 것을 훈련받은 산병들이었다. 어쩌면 정예병일지도 모른다.
탕탕! 타탕! 탕!
탕! 타타타탕! 타탕!
점차 적이 쏘는 사격의 밀도가 높아지지만, 아군 방어선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아직 거리가 애매하다.
슬쩍 고개를 다시 내민 아르옌은 만약 자신이 적을 노린다면 누구를 쏘았을지 고민한다. 역시 가장 중요한 표적은 장교와 기수이다.
교전이 시작되면 후방에 뒤섞일테니, 교전 직전 선두 부근에서 지휘하는 상황을 노려야만 한다.
특히 창병이면 창대가 겹쳐져서, 총병이면 뿌연 총연에 가려져서 아예 보이지 않게 되니까. 바람의 방향도 중요했고.
탕! 탕탕, 탕!
타타타타탕! 타타타타타탓!
따다당! 타타타탕!
“으읏, 크아악!”
“아악!”
“끄으윽!”
보다 가까운 쪽에서 요란한 밀도의 총소리가 울린다. 잔뜩 기다리던 수비군의 화력이 뿜어졌고, 위태위태하게 비탈을 오르던 적병이 무더기로 쓰러진다.
“멈추지 마라! 반격해라!”
“쏴! 쏴버려!”
타타탕! 타탕!
적은 몸을 낮추고 더 다가오진 않았지만 물러서지도 않는다. 산개대형 그대로 장전을 하며 거듭 사격해온다.
뿌연 화약 연기 속에서 적의 목숨을 끊어놓기 위한 뜨거운 납탄이 오간다.
“적 지휘 장교와 부사관들을 노려 사격한다. 모두 첫 사격 이후 위치를 이동한다.”
“예, 소대장님.”
아르옌은 기다렸다는 듯 총구를 겨눈다. 무거운 중화승총이지만, 마침 지붕의 마룻대에 기대 조준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늠쇠 위에 총연 사이로 언듯 드러나는 희끄무레한 그림자를 노린다. 일부러 정면이 아닌, 비스듬한 측면에 있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상대를 노린다.
“발사!”
소대장의 명령에 호흡을 가다듬고 서서히 손가락에 힘을 넣는다.
타앙!
육중한 반동이 어깨를 때린다. 표적을 확인하기 전에 서둘러 지붕 끄트머리로 이동한다.
타앙! 타탕! 탕!
파가각, 파각! 퍽!
앞서거니 뒷서거니 선발 사수들이 모두 사격을 끝내고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뒤에서 지붕에 총알 박히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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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화약 연기 속에서 전투는 점점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위력 정찰로 보이는 척후 선발대가 철수한 이후, 최소한 2개 이상의 연대급 부대가 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쏴라!”
타타타탕! 타타탕!
이번에는 좌측, 드 레뮤즈 보병대가 배치된 방어선 쪽에서 총소리가 울린다.
“끄아악! 매복이다!”
“총병 앞으로! 이대로 반격한다!”
적은 언덕 아래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아군의 참호선을 확인하지 못하고 움직이다가, 아군 방어선과 기어 올라가기 어려운 가파른 비탈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피해야 하는 폭발형 무기가 많지 않고, 장전과 후열 교대를 위해 공간이 많이 필요한 이 시대의 참호선은 현대전의 개인호 중심 참호와는 개념이 좀 다르다.
총병 한 명의 화력이 뻔한 상황에서 좁고 깊은 참호선에 한 줄로 늘어서봤자 밀집 대형으로 접근하는 적에게 별다른 저지력을 보여주지 못하겠지.
개념적으로 지표면에 설치된 바리케이드와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땅을 파고 거기서 나온 흙을 정면에 쌓아 추가적인 엄폐 효과를 노린다고 해야 하겠다.
이를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는 무척 잘 이용하고 있었다. 일부러 굴곡진 지형을 이용하거나, 아니라면 흙을 쌓아 시야를 가리는 식으로 말이다.
어쨌든 언덕 아래에서 접근해야 하는 적에게는 우리 병사들이 상체를 내밀기 전에는 방어군이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콘도티에레 각하! 선두 중대들은 보유 탄약의 절반 이상을 소모했을 겁니다. 혹시 모르니 탄약 보급반을 보냈습니다.”
“알겠네.”
수석 참모 리타르몽 드 당세르가 알아서 전방 부대를 잘 조율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어쩌면 이 꺽다리 참모의 눈에는 ‘세상이 숫자로’ 변환되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게임에서 부대의 스테이터스가 머리 위에 보이듯, 해당 부대가 가진 병력과 물자의 증감이 즉각즉각 파악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이건 주의깊게 신경을 쓴다면, 훈련받은 참모는 누구든 할 수 있겠으나 마치 원어민과 뒤늦게 언어를 배운 늦깎이 우등생처럼 어떤 과정이 하나 생략되어도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솔선해서 사람을 장악하고 따르게 하는 식으로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를 지휘하는 다를 쿠에상 연대장과 은근히 잘 맞는 조합일지도 모르겠다.
“부대에 가해지는 압박은 어떻지? 혹시라도 위험한 전선은 없나?”
“지금은 괜찮습니다, 콘도티에레 각하! 제가 보기에 적군은 아군의 배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진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겠네. 중앙의 제18 연대가 가장 중요하니, 다를 연대장을 잘 보좌해주길 부탁하네. 나는 잠시 우측면을 살피고 오겠네.”
“옛, 맡겨주십시오!”
리타르몽 참모의 전장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 설마 키가 커서 그런가··· 라는 농담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언제나처럼 부러질 듯한 몸으로 건들거리며 서 있는 모습은 장교로서 위엄있어 보이는 모습은 아니나, 그 음울해보이는 눈은 정확하게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 본인이 속한 연대가 담당한 중앙 전선은 맡기고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다.
적 역시 아군을 파악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해 왔듯, 이쪽 역시 적군의 규모와 편성, 기동로 등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땅파기 전문가,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병사들이 고생해준 덕에 참호선은 완성했지만 전장을 충분히 살펴볼 여유가 없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마을 주변의 보병 방어선을 벗어난 측면의 넓은 사면은 기병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어서 다소 불안하다.
뭐 비탈이 가파르기 때문에 보병이든 기병이든 적이 쉽게 오르지는 못하겠지만, 또 어디선가 괴상한 틈이라도 찾아내서 기어 오르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나는 측면으로 이동하면서 하얀 화약 연기로 빽빽한 전방 쪽을 바라본다.
현재 일부 예비대를 제외하고 전방에 배치된 아군은 전력으로 화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 첼레스티나의 포병대는 아직 대기하고 있지만.
일부러 힘을 좀 아껴두고 적에게 오판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 경우, 아군의 화력을 잘못 파악한 적이 과도한 밀집대형으로 병력을 돌입시켰을 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강점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적을 격멸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끌어 본대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전력을 다해 적이 질릴 정도로 집중공격을 하기로 했다.
이쯤에서 질려서 언덕 오르는 것을 포기하면 좋을 텐데.
적군 역시 이런 데서 비비적거리며 병력을 잃는 게 목표가 아니라, 포위된 로델베르크 쪽으로 행군하는게 목적일 테니까.
혹시라도 적이 이 길을 포위하고,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크게 우회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파견대의 역할은 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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