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405화 (405/556)

42-2. 랄렌 강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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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 쿠쿵, 쿵! 콰앙!

공성포가 화염과 폭음을 뿜으며 힘차게 포탄을 쏘아 올린다.

성인 머리통만한 거대하고 육중한 포탄이지만, 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 굉음과 함께 성벽을 때린다.

사방으로 깨진 돌조각이 튀며 포탄에 맞은 부분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무너진 성벽 너머로 드러난 수비군들이 아우성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마치 갑자기 파헤쳐진 개미굴을 보는 것 같다.

몇 세기 전에 지어진 성벽은 당시에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무너뜨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견고한 요새였을 것이다.

지금도 그 견고함이 빛이 바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오로지 성벽을 무너뜨릴 목적으로만 만들어진 거대한 공성포의 탄환을 몇 번이나 버텨 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벽돌을 쌓아 올린 두터운 석축 성벽은 포격에 상대적으로 강한 편이긴 하다.

포탄에 맞으면 그 부분만 깨져 나가고 나머지 벽돌들은 서로 엮인 상태로 버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구간에 계속해서 포탄이 쏟아지면 벽을 유지하던 구조가 약해져 결국엔 너무 블럭 무너지듯이 무너질 수 밖에 없지만.

지금이 바로 그렇다.

폭 7미터 정도로 돌출된 비탈진 외벽에 아홉 발 째 포탄이 명중하자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다.

수비병들이 필사적으로 가져다 막은 임시 수리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무너진 성벽을 지탱할지는 몰라도, 포탄의 위력을 경감하지는 못하니까.

로델베르크는 랄렌 강 동쪽으로 며칠 거리 정도에 있는 큰 성이다.

과거 랄렌 강 서안이 폴름스 선제후 가문의 영토였던 시절에는, 메이플링겐 공작령과 폴름스 본토를 잇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성 내부가 모두 여섯 구획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거주구와 상업구, 그리고 군사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허나 메이플링겐과 팔츠부르크의 함락 이후, 상업적 가치가 떨어져 현재로서는 영토의 서부 변경을 지키는 크기만 큰 요새일 뿐이다.

지금 그 성, 폴름스의 선제후 본토로 향하는 관문 요새를 엘랑키아 군이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뻐엉! 쾅! 퍼엉!

하지만 그저 포위만 하고 있을 뿐, 공격에 나서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공성포병 뿐이다.

아니, 공성포병 조차도 ‘부지런하게’ 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포탄이 무거운 데다가 포구의 위치까지 높은 공성포를 장전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일단 포탄을 사람의 힘 만으로 포구로 밀어 넣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사 속도는 그 이상으로 늘어지고 있었다.

장전수들이 여럿 달라붙어 땀을 뻘뻘 흘리며 포를 원위치시키고 안팎을 닦아 열기를 식히고 나면, 즉시 화약을 장전하는 대신 포술장은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무려 한 시간짜리 모래시계다. 그 동안은 휴식시간으로, 포수들은 절반씩 번갈아가며 쉰다. 잡담을 하든, 도박을 하든, 심지어 꾸벅꾸벅 조는 것도 자유였다.

그리고 그 모래시계가 완전히 다 떨어지고 나면 그제서야 포술장의 호령에 따라 장전을 시작한다. 그렇게 정해진 목표로 포탄을 쏘아 보낸다.

그걸 하루 종일 반복할 뿐이다.

모두 여섯 문의 공성포가 그렇게 번갈아가며 포격을 가하고 있었고, 이것 뿐인데도 이틀 째에는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남서쪽 망루에서 보고! 성벽에 2미터 정도의 구멍이 났다고 합니다!”

“어서 수리하라. 적의 공격은 아직인가?”

“아직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놈들, 무슨 생각이지?”

로델베르크 성주, 핀타펠트 타핀 폰 클리펜 남작은 엘랑키아 군의 생각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초반에는 완전히 허를 찔렸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찔린 것이 맞았다.

엘랑키아 군이 강을 건넜다는 전령이 핀타펠트 남작에게 도착한 시점에, 이미 로델베르크 성의 가장 높은 망루에서는 육안으로 적의 선봉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경기병 중심의 천 명 남짓한 선봉대가 감히 로델베르크 공격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들의 목적은 로델베르크 공격은 아니었다. 대신 주변을 돌며 상인 집단을 습격하고 마을 주민들을 겁박해 소개시켰다.

가장 최악은, 전시 규약에 따라 로델베르크로 합류하려는 지방 영지의 병력과 보충 물자가 차단당했다는 것이다.

밤을 틈 타 성벽으로 접근하려던 소수의 보병대는 새벽녘에 적에게 습격당하기도 했다.

훨씬 많은 수의 기병에게 포위당해 버티던 보병들은 해가 뜨고 적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대로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다가 학살당하는 광경을 성에서는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와주러 가기에 성이 보유한 기병의 숫자는 너무 적었고, 전투 현장은 성문에서는 너무 멀었다.

이론상 임전태세를 갖춘 로델베르크 성에는 모두 6천 명의 병력이 집결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지금 성에 모인 병력은 간신히 4천을 넘을 뿐이다.

물자 또한 비상시에 상정한 것에 비해 절반도 못될 정도로 부족했다.

단순히 병력과 물자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성을 둘러싼 기병들의 흉흉함은 정보 또한 끊어버렸다.

어차피 싸울 생각이고, 빠르든 이르든 포위당하게 되면 안팎의 연락은 끊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부족한 병력을 쪼개 여섯 개의 구역에 나누어 배치했다.

로델베르크의 강점은, 거대한 면적을 둘러싼 성벽이 모두 여섯 개의 독립된 구획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부분적으로 함락당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구획으로 후퇴해 문을 닫아걸고 버틸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게다가 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어지간한 대군이 몰려오더라도 모든 구획에 대한 동시 공격은 불가능하다. 물리적으로 말이다.

이런 점은 수비하는 입장에서 고무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분한 점도 있었다.

핀타펠트 남작은 사실상 대 엘랑키아 최전선이 될 수밖에 없는 요새의 성주로서 몇 차례나 문서로, 때로는 직접 찾아가 탄원했다.

수백 년 전에 건설된 로델베르크는 여전히 장대하고 훌륭한 요새지만, 합당한 최신화 개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현재 성에는 너무도 큰 약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원거리에서 공성포에 공격당하면 수비군은 성벽이 버텨주기를 기도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거대한 성곽의 각 모퉁이를 지키는 다섯 개의 성채와 중앙 성채에 포좌를 건설하고 장거리 포를 배치해야 한다.

핀타펠트 남작이 수도 없이 주장했던 내용이다.

하지만 그의 주군, 폴름스의 선제후 네프셀시엔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폴름스 가문에 있어 우선 최순위는 엘랑키아에 빼앗긴 네이플링겐 공작령을 탈환할 군사력의 증강이지, 변경 요새를 난공불락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즉, 선제후 네프셀시엔에게 미래의 전쟁이란 엘랑키아의 공세를 성벽 뒤에서 지키미나 하는 게 아닌, 먼저 나아가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 것이어야 했다.

가신으로서, 핀타펠트 남작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대가 걱정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설령 적군이 로델베르크의 성문 앞에 이르게 될 지라도, 머지 않아 그곳은 어리석은 엘랑크 인들의 묘지가 될 것이니까.’

주군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조를 수도 없는 일.

그래도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건축 당시에 포격전을 상정하지 않은 성벽과 망루는 포대를 설치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로델베르크 성시의 예산을 쪼개 구할 수 있는 만큼 화포를 배치하기는 했으나, 사거리에 포각까지 제한되는 소형 야포로 공성포에 대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만약 적 보병이 성벽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든다면 그 때나 쓸 수 있을 테고, 그런 상황까지 적의 포격을 무사히 버텨 낸다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생전 처음 무시무시한 포격에 시달리고 있는 수비병들은 갈수록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

재수없게 포격에 휘말려 죽거나 다친 동료들의 시체가 워낙 끔찍한 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직접 포탄에 닿는다면 신체의 일부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무너지는 벽돌에 깔려 심한 상처를 입게 되니까.

그래도 지금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이곳을 적의 묘지로 만든다는 주군의 말을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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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꽈앙!

명중탄에 몇 발이나 맞아 위태롭게 서 있던 성탑이 절반으로 뚝 끊어지듯 쓰러지며 성채 귀퉁이가 엄청난 흙먼지로 휩싸인다.

“오오오? 무너진다! 무너진다아!”

“만세! 엘랑키아 만세에!”

병사들이 지르는 호전적인 함성소리가 엘랑키아 군 진영을 뒤흔든다.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드 팔라스 2세는 이 광경을 흐뭇한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왕실군의 원수이자 이번 원정군의 부사령관인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고.

“말씀하신대로 제브레도뉴 공작을 북쪽으로 파견하고, 후속중인 생뢰르반 군에 남쪽으로 향하라고 전령을 보냈습니다.”

“제브레도뉴 공작은 뭐라 하였소?”

“겉으로는 기뻐 보였습니다만···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글쎄, 독자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전장을 얻었다며 기뻐할 수도 있겠고, 주 전장에서 밀려났다며 분해 할지도 모르겠구려···.”

동부의 대영주인 제브레도뉴 공작의 영지군이나, 남부 영주들이 연합한 생뢰르반 파견군이나 왕실군은 아니다.

다고베르 2세의 이번 전략에서 핵심은 왕실군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엘랑키아 왕실군이 집결해서 적과 평야전을 벌인다면 어떤 상대라도 이길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있다.

그래서 최후의 최후까지 왕실군은 손에 쥐고 있고 싶었다.

그렇다고 북쪽과 남쪽에 적을 견제하는 임무는 왕실군 이외의 독립된 군세 중 가장 강한 두 병력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대단히 위험한 자살임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위험함만 따진다면 반드시 수적 열세가 분명할 결전에서 싸워야 하는 왕실군 본대가 더 심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귀공은 걱정되는 것이오, 프레니히 백작?”

“아닙니다··· 물론 폐하의 전략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있을지···.”

“이렇게라도 약점을 보여주지 않으면, 겁쟁이 엘프 선제후가 전장으로 나오기나 하겠소이까?”

“크흠, 그건 그렇습니다만···.”

다소 오만한 시각이기는 하지만, 엘랑키아 군에게 있어 가장 큰 걱정은 그룬발트 군 자체가 아니라, 전쟁이 길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약 10년 전의 전쟁에서도, 메이플링겐 공작의 군대를 초전에 격파한 후로는 전투 다운 전투를 할 수 없었다.

그룬발트의 병력과 지배층에 실질적인 타격을 입히지 않으면, 아무리 땅을 점령한다 한들 아무 소용 없다.

지배 체계가 확립되지 않는 이상, 무력으로 땅을 차지한 점령군은 시간이 흐르면 퇴각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점령지 여기저기 자리한 크고 작은 요새들을 몽땅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말이다.

엘랑키아 군이 전쟁을 오래 할 수 없는 이유야 수없이 많다. 일단 비용 문제와 종군하는 귀족들의 불만 문제도 있으며, 언제 어디서 새로운 전선이 열릴지 모른다.

게다가 빠르게 결과를 내지 못하면, 지금은 지켜보고만 있는 나우데사나 바다 건너 알디온, 심지어 봉신인 엘랑드르와 같은 주변국들도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리하여 다고베르 2세의 전략은 이렇다. 그룬발트 입장에서 ‘이건 싸워야만 한다’ 라는 상황을 만들어 적을 끌어 들이는 것이다.

그건 이 로델베르크 요새가 될 수도 있고, 한발 더 나아가 폴름스의 선제후의 거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를 구하기 위해 그룬발트의 군세가 사방에서 몰려들 것이며, 중앙에 위치한 엘랑키아 왕실군은 마치 개미지옥처럼 몰려드는 적을 처치한다는 것이다.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다.

그룬발트에게 ‘이건 싸워야만 한다’라는 상황은, 물론 중요한 요충지나 가치있는 도시가 위협받는 상황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승기가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구체적으로는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만한 숫자의 엘랑키아 중앙군에 국왕이 덤으로 딸린다.

만약 여기서 승리한다면, 그 당사자는 그룬발트 서부의 구원자가 되는 동시에, 그 존재 자체가 그룬발트에는 위협인 엘랑키아의 현 국왕을 격퇴한 자가 된다.

그게 만약 엘프라면 다른 선제후 가문을 뛰어 넘는 위세가 될 것이며, 인간이라면 새로운 황제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되겠지.

“하지만 폐하, 생프랑보 재상께서 그룬발트의 선제후들이 전에 없이 큰 세력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시지 않았습니까?”

“하하핫, 걱정 마시오. 정말로 상대도 못할 정도로 대군이 몰려 온다면 얼마든지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이니. 짐을 너무 멍청이로 보지 마시오.”

“물론 저는 폐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건 따를 생각입니다만···.”

프레니히 백작은 그렇게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의 주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있기는 했지만.

뭐 그때는 왕실군의 원수로서 끝까지 보필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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