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랄렌 강 너머
###
생뢰르반 파견군은 이틀에 걸친 휴식 후, 랄렌 강을 건너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영토로 들어갔다.
왕실군이 이미 설치해둔 다리 덕분에, 아무런 위험도 문제도 없었다. 다리가 생각보다 요란하게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서 살짝 겁이 나긴 했지만.
드워프 장인 에오르크 레타일의 말에 의하면, ‘소리가 요란한 것은 갓 지은 나무 건물이 자리를 잡아가거나, 무너지기 직전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 차이를 알아야 어디 가서 목수 명함으라도 내놓을 수 있다던가.
괜한 지식으로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의깊게 다리를 살피는 공병대 기술자들을 봐선 일단은 안전한 것 같다.
“오오··· 이곳이 신성 그룬발트 제국!”
말에서 내려 일부러 땅을 밟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나나 첼레스티나처럼 용병 출신이 아니라면 외국에 나갔던 사람들은 많지는 않으리라.
내 입장에서도··· 그룬발트를 떠난 지 오래 되었다. 블랑독에 도착하기 전에는 주로 주디칼리에서 활동했었으니···.
이런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태어난 고향 주변에서 죽을때까지 사는 경우가 많다.
상인이 되어 떠돌거나, 사절 등의 임무로 파견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그렇겠다. 뭐 타국으로 공부하러 가거나, 돈 벌러 가는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한편, 그 이상으로 병사들에게는 ‘적국에 도착했다’라는 점이 상당히 불안하게 느껴지겠지. 확실히 불안해 하는 모습도 보이고.
“그룬발트 제국령에 오니 공기조차 다르게 느껴지는군요. 그렇지 않나요, 리타르몽 경?”
“강 건너와 공기가 다를 이유가 있겠습니까?”
“호오, 리타르몽 경은 참으로 침착하시군요.”
“방금 저희가 건너온 반대편 유역도 10년 전 까지는 그룬발트의 영토가 아니었습니까···.”
“비록 기분 뿐이라 할지라도, 소인은 드 몽파르지에의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그룬발트의 흙을 밟아보는 입장이 되니 감개가 무량하군요.”
간부 특성화 교육의 동기였던 두 사람, 리타르몽 드 당세르와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이다.
나뭇가지처럼 비쩍 마른 하급 귀족 출신의 참모 장교와, 생기가 넘치는데다 명문 공작의 친동생인 여성 기병 지휘관은 나란히 세워 놓으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의외로 두 사람은 자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내가 놀란 점이 있다.
항상 구겨진 옷에 음울한 얼굴로 한 손은 허리띠에 대충 쑤셔넣고 건들거리며 돌아다니는 리타르몽은 생각보다 어두운 성격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충분히 화려하게 치장하기는 했지만, 갑옷 보다는 무용복이 더욱 어울려 보이는 티테니아는 생각보다 오만한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역시 사람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다시금 하게 된다.
오히려 두 사람은 각각 참모와 기병대장으로서 상당히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 루트비히가 추천했고, 앙비토 공작이 병력을 맡겨 그룬발트까지 보냈겠지.
“포대가 무사히 다리를 건너왔어요오, 콘도티에레.”
첼레스티나가 보고를 해왔다. 이번 파견군이 보유한 화포의 수는 모두 9문이다.
4문은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가 보유한 정규 포대 숫자이며, 나머지 5문은 드 레뮤즈 백작가의 포대이다.
생뢰르반 전투에서 노획한 라솔 군의 포를 재생한 물건이며, 첫 실전 투입이라 다들 긴장해 있었다.
“그래, 얼마 정도 시간이 더 걸릴까?”
“이제 절반 넘게 건너온 것 같아요. 다리가 있으니 정말 편하네요!”
“그러게말이야.”
다리가 없었다면 배를 구하느니, 강둑을 파서 완만한 비탈을 만드느니, 먼저 상륙한 보병과 짐말들이 밧줄을 걸어 당기느니 하면서 난리가 났을 일이다.
보급부대의 군수품까지 죄다 실었다 내렸다 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짧아도 이틀은 걸렸을 일이 반나절만에 마무리되는 셈이다.
엘랑키아 국왕 나으리는 어떻게 강에 임시 다리를 놓을 생각을 했을까.
사람들 말에 의하면 종일 전쟁 생각만 한다더니, 단순하게 ‘전투’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전쟁’을 이기는 법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인 것 같다.
어떤 인간인지 조금 궁금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만나면 어색해서 곤란하겠지만.
비교적 가볍게 무장한 엘랑키아의 선봉대가 먼저 강을 건너고, 동시에 다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리 만드는 데 8일이 걸렸다고 하니, 그 전에 옮길 수 있는 건 강 건너로 옮겼으며 남은 물자와 후속 중무장 병력이 다리를 건넌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인상깊었던 것은, 주먹구구식으로 되는대로 강을 건넌 게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된 순서대로 움직인 것이다.
때문에 도강 작전 초기부터 작은 규모의 기동부대가 강 건너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며, 다리가 완성되는 순간 활동 병력이 늘어나고 영역이 대폭 확장 되었다.
이는 전쟁에서 ‘전투’를 제외한 부분은 사실상 행정업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휘관과 조직이 있다는 말이다.
음··· 조금 믿음직하게 느껴지는데.
적어도 생뢰르반 전투 직전처럼 혼란 속에서 고생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말이니까.
문득 그 지휘관들 중 한명, 엘랑키아 왕국의 원수이자 최전방 요새인 팔스부르의 공작인 아르밀 드 브라뇰과의 면담이 생각났다.
노회한 귀족 군인 특유의 다소 경계하는 듯한 태도로 나를 맞이한 아르밀 공작은 철두철미하게 효율적으로 임무만을 설명했다.
그 전까지 만났던 중견 장교들과 같은 장황한 소개나, 자신이 국왕 폐하의 전쟁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따위의 자랑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이번 일전에 왕국의 운명이 달려있다!’ 따위의 의례적인 정신무장 촉구도 없었을 정도니까.
다만 이번 원정의 목적이 무엇이며, 왕실군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고, 생뢰르반 파견군은 어디로 행군해야 하는지.
또한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왕실군 본대와 연락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 등을 이야기 해 주었다.
이번 엘랑키아 군의 목적을 나도 처음 알았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세부 사항은 조금 달랐다고 할까.
첫째, 상대가 대응하기 전에 충분히 위협적인 병력을 진격시킨다.
둘째, 최대한 유리한 포지션을 선점한 상태에서 적에게 결전을 강요, 승리한다.
이 결전의 목적은 그룬발트 서부의 야전군을 최대한 제압해, 다시 결전을 벌이지 못하도록 최대한 때려 부수는 것이다.
셋째, 나우데사로 향하는 보급선을 차단하고 적을 강화 테이블로 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나우데사 반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현실적이고, 한편으로는 화려하지 못한 목표이다.
물론 그룬발트 서부의 야전군을 작동 불능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 것도 상당히 큰 일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그만한 위업을 이루어 놓고도 딱 필요한 목적만 이룬다는 것은 보통 결단력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분명 국왕과 그 측근들은 ‘신성 그룬발트 제국’ 전체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어렵다··· 혹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적당히 이기고, 적당히 영토를 요구한다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부디 계산대로 잘 흘러간다면 좋겠는데.
그렇게 짧고 굵게 상황을 설명한 아르밀 공작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었다.
혹시라도 질문을 받으려는 것인가 싶어서··· 뭔가 질문 거리가 있을까 고민하려는 찰나 오히려 질문해왔다.
‘귀하는 과거에 엘랑키아 북부의 귀족들의 연합군을 격파한 경험이 있었다고 하지. 만약 그게 국왕 폐하가 직접 이끄는 왕실군이었다면 이길 수 있었겠나?’
이런 불편한 질문을 하다니··· 용병으로 일할 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었다. XX와 슈토르히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둥···.
승리를 자신하면 건방지다는 말이 나오고,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면 패기가 없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더라··· 대충 그때는 거기 맞춰서 최선을 다해 볼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뭐.
‘...그렇군. 알겠네. 다리가 비는대로 강을 건너 수송부대의 후위를 지키며 행군하도록 하게. 정확한 경로는 지도와 함께 길잡이를 보내도록 하지.’
더 이상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아르밀 공작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는것 같았다.
아마도 후위를 맡은 그랑다투아 군의 사령관으로서 원정군의 출발 지점인 팔스부르를 지키기만 하는 게 답답한 게 아닌가 싶었다.
듣기로는 그룬발트와의 지난 전쟁에서 엄청난 대활약을 한 덕에 팔스부르 공작령을 하사받은 대단한 용장이었다고 하던데.
분명 내심으로는 이대로 강을 건너 국왕의 곁에서 싸우고 싶었겠지 싶다.
“도강을 모두 마쳤소이다, 에트 경.”
파견군의 최후미를 맡은 드 레뮤즈 기병대의 카렐 드 상포리앙 소백작이 보고해왔다.
나와는 어지간히도 악연인 이 젊은 귀족은 이번에는 기병 지휘관으로서 가신들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의 곁에는 상급 귀족의 성장을 했지만 구리빛으로 탄 피부는 감출 수 없는 에티엔 드 크레이 공작도 함께하고 있었다.
분명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했었지.
“공병대도 이동 준비를 마쳤습니다, 에트 경.”
“수고하셨습니다. 행군 대열의 후미에서 잠시 휴식하시길. 리타르몽 경이 행군 순서를 안내해 드릴 겁니다.”
이제 다시 동쪽으로,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심장부로 행군할 준비가 되었다. 선두 부대는 이미 출발했겠지만.
새삼스럽지만, 그룬발트는 내가 이 세계로 오고 처음 새로운 삶을 부여받은 국가이다. 적응기와··· 용병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스승님은 어떻게 지내시고 계실까···.
부디 스승님과 전쟁에서 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스승과 제자가 적대하게 된다는 껄끄러운 관계가 되는 것도 물론 그렇지만···.
스승님은 무지막지하게 강한 전략가라서··· 솔직히 어찌 될지··· 이길 자신이 없다.
###
아르밀 드 브라뇰, 팔스부르의 공작은 멀리 남쪽에서 온 병력이 강 건너 숲길 사이로 멀어져 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공작 각하, 아침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나중에 먹겠다. 잠시 후 들어가도록 하지.”
“예, 그럼 준비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집사를 집무실로 돌려보낸 아르밀 공작은 묘하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지방 귀족의 삼남으로 태어나 왕실군에 들어가 싸웠고, 그 공로로 적지 않은 것을 이루었다 생각했다.
비록 당대로 끝나는 것이라 해도 공작위를 받았으며, 국왕의 군대를 이끄는 원수가 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최전선 팔스부르의 영주가 되었다.
이런 입지전적인 인물은 엘랑키아 전체를 통틀어도 또 다른 왕실 원수, 프레니히 드 루블랭 백작과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중요한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것이 문제였다.
북방 전쟁에도, 블랑독 전쟁에도 참전하지 못했다. 그는 더더욱 중요한 그룬발트를 상대하고 있어야 했으니까.
방금 만난 애송이 용병이 블랑독을 침공한 군대를 깨부순 인물이라고 했던가.
만명이 넘는 대군을 호령하며 전장을 달리는 용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이도 어렸고, 똑똑해 보이기는 했지만 군인 다운 인상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는 북부 귀족들의 군대에 이어, 법황의 군대 또한 격파했다. 물론 여기저기서 긁어 모은 오합지졸이었겠지.
그렇다 해도 그만한 권위와 숫자를 갖춘 군대, 어지간한 사령관이라면 설령 충분한 전력이 있더라도 정면 상대는 어려웠으리라.
게다가 최근에는 강을 건너 공격해온 라솔의 예봉을 꺾었다고도 한다. 심지어 중앙군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남부의 병력만 이끌고 말이다.
전부터 왕실군의 지휘관들이 주목하던 인물이란 것은 알았다. 신뢰하는 동료인 프레니히 백작은 손녀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던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눴을 때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행도 겸손하고··· 사실 겸손을 넘어 어리숙한 모습까지 보였으니까.
그래서 조금은 떠보고 싶어서 질문을 했더니··· 역시 숨겨두었던 오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국왕 폐하의 친정군이 상대였다면, 또 다른 방식으로 상대했을 겁니다.’
간결했지만, 핵심을 꼬집는 오만한 자신감의 발로.
국왕의 대군조차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자신감을 느끼면서 ‘만약 내가 군을 이끌었다면, 샹다메리에서 쉽게 이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실제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자신도 일군을 이끄는 입장, 그렇게 가벼운 언행을 할 수는 없었으니.
“허나 재미있군.”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온다. 오랜만에 함께 싸우고 싶은 남자였다. 아군으로도, 또 적군으로도.
조만간 마지막 병력이 집결하면, 그 자신이 최후위부대를 이끌고 랄렌 강을 건널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때가 결전의 때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