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출동, 생뢰르반 파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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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12선제후 가문 중 하나인 비젤키르헨의 거점, 아렌슈바이크의 어느 방.
저녁시간이 되어 어두컴컴해진 방에는 인형처럼 아름다운 작은 체구의 엘프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비젤키르헨 장로회의 대모, 세델레네는 자기 앞에 펼쳐진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이미 보고있지 않다.
내용은 이미 외울 정도로 읽었고,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방으로 누군가가 들어온다.
“이모님··· 여기 계셨군요.”
“라오리스? 장로회의는 끝났느냐?”
“예, 이모님.”
“그래, 잠시 앉아서 이야기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라오리스는 소리를 내지 않고 의자를 잡아 빼더니 마주 앉는다. 이모와 조카 관계인 두 엘프 사이에는 한참동안 침묵이 자리한다.
세델레네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으나, 라오리스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무엇부터 말을 해야 할까.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본 건지, 느낀 건지, 세델레네 쪽이 먼저 입을 연다.
“나의 조카야, 선제후가 바뀌게 된 것이느냐?”
“...예, 이모님. 알고 계셨습니까?”
“그건 아니다만, 그렇게나 귀찮게 굴던 장로들이 갑자기 회의 전에 나를 뒷방 늙은이로 쫓아 낸 것만 봐도 결과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예···.”
“내 언니, 네 어머니의 혈통을 치워 버리려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모님.”
짧은 시간, 비젤키르헨 선제후 가문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계기는 카젤하겐의 선제후를 중심으로 한 여섯 선제후가 디오보르크 공작이라는 황제 후보자를 지지한 직후, 엘랑키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여섯 선제후 연합은, 엘랑키아와의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진 폴름스의 선제후를 설득했다.
막대한 황금과 병력, 구체적으로는 엘랑키아와 충분히 일전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지원을 조건으로 말이다.
이는 특별히 밀실의 음모도 비밀도 아니었다. 서로의 이익에 대해 논의하면서 선거 활동을 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 즉 다음 황제가 사실상 정해진 이후 비젤키르헨의 장로들이 취한 행동이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가문 정책 방향성을 뒤집어, 비젤키르헨 역시 디오보르크 공작을 지지하길 원했다.
하지만 이건 선제후 제도의 원칙에 어긋난다. 때문에 긍지 높은 비젤키르헨의 선제후, 라오리스는 선제후 취임 이후 처음으로 장로들의 의견을 거부했다.
황제 선거가 본래 성스러운 것은 아니다. 지지하는 이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얼마든지 야합도 하고, 위협도 하며, 때로는 무력에 의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후보자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유력하니, 거기 가서 줄을 댄다?
인간에게 긍지 높은 고대 혈족 출신인 선제후가?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근 아렌슈바이크의 관세 수입이 예전만 못하다.
비젤키르헨 영내의 유리 공예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당장 내성 경비군의 무장을 신형으로 교체해야 한다.
장로회가 이를 주장하는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디오보르크 공작을 찾아가 지지를 표명하고 도움을 청원하면 받아낼 수 있는 알량한 황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이다.
하지만 선제후 회의는 그렇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때로 과해지는 경우는 있으나, 선제후간의 의견 충돌은 본질적으로 뛰어난 황제를 뽑기 위함이고, 건전한 국정을 위해서이다.
물론 일단 황제가 즉위하면 지지하지 않았던 선제후들이라 할지라도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그리고 충신이 된다. 가장 충실하되 비판적인 충신이.
인간 황제가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50년, 보통은 30년을 넘기도 쉽지 않다. 엘프들의 수명을 생각하면 매우 짧은 시간이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지식과 정보, 그리고 시행착오의 경험은 다음 황제를 선출하고 보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선제후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황제를 선출할 뿐 아니라, 신성 그룬발트 제국이라는 국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데 말이다.
이만한 규모의 국가가 끊임없이 내전을 겪고 다툼을 일으키면서도, 여전히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유지되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기도 했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장로회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그 첫 번째 움직임이 선대 선제후의 친동생이자 혈족의 ‘대모’인 세델레네를 장로회에서 제명했다.
명목상은 역대 선제후들의 영혼을 기리는 제사장, ‘달빛의 순례자’로 임명한 것이지만, 이는 영적인 것에 신경쓰고 세속적인 것에서는 손을 떼라는 결의였다.
다른 몇몇 소수파 장로들 역시 지방관 등의 역할을 맡겨 장로회에서 배제했다.
마지막으로, 다수의 힘을 사용하여 라오리스에게 ‘선제후 양위’를 ‘권고’했다.
선제후란 기본적으로 종신직이고 사퇴할 수 없다. 오로지 가문 내의 다른 고대 혈족에게 양위할 수 있다.
선제후 가문은 사실상 장로회라는 합의체에 의해 움직인다. 선제후는 그 대표자일 뿐이지, 권력자나 통치자는 아닌 것이다.
라오리스로서는 조용히 선제후에서 물러서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제 나는 평범한 한 명의 혈족원이 되었으니 오히려 홀가분하구나.”
“그나마 다행입니다.”
“허나, 나의 조카야, 너는 어떻느냐?”
“예?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모님.”
“나는 네 어머니에게 네 곁에 있겠다고 서약했느니라. 그러니 네가 바란다면 이 모든 폭거를 멈추고 가문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
순간 라오리스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섬뜩함을 느꼈다.
지금 이 작은 체구의 이모님은 담담하게 ‘네가 바란다면 무력으로 되찾아 주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세델레네는 가문의 대모로서, 엘프에게도 인간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지금이야 장로에서 쫓겨났지만, 원래 권력이란 직책에만 딸리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무력을 가진 군인들이 대부분 세델레네의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경력으로 보았을 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용병도 끌어들일 수 있을 테고.
···하지만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쟁탈전 끝에 도시 아렌슈바이크는 파괴 될 것이며, 영민들도 희생되리라.
이제 수가 많이 남지도 않은 고대 혈족들도 말이다.
이는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다. 바로 라오리스의 어머니와, 이모 세델레네가 어린 시절에 말이다.
아마도 세델레네는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어쩌면 그 아수라장을 어린 몸으로 직접 겪었을지도 모른다.
“아니요, 이모님. 그건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구나.”
라오리스는 자신의 말투가 너무 쌀쌀맞게 나와 당황했지만, 세델레네는 상관하지 않는 듯 평이하게 대답했다.
방금 몇 마디의 단어 조합이 바뀌었다면, 어쩌면 아렌슈바이크에서는 수천의 목숨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그건 전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자기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비젤키르헨 가문을 상처입힐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저는 선제후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아직 장로입니다. 제 역할이나 책임이 아직 남아있다 생각합니다.”
“흐음, 마치 내 언니를 보는 것 같구나. 책임감이라니, 나는 가지지 못한 미덕이다.”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세델레네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어린다.
그 모습을 본 라오리스의 마음 속에도 기쁨이 퍼져간다. 어째서인지 이모님이 해주는 칭찬은 타인의 인사치레와는 달리 마음에 와서 닿는다.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셨습니까, 이모님?”
“서부에 있는 믿을만한 친구가 보내준 소식이다. 엘랑키아 왕실의 군대가 팔츠부르크를 출발, 랄렌 강을 건넜다고 하는구나.”
“버, 벌써 말입니까!”
“그렇구나. 아직 국왕 본인이 함께하고 있는지는 확인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 어리석다니, 누구 말씀입니까?”
“우리 그룬발트의 대처 말이다. 팔츠부르크 조약은 우리 팔다리를 묶고 있는 ‘약속’이지만, 이는 엘랑키아 측에도 마찬가지였다는 말이다. 좀 더 상대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기회였는데··· 폴름스의 바보가 전쟁을 서두르고 말았구나.”
폴름스와 다른 여섯 선제후 가문의 협약이 맺어졌다고는 해도, 거리 상의 문제로 아직 지원이 폴름스에 도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게 준비 된 후 까지 기다렸다면 상황이 조금 낫지 않았을까.
“물론, 폴름스의 바보도 나우데사로 향한 줄 알았던 엘랑키아 국왕의 주력이 며칠만에 팔츠부르크에 나타날 줄은 몰랐겠지 싶구나.”
“북쪽의 나우데사로 향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 배후를 노리려고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말이 맞겠구나, 조카야. 큰 일을 앞두고는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이니까 무작정 비난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겠느니라.”
세델레네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한숨을 포옥 내쉰다. 그녀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폴름스 가문과도, 이를 지원하는 여섯 선제후 가문과도 관계가 없다.
아마 분위기를 보면 향후 비젤키르헨 역시 이를 지지하게 될지 모르나, 방금 실권을 모두 잃어버린 참이다.
정세를 누구보다 냉정하게 분석해 보아야 소용도 없고, 들어줄 이도 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모님?”
“내 새로운 역할은 달빛의 순례자이니라. 훌륭하고도 훌륭한 내 언니를 포함한 비젤키르헨의 선제후들을 기리는 여행을 떠나야겠지 않겠느냐.”
“예··· 혹시 전에 말씀하셨던 제자를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엘랑키아와 관계가 더 험악해 지기 전에 가는게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 참이다.”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흐음?”
세델레네는 우물쭈물하는 조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으나, 쉽게 꺼내지 못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잠시 생각하던 세델레네는 이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혹시라도 내가 그룬발트에 적대하는 역할을 할까 걱정이 되는 것이더냐? 그럴 거면 나를 장로 자리에서 쫓아내선 안 되는 일이 아니지 않더냐!”
“저는 그렇지 않지만··· 장로들 중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허어,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와서 물을 것이지, 조카에게 불편한 짐을 지우는 것이냐! 어리석은 자들··· 쯧!”
세델레네는 짜증을 부리며 의자에서 내려오더니,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자신보다 커진 조카의 손을 잡는다.
“아렌슈바이크는 내 언니가 재건한 도시이고, 또 네가 살고 있는 곳이다. 네가 여기 있는 한, 나의 절반은 네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니라.”
“예! 예에, 그렇군요, 이모님.”
“힘들면 포기해도 괜찮다, 조카야. 만약에라도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달려와 돕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물끄러미 조카의 얼굴을 올려다 보는 세델레네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미소가 퍼진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은 내가 아렌슈바이크를 비우는 게 나을 것이다. 라오리스 너에게도, 또 장로들에게도 말이다.”
“예, 괜히 자극하지 않는 게 좋겠지요. 자기 그림자를 보고도 놀랄 속 좁은 노인네들이니.”
“아하하, 맞구나, 속 좁은 노인네들이니라. 나이는 내가 더 많지만.”
“앗! 그런 의미로 한 말은···.”
라오리스는 웃으면서도 눈물이 찔끔 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이 다 맞았다. 아마도 그녀의 도움이 당장 필요할 일은 없으리라.
하지만 수많은 비젤키르헨 가문 소속의 가신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그녀가 자신을 지지한다는 것은 분명 큰 힘이 된다.
“엘랑키아 국왕이 직접 군을 일으켰으니, 그 힘은 상당히 강하겠지. 허나 이번에는 이 둔한 그룬발트 제국 또한 그 절반이 떨쳐 일어나지 않았더냐? 쉽사리 위태로운 상황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예··· 이모님.”
“기왕 이렇게 되는 거, 디오보르크 공작이라는 자에게 얻어낼 것을 충분히 얻어내길 빌자꾸나.”
“저도 너무 편중되지 않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나의 제자가 있는 곳은 엘랑키아 남부라고 하니, 그 곳으로 가 봐야지. 주디칼리에서 배를 탈 생각이다.”
“위험한 전쟁터를 지나시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편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엘랑키아는 거의 300여 년 만이니 어떻게 변했을지 기대되는구나.”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는 이모를 보며, 라오리스는 마주 웃는다.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