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출동, 생뢰르반 파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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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국과 주변 국가, 특히 나우데사 연방과 신성 그룬발트 제국 사이의 외교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혹시라도 내가 아직 듣지 못한 최신 정보가 있지 않을까··· 하고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팔스부르 조약에 의해 임시로 봉합되었던 두 나라, 신성 그룬발트 제국과 엘랑키아 왕국 사이의 갈등은 언제라도 재발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엘랑키아는 전쟁을 계속해서 전과를 확대하고 싶었으나, 국내외의 사정으로 시간과도 싸워야 하는 상태.
그리고 그룬발트는 엘랑키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공격해왔고, 현지 야전군이 전멸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평화에 동의했을 뿐이다.
다만 억지로 조립된 평화라 하더라도 지키지 않을 방도는 없었으니까. 한동안 양국 사이에서는 평화가 이어졌다.
양측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아니더라도 평화는 평화였고, 그것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의외로 일정 수준 이상의 문명국들, 특히 같은 문명권에 속하는 두 국가가 한 번 맺은 조약은 쉽게 깨지지 않는다.
외부, 즉 다른 나라에서 보는 눈은 물론, 내부에서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외교적 고립이나, 국내에서 지지자를 잃고 반대파에 구실을 주는 행동을 굳이 하려는 통치자가 있겠는가. 만약 있다면 유불리를 판단도 못하는 얼간이겠지.
힘 있는 자가 무력으로 땅을 실질 점유하다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대륙을 지배하는 봉건 질서의 규칙이니까.
단지 구실일지라도 명분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다. 아니, 할 수는 있겠지만 몇 배나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국가간의 조약이 힘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바로 양측이 간절하게 그것을 원하는 경우이다.
평화를 끝내고 전쟁을 다시 시작하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이 경우도 최소한 한 쪽은 잘못 판단했겠지. 서로 자기 쪽에 승산이 있다 생각해서 시작한 전쟁일텐데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패배해야 하니까.
어쩌면 길고 괴로운 혈전 끝에, 누구 하나 승자가 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고.
나는 무조건적인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무기를 들어야 할 때도 있고, 굴복하지 않고 전쟁을 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생각한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다만 최종적으로는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이어야 된다 생각한다.
전쟁을 업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이고 위선이라 하는 생각도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평생을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뭐 어쩌겠나.
아군, 생뢰르반 군에서 차출된 파견군은 새로이 명령을 수령해 팔스부르를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왕실군이 나우데사를 직접 지원하는 대신, 메플렌 지방으로 진격해 그룬발트를 간접적으로 압박하려 할 것이라는 것은 대충 예상한 바이긴 했다.
아마 나에게 전권이 있었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아마 그룬발트는 좋든 싫든 바로 랄렌 강 너머에 대군이 있는데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나우데사는 자동적으로 압박에서 벗어나겠지.
다만 확실하게 판단하지 못한 점은, 그래서 메플렌, 팔스부르에 진입한 왕실군이 무엇을··· 아니 ‘어디까지’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첫째, 그냥 팔스부르에 머물면서 압박만 주다 철수할 수도 있고.
둘째, 소규모 교전을 도발하며 마찬가지로 그룬발트의 주력을 강 건너에 묶어 둘 수도 있고.
셋째, 진짜로 팔스부르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엘랑키아-그룬발트 전쟁을 시작한다···.
나는 마지막은 아니라 생각했다. 다고베르 2세 국왕이 아무리 확장 성향이 있고 전쟁에 강하다고는 해도, 이미 버젓이 맺어진 조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진 못할 것이니까.
아마 국왕이 하려고 해도 주변에서 못하게 말릴 테고 말이다.
엘랑키아가 왕권이 강한 나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신이나 귀족 무시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행군 중에 새로 얻은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린 것 같다. 아, 그렇다고 엘랑키아 국왕이 얼간이라는 말은 아니다. 방향이 달랐다고 할까.
단편적인 비보가 계속 전해졌다.
팔스부르 부두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 경비대와 상인들이 충돌했다거나, 랄렌 강에서 밀수품을 검열하다 폭발사고가 일어났다거나 하는.
누군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획책한 음모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우연히 발생한 사고일지도 모른다.
전쟁이 나면 물가가 널뛰어 밀수에 손을 대기 쉽고, 최근 강을 오가는 상인들에 대한 검열이 가혹해졌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다음으로, 팔스부르에 그룬발트에서 보낸 사절들이 자주 오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는 상업 관련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그룬발트 귀족들이 보낸 사절일 수도 있지만··· 다른 목적을 가진 사절일 수도 있다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최후통첩이라거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룬발트와 국경을 접한 변경 지대 전체에 주의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모양이다.
뭐 대충 예상해보자면 이렇겠지.
어느쪽이 먼저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최근 있었던 이런저런 충돌과 경제적 손해를 구실로 다툼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통첩에, 최후의 최후통첩까지 오갔으리라.
하지만 이건 전부 요식행위다.
가능한 품위있는 방식으로 포장했을 뿐, 서로에 대한 적의와 욕망을 노골적이지는 않을 정도로 드러내는 행위였으리라.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을 테고, 그건 양측이 모두 원하는 이상 바뀔 일은 없었겠지.
한숨이 나오는 점은, 두 나라 모두 외교적 해결 방향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엄연히 두 나라가 동의한 조약이 있는데, 한쪽이 이를 근거로 상대를 압박한다면 반대쪽은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으니.
결국 양쪽은 암묵적으로 조약 파기에 동의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안하게 유지되던 평화가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나는 어느정도 상황이 명확해진 후, 즉 국경지대에 비상령이 전달된 다음 우리 파견군의 지휘관과 참모들을 모아놓고 이를 알렸다.
행군중인 아군의 목적지가 나우데사가 아니라 랄렌 강 부근의 팔스부르라는 점에서 이미 다들 대충은 느끼고 있었겟지만.
“그룬발트와의 국경에··· 그렇군요.”
모두가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진지하게 지도를 살핀다. 그룬발트 영토 방향으로 불쑥 튀어나온 베플렌 지방과, 그 끝에 있는 팔스부르 요새의 위치를.
한편으로, 긴장한 젊은 장교들의 모습에서는 어딘가 기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뭐, 이해는 간다. 모두가 젊고 유능한 이들이니까, 그 기대를 부정하거나 나무랄 수는 없었다.
대부분이 하급 귀족, 혹은 자유민 출신이면서 군인의 길을 선택한 이 젊은 장교들에게 전쟁이란 출세의 수단이며 충성심의 증명이다.
더 나아가 주군을 섬기고 고향을 지키는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일방적인 침략전쟁이라며 선악을 따지기에는 엘랑키아와 그룬발트라는 숙적 사이에 쌓인 원한과 시체의 산이 너무도 높았고.
한편, 가장 눈을 빛내는 두 사람이 보인다.
하나는 바로 리타르몽 드 당세르,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의 수석 참모이다.
그는 기대감을 가졌다기 보다는, 향후 이어질 행군이나 전투에 대한 예상을 머리속으로 계산해보는 느낌이다.
최근 함께 지내고 여러차례 보고를 받으면서 리타르몽 경이 비상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논리적으로 잘못된 점’을 찾아내는 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자면, 지속적으로 물자 소모량을 체크한 결과, 특정 보급소에서만 일정하게 많이 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저울에 문제가 있음을 찾아낸다거나.
부대 단위로 보면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큰 차이는 아니었을 텐데, 매번 물자 재고량을 확인한 성실함이 더욱 놀랍기도 하다.
아마 ‘500명의 보병을 강 건너로 파견하려면’ 따위의 임무를 주면 완벽하게 시간과 비용, 물자에 적합한 부대까지 선정해서 가져오겠지.
눈을 빛낸 다른 한 명은··· 지휘관 중에서는 홍일점인 인물이다.
물론 부관 뿐 아니라 필요하면 참모나 지휘관 역할도 얼마든지 하는 첼레스티나라는 예외가 있지만, 거기 더해서 여자 지휘관이 한 명 추가되었다는 말이지.
티테니아 드 몽파르지에. 서부군 사령관 앙비토 드 몽파르지에 공작의 여동생이다.
외모가 앙비토 공작과 많이 닮은 데다가, 키도 커서 목소리를 듣기 전에는 남자라고 생각해서 여기사라는 것을 알고 많이 놀랐었다.
솔직히 무슨 생각으로 병력을 보내면서 여동생을 함께 보냈는지, 앙비토 공작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만 그녀는 지난 겨울, 카르카냑에서 간부 특성화 교육에 참여하며 지냈다. 드 몽파르지에 가문에서 객원 참여시킨 두 명의 교육생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객원 참여라고 해도 성실하게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 거기서도 홍일점이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중상위권 성적으로 수료했다.
트랑카벨 가문 입장에서는 말하자면 장교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인정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앙비토 오라버니께서는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가 엘랑키아 최강의 남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곁에 함께하는 게 가장 안전한 장소라 생각합니다.’
전선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다소 걱정이 되어 몇 마디 하자, 그녀는 미리 생각해두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앙비토 오라버니께서는, 앞으로 서부군이 살아남으려면 트랑카벨의 콘도티에레처럼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콘도티에레.’
···내가 이걸 듣고 뭐라고 말할 수 있었겠나.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은, 하급 귀족이나 평민 출신인 다른 지휘관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공작집안 따님인 티테니아는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생각해보니 이미 카르카냑에서 다른 장교들과 같이 보낸 경험이 있긴 하구나.
드 레뮤즈에서 파견 온 귀족 집안 자식들과 친하게 지내려나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서 유독 잘 지내는 상대는 놀랍게도 리타르몽 참모이다.
간부 특성화 교육을 함께 받았다는 인연으로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싶었지만, 아마도 묘하게 성실한 두 사람의 성격이 잘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원정의 목적에는 ‘인재 양성’ 또한 있으니까.
조금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티테니아라는 동맹 가문의 소중한 막내딸을 키우는 것도 임무일지 모른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콘도티에레, 그럼 아군은 팔스부르에 도착하는 즉시 전선에 투입되게 됩니까?”
질문한 사람은 엘리스토프 마르크릭, 제32 델레망드 정찰 반연대장이다.
제31 정찰 연대에서 추격 기병을 이끌며 로베르 드 나뵈프 연대장을 보좌하던 중대장이던 그는, 새로운 반연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그의 질문은 아마도 지금부터 전투 준비를 갖추고 행군해야 하느냐에 대한 물음이겠지.
“흠··· 아직 그것까지 대비할 필요는 없으리라 보네. 기존의 정찰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조금 더 신경쓰는 것으로 원칙을 정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콘도티에레!”
행군 중의 피로 누적은 중대한 문제다. 특히나 외곽 정찰을 담당한 기병들을 여기서부터 지치게 할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여기는 적어도 엘랑키아 영토 안쪽이다. 만약에 그룬발트가 국경을 넘는다면 최소한 전령을 먼저 받을 시간은 있겠지.
“콘도티에레? 전령이 왔어요! 팔스부르에서··· 앗? 다고베르 2세 국왕께서 보낸 전령이에요!”
첼레스티나의 입에서 국왕의 이름이 나오자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여기 멤버들 중 절반은 바로 작년까지도 국왕의 군대에 맞서 싸웠던 ‘이단 반란군’ 소속이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국왕 명의로 직접 명령을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도 약간은 긴장되네.
“무슨 내용이지?
“그게··· ‘왕실군은 먼저 랄렌 강을 건너 그룬발트로 진격할 것, 팔스부르에 도착하면 아르밀 공작과 상의하여 합류하라.’ 이상이예요!”
“벌써 강을 건넌다고?”
모여있던 지휘관과 참모들이 눈에 띄게 동요한다. 아직 작전 위치에 도착도 못했는데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상황이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우데사 양반들도 그렇더니 다들 공세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