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출동, 생뢰르반 파견대
“하지만 이번에 아무리 그룬발트가 치졸한 배후 공작을 한다 해도, 팔스부르 조약을 먼저 어기는 것은 위험하다 생각합니다.”
엘랑키아와 그룬발트 양국의 한시적 평화를 명시한 조약을 어기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지는 일이다, 라고 프레니히 백작은 생각했다.
전쟁에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조약에 의해 확보된 팔스부르 요새는 물론 메플렌 지방 전체에 대한 영유권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국가간의 조약을 어긴 나라가 환영받는 경우는 없다.
국가간의 문제 뿐이 아니다. 군주와 가신, 지방 사이에도 결국 수많은 계약이 엮여있는 것이다.
그 중 하나를 지키지 않은 인물이라면, 그게 설령 자신의 주군이라 할지라도 자신과의 관계는 지켜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최악은 상대방이 먼저 깨더라도 비난할 여지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게 상호 신뢰의 서약이건, 충성의 서약이건 말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 점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이라 생각하셨소?”
“그, 그건 아닙니다, 폐하. 하오나···.”
“만약 별 일이 없다면, 랄렌 강 너머의 그룬발트 영토를 위협하며 전략적 이득을 볼 것이오. 그리고 만약에···.”
다고베르 2세는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다.
“만약에, 적이··· 그룬발트가 먼저 조약을 어기게 된다면, 그때는 우리가 잘 하는 일을 하면 되지 않겠소이까?”
“잘 하는 일이라 하시면···.”
“그룬발트 놈들을 갈아버리고 영토를 넓히는 일이지 뭐겠소!”
“하하하! 그렇군요!”
프레니히 백작은 다소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자신의 군주를 믿기로 했다.
어쨌거나 그는 즉위 이래로 블랑독 이단 토벌전을 제외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주였으니까.
“지금까지 아군의 계획을 경들에게까지 숨겼던 이유는, 그만큼 그룬발트 녀석들에게 철저하게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오. 경들도 놀랐는데, 그룬발트의 엘프 선제후 나부랭이들은 얼마나 놀라겠소?”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 확실히 저희는 놀랐으니까요.”
“그러니 이해해주셨으면 하는 바이오. 그 대신, 이번에 전쟁이 벌어지든 그렇지 않든, 우리 엘랑키아는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오.”
확실히 비밀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어날 수록 지키기 어려워진다.
설령 철저하게 함구하고 공개되는 날까지 비밀을 지키더라도, 은연중에 그 사실에 대해 죽도록 알고 싶어하는 첩자에게 ‘힌트’를 줄 수도 있는 일이다.
가령 프레니히 백작 자신의 경우라면, 책임감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메플렌 지방의 지형을 살핀다거나, 현지 보급 여건을 알아볼 가능성이 있다.
그는 엘랑키아 국왕이 직접 임명한 원수이다. 그러니 그룬발트 제국과의 최전방에 대해 알아보고 조사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작은 ‘힌트 조각’들이 모이고 또 모인다면 그것은 첩보가 된다.
그 첩보를 바탕으로 조사를 계속하게 되면 진실에 도달할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높아지는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단 하나뿐인 출구를 찾아야 되는 상황이라고 친다면.
첩보를 얻었다는 것은 대략적인 방향이라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이를 바탕으로 더듬어 출구를 찾는다면 방향조차 모르던 것에 비해 훨씬 쉬워지겠지.
“확실히 이 정도는 해야 그룬발트 녀석들을 한 방 먹여줄 수 있겠지요, 폐하.”
겉으로는 호탕한 듯 말하지만, 그럼에도 출정 이후에라도 넌지시 알려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국왕 다고베르 2세와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는 어찌나 용의주도했는지, 나우데사로 향하는 현지 보급 계획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둔 상태였다.
물자를 확보하고 국왕의 친정군을 기다리던 보급 담당관들은 갑자기 집결지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수송대를 수배해야겠지.
하지만 난데없이 국경 바로 너머에 엘랑키아의 대군, 그것도 국왕이 직접 이끄는 친정군이 나타난 그룬발트의 선제후들이 느낄 충격과는 비교도 못할 것이다.
다고베르 2세의 첫 친정, 현재의 팔스부르 요새와 메플렌 지방을 얻어냈던 전쟁 당시에도, 전쟁을 더 지속할 여력이 있었다.
오랫동안 대외전쟁에서 패배만을 기록해 참담한 심정이던 엘랑키아의 귀족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승리, 그것도 숙적인 신성 그룬발트 제국을 상대로 한 압도적인 승리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많은 귀족들이 국왕 만세를 외치며, 유형 무영의 지지를 보내오는 상황에서 전쟁을 계속했다면 더 큰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당시 엘랑키아는 대단히 불안정했다.
내부적으로도 그랬고, 영토가 붙어있는 그룬발트와 라솔 양대 강국은 물론, 바다 건너 알디온 또한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린 것은 물론이다.
심지어 봉신국인 엘랑드르나, 오랜 보호국이었던 나우데사 조차도 협력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룬발트에 국력을 집중한다? 위태위태한 외교 상황에서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우데사가 다소 시끄럽기는 해도, 무력으로 복속시키는데 성공한 상태.
항상 속을 썩이던 봉신국 엘랑드르 역시 전에 없이 우호적인 상황이다.
특별히 반역의 위험이 있던 것은 아니나, 중앙 정부와 유리된 느낌이었던 남부의 귀족들도 이제는 왕실의 통제 하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다른 방식이었지만···.
그리고 그 남부의 귀족들이 온 힘을 다해 라솔과의 국경을 틀어막고 있다.
라솔이 언젠가는 전쟁을 도발해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작년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으니까.
알디온은··· 특별히 관계가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섬나라 놈들은 엘랑키아가 결정적으로 위기에 몰리지 않으면 관망하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다. 한다면 지금이다. 아니, 지금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동안 엘랑키아가 바라온 숙적, 신성 그룬발트 제국과의 전면전을 하려면 지금 뿐이다.
평화 기간을 명시한 팔스부르 조약이 걱정되기는 한다. 어느 쪽도 쉽게 선공을 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허나, 저 국왕 폐하가 저렇게나 자신만만해 한다. 다고베르 2세는 다소 미덥지 못한 부분이 있는 군주이지만, 재상인 뮈르텔은 그렇지 않다.
그럼 분명 어딘가에서 정보를 얻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군에게 명령을 전달하라. 행군 목표가 바뀌었다고.”
“옛, 원수 각하!”
“우리는 팔스부르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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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비뇽 부근의 파견군 집결지에서 진행된 일주일 간의 기동 훈련이 마무리되었다.
결코 강도 높은 훈련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엘랑키아 북부까지, 어쩌면 나우데사까지 장거리 행군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힘을 빼고 시작할 수는 없으니까.
당연히 짧은 훈련과 충분힌 휴식이 병행되는 가벼운 기동 훈련이었다.
오히려 장거리 행군을 앞두고 적당히 몸을 푸는, 부대 단위의 예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은, 지난 겨울 카르카냑에서 있었던 간부 특성화 교육이 생각도 못한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군을 이끌고 왔거나, 중견 지휘관으로 참전한 각 가문의 인사들 중에는 특성화 교육에 객원 참여했던 이들이 꼭 섞여있었다.
마침 이번 훈련을 보좌해 진행했던 리타르몽 드 당세르 참모를 포함해서 트랑카벨 영지군에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지휘관들 사이에 서로 안면이 있고 손발을 맞춘 경험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
이 점이 이 작지만 출신은 많은 잡탕부대를 하나로 묶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솔직히 정말, 정말 다행이다. 원래 연합군이란 두 나라나 가문만 모여도 기싸움이 시작되게 마련이니까.
가문이 문제일까, 같은 군 소속이더라도 부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기묘한 경쟁심리가 생기는 것도 흔한 일이지.
참 슈토르히도 얌전히 돈 주는 만큼 일만 하겠다는데 묘하게 라이벌 심리를 가지고 덤벼드는 인간들이 많아서 좀 피곤했었다.
특히나 그로이엔펠트 용병단은 무슨 치욕을 씻겠다면서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듯 잡아먹으려 드는데···.
아니 솔직히 전쟁에서 우리가 졌잖아! 아군이 완전 무너져서 우리 슈토르히 연대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사흘 동안 잠도 못자고 도망쳤을 뿐이라고.
그런데도 엄청나게 미워했었는데, 참 용병들, 군인들의 심리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특히 이번에는 숱하게 많은 서로 다른 출신들, 심지어 라솔 왕국 변경 출신들까지 섞여 있는 인원들로 단일 부대를 구성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 항상 터지는 서열 문제, 동급 지휘관일지라도 누가 선임이냐 하는 문제가 반드시 생길 것으로 걱정했지만 이런 점도 무사히 해결됐다.
어느정도는 서로가 배우는 입장이라 여기며 서로 양보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트랑카벨과 드 레뮤즈라는 병력의 대부분을 제공한 ‘대주주’라는 점도 있어서 대체로 무난하게 해결되었다.
이건 평소에 ‘생뢰르반 군’이라는 특수한 군사령부를 미리 편성해놓는 아주 강력한 이유이기도 했다.
평소에 서열관계를 정리해두고 지휘 조직을 완성한 상태니 급할 때 허둥지둥 지휘 계통부터 통일하는 난리를 치지 않아도 되니까.
“행군 순서를 정했어요, 콘도티에레! 확인해주시겠어요오?”
“음··· 좋아, 이대로 하자. 드 레뮤즈에게 선두를 맡기는 게 다른 말도 안 나오고, 예우 측면에서 좋겠네.”
“네에, 콘도티에레, 전달할게요.”
한동안 낯선 도시인 타비뇽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첼레스티나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본인 말로는 내가 일부러 쫓아내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음, 내가 일부러 좀 사령부에서 떨어뜨려 놓기는 했지.
왜냐하면 첼레스티나가 워낙 이리저리 재주가 많고 나와 오래 일해서 합이 잘 맞다보니, 어느 틈에 참모 조직이 그녀 중심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그 핵심 인원, 즉 첼레스티나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기형적인 조직이 되어버린다. 중견 참모들이 책임을 지는 법을 배우지도 못하게 되고.
이번에는 그래서는 안 되지. 일부러 겨울 동안 가뜩이나 바쁜 루트비히와 모리츠를 고생시켜서 젊은 장교들을 따로 교육하기까지 한 이유가 무엇인데.
물론 현재 이 파견군에 속한 장교들의 숫자는 그 중 일부이지만, 그들이 익힌 이론적 지식은 여기서 얻을 경험을 거름 삼아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나에게도 앞으로 장교를 양성할 가이드라인을 만들 중요한 피드백이 되겠지.
···아무튼 그래서 부득이하게 첼레스티나를 잠시 사령부에서 쫓아내는 꼴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뭐 출입금지! 이런 건 아니었지만 사령부에 오면 자꾸 일을 도우려 하고, 나도 편하니 자꾸 도움을 받아서··· 아예 휴가를 줘서 멀직이 떨어뜨려 놓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미안하네.
그래도 다행히 마음이 맞는 간호사들과 타비뇽에서 나름 즐거운 휴가를 보냈던 모양이다.
고마운 간호사들은 내 소중한 부관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잘 보좌하다가 무사히 주둔지로 되돌려 놓았고.
“참, 콘도티에레, 최근 수집된 내용 중에 나우데사에 관련된 일이 있었어요. 확인까지는 아직 못 해봤지만···.”
“어··· 무슨 일인데?”
“나우데사 연방군, 그러니까 엘랑키아에 우호적인 군대가 대규모 작전에 나선 모양이예요.”
“또? 저번에 한 번 졌잖아?”
“네에··· 그 후에 인적쇄신을 한다고 지휘관들을 교체하고 다시 출전했다고 하네요.”
“아 그래··· 후속 정보가 오면 계속 전해줄래?”
“네에, 콘도티에레.”
아아, 이거 불안한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쟁이 아니라 군대를 정치의 수단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지만, 그래도 전략적 합리성을 지켜야 한다.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적쇄신··· 지휘관을 갈아 치웠으니 단기간에 전임자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제발, 엘랑키아 군이 도착할 때 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방어를 그렇게 잘 하는 양반들이 왜 공격을 못해서 안달이야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