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0. 나우데사 내전
쿵, 쿠웅!
거리로 인해 둔해진 포성이 띄엄 띄엄 들린다. 야로스 발렌켄드의 심장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한다.
“자, 모두 침착하자!”
침착하긴 개뿔, 지금 가장 정신이 없는 것은 야로스 본인이다.
자기 따위가 연대장이라니, 넘보면 안될 자리를 넘본 대가가 너무도 크다. 최악의 감정인 자괴감이 마치 곰팡이처럼 야로스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된 채로 주변을 살펴보니 긴장으로 얼굴이 창백해진 중대장들과 연대 참모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보인다. 연대장은 커녕 중대장 할 깜냥도 안 되는 자신에게 말이다.
“후우···.”
일단 들키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작게 내쉰다. 굳어버린 머리로 뭔가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먼저 주테르베이크 연대보다 앞서 행군하고 있는 연대의 지휘관은 역전의 용사, ‘쿤스타그의 영웅’인 하타스 판브레이였다.
머리가 벗겨진 건장한 노장인 하타스은 쿤스타그와 바덴스토렌을 연결하는 주도로를 전쟁 내내 틀어막으며 엘랑키아 군의 진격을 막은 영웅이라고 한다.
그런 인물이기에 가장 중요한 2번째 행군순서를 담당한 것이다.
만약 하타스의 연대가 직접 공격 당했든, 최선두 연대가 전투에 휘말렸든 능숙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든든해진다.
···참고로 그 다음으로 믿을만하다는 이유로 3번째 차례를 맡은 게 야로스 자신이긴 하지만.
그러니, 뭐라도 해야 했다.
일단은 하타스의 연대를 지원할 준비를 하도록 하자.
“선두 2개 중대는 전투 대형으로! 나머지 후속 중대는 복종행군대형으로 전환!”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일단 입이 열리자 다행히 더듬지 않고 명령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선두 중대들은 혹시라도 정면에서 적이 나오더라도 즉각 대응 가능하도록 좌우로 늘어선 전투 대형이다.
그리고 평소에 단종, 즉 한 줄로 행군하는 후속 연대들은 2개 중대씩 포개어지는 복종 진형으로 전환했다.
평소와 같은 행군 대열에 비해 속도나 방향 전환은 느려지겠지만, 적의 갑작스러운 출현에는 대응하기 좋으며 어떤 방향으로 전환하든 짧은 시간 내에 전투 준비를 마칠 수 있는 대형이다.
갑작스러운데다 익숙치 않은 대형 전환에 용감하지만 어설픈 민병대원들로 이루어진 중대들이 혼란을 겪고는 있지만···.
새삼 언제 어떤 명령이 내려와도 물 흐르듯 대열을 변경하던 슈토르히가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야로스 자신도 그 일원으로 당연한 듯 행동했었는데.
마치 부대 안에 있으면서도, 부대 밖에서 어떤 광경이 보이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더랬지.
“연대장님, 서둘러 행군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우리 선두 연대는 그 ‘쿤스타그의 영웅’이다! 오히려 서두르다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그렇겠군요! 연대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활짝 웃으며 야로스를 한 점 의심 없는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의 어린 부관 마르턴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의 하얀 이빨이 그의 금박 흉갑만큼이나 희게 빛난다.
이 열 여섯살짜리 하급 장교는 주테르베이크 시장의 조카라고 했나. 그 뜨거운 눈빛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펑, 퍼엉! 쿠앙!
여전히 폭음이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본다. 아직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는다.
소리로 들어볼 때, 서로 동원된 대포의 숫자가 많지는 않다. 기껏해야 다섯 대 안팎, 많아도 열 대는 안 넘겠지.
몇 발이 비슷한 시기에 울리고, 다음 포성까지의 구간이 긴 것을 보면 나름 사격이 통제되고 있다. 구령에 의해 일제히 포격했다는 이야기니까.
그렇다는 것은 아직 포격이 방해받을 만큼 양측이 가까워지지도 않았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지도 않는다는 이야기겠지.
역시 쿤스타그의 영웅! 하지만 전투를 맡겨두기만 할 수는 없다.
“자, 전진! 아군을 도우러 가자!”
“전지인!”
허둥대면서도 나름 구색을 갖춘 대열을 다시 전진시킨다. 주테르베이크의 희망을 담은 1400명의 보병과 200명의 기병들이 다시 나아가기 시작한다.
“수석 포술장! 수석 포술장 있나?”
“옛, 여기 있습니다. 포대도 대기 중입니다.”
“잘 했다. 만약 전투가 시작되면 선두 중대 사이에··· 혹은 측면이든 어디든 알아서 방렬하고 포격을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역시나 젊은 청년인 수석 포술장이 달려온다. 포병들에게는 항상 연대의 선두 부근을 유지하라고 명령을 내려 놓은 상태였다.
공격을 하건 방어를 하건, 대열 변환의 대혼란의 와중 평소처럼 대열 중간쯤에 배치해 놨다가는 시간을 못 맞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막중한 임무와는 별개로, 주테르베이크 연대의 포병대는 겨우 3문의 단촐한 구성이었다.
그나마도 2문과 1문이 서로 구경이 달라 포탄도 따로 챙겨야 하는 총체적 난국 상황이다.
물론 자비로운 주테르베이크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 도시가 보유한 화포들을 아낌없이 내주려고 했다.
하지만 도시를 둘러싼 포좌들을 둘러본 야로스는 절망했다. 실질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포대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좁은 포대에 고정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도저히 장거리 행군에 끌고 갈 수 있는 포가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몇 개는 끔찍하게도 낡은 구형 포라서 쓸 수는 있나 걱정이 되기도 했고.
간신히 추려낸 것이 4문. 대형 1문, 중형 2문, 소형 1문이라 포탄을 3종이나 챙겨가야 하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서 보병의 행군을 따라가기에는 너무 무겁고 포가도 구식인 대형 포는 눈물을 머금고 덜어내고, 나머지 2종 3문만 챙겨온 것이 현 포병대이다.
이런 판에 포탄도 충분할리 만무하다. 특히 작은 쪽은 남은 철제 포탄이 겨우 5발 밖에 없어서, 출격 전날 도시의 석공들이 밤을 새워 돌을 쪼아 예비 포탄을 만들어 챙겨 줬을 정도이다.
고마운 일이지만, 어떤 포병 장교에게 설명해 줘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미담이겠지···. 혹은 괴담이거나.
그나마 포수들은 가장 뛰어난 이들을 챙겨올 수 있었다. 수석 포술장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던 청년이라 수학 지식이 상당했다.
그 말은, 당장 추가 교육이 없더라도 거리만 알면 일단 표적 근처로는 포탄을 날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였고.
···다행히 슈토르히 연대에서 포술을 배워 다행이다. 홍일점이지만 무서운 첼레스티나 선임 중대장에게 시달리며 배운 덕에 까먹지도 않고 몸에 붙어있으니.
“연대장님, 저기 정찰병이 돌아옵니다!”
포성이 들리자마자 전방 정찰을 보냈던 기마 정찰대가 서둘러 돌아오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 위에서 내릴 틈도 없이, 정찰병이 보고한다.
“전방의 쿤스타그 연대가 적과 교전하고 있습니다!”
“적의 방향은? 어느 방향에서 공격해왔나?”
“숲속입니다! 적의 후미는 아직도 숲에서 전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숫자는··· 천 명은 넘어 보였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예상대로 적은 숲에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한 모양이다. 하지만 숲과 거리가 상당히 있으니 완전한 기습은 할 수 없다.
애석하게도 성실하지만 경험이 적은 정찰병에게는, 한 눈에 적의 숫자까지 파악하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천 명 정도라면, 아마도 적은 1개 연대라는 이야기겠지. 다소 열세라도 쿠스타그 연대가 단번에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계산은 섰다. 이대로 행군하여 쿠스타그 연대를 돕는다. 가능하면 적의 측면을 노릴 수 있다면 좋겠지.
만약 하타스 연대장 정도 되는 역전의 노장이라면, 일부러 부대 방향을 묘하게 배치해서 후속하는 주테르베이크 연대의 전방에 적의 측후방이 오도록 조절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여유가 있다면 분명 그렇게 했겠지.
어쨌거나, 적의 측면이든 후면이든 강하게 한 방을 날려줄 수 있다면 초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으리라.
“후속 연대에게 전령! 아군 교전 시작, 지원 바람, 이상!”
“아군 교전 시작, 지원 바람! 전달하겠습니다!”
부관 마르턴의 힘찬 복창소리가 들려온다.
“행군 속도를 속보로 올린다! 조금만 힘내자!”
“옛! 전군 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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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쿠웅!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포탄소리가 점점 커진다. 귀를 기울이면 따다닥 거리는 총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왕성한 사기를 가진 주테르베이크 연대의 보병들은 헉헉대면서도 잘도 따라오고 있었다.
먼저 전방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연대장 야로스 발렌켄드는 호위병들과 함께 눈 앞의 작은 언덕길을 오른다.
적이 아무리 강군이라 해도 아군은 적의 두 배에 이르는 대군이다.
아무리 강군이라 해도 두 배의 적을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당백의 기세인 정예병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체력과 정신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총 맞으면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이기도 하고. 하물며 숙련도가 빛을 발하기 어려운 중거리 총격전에서는 무조건 숫자 많은 쪽이 우위이다.
게다가 적 1개 연대에 대해서 이쪽은 2개 연대로 두 방향에서 공격한다? 이건 필승 상황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겠지.
펑! 콰앙!
타타타탕! 타탕! 탕! 따다당!
탕! 타당! 탕탕탕!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자, 예상대로 화약 연기가 자욱한 전장이 나온다. 언덕에 가려 잘 들리지 않던 포성과 총성이 또렷하게 들리며 그 진동까지 느껴진다.
어디가 아군이고, 어디가 적군일까.
비슷하게 흉갑이나 가죽 조끼를 입고 투구를 쓴 양군은 언듯 봐서는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특히나 연대급 규모 지휘가 처음인 야로스로서는 한번에 전장의 흐름을 읽는 게 어려운 게 당연하다. 다시 눈에 힘을 주어 전장을 살핀다.
숲에서 먼 좌측이 아군일 테고, 숲 쪽에서 나온 우측이 적군이겠지.
역시, 저쪽에 보이는 중대기는 분명 연방군의 것이다.
저기 저 중대가 숲 방향으로 총을 쏘고 있고···.
그렇다면 저 선이 아군의 방어선이라는 이야기인데···.
부끄럽게도 ‘지휘 초보’인 야로스이다. 전장을 좀처럼 읽을 수가 없어 몇 번이나 또 본다. 기분이 초조해진다. 뒤따라오는 보병들의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저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할 텐데, 상황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젠장할.”
어느 순간 깨닫는다. 전장을 읽지 못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장의 상황은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런데 그 파악한 전장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어째서 쿤스타그 연대의 대열이 저렇게 엉망진창이지?
왜 창병들이 총병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위치에 저렇게 모여있는 거지?
양 측익은 왜 저렇게 뭉개져 있는 거야, 이래서는 마치 포위라도 당한 것 같잖아!
그리고 저기 도망치고 있는 중대는 뭔데!
아까는 머리속이 하얗게 변했다면, 이제는 절망으로 시커멓게 변한다.
“정말 돌아버리겠구만···.”
“여, 연대장님?”
야로스의 혼잣말을 들은 마르턴이 놀라서 반문한다.
“마르턴, 보병 부대가 도착하면 여기를 최전방으로 전투 대형을 짠다. 저기와 저기, 기수들을 보내 선을 긋고 대열을 갖춰.”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방금 언덕을 넘기 전까지만 해도 야로스의 머리속에는 손쉬운 승리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전장에 익숙한 백전노장 하타스와 그와 함께 엘랑키아 기사들과 싸웠던 베테랑 연대.
수적으로 우세한 2개 연대의 협공.
기습적으로 적의 후방, 혹은 측방에 나타나 실행하는 강렬한 일격.
이 모든 ‘손쉬운 승리’의 요소는 방금 전부 날아가 버렸다.
대체 그가 도착하기 직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쿠스타그 연대는 적의 공세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연대의 절반이 어정쩡한 행군대형 그대로 적을 맞이했고, 보급 물자가 실린 수레가 방치된 것을 봐선 그나마도 한참 밀려나서 간신히 방어선을 만든 게 분명하다.
창병과 총병이 분리되어, 직선 반듯하게 그어져야 했을 방어선이 톱니처럼 엉망진창이다.
그 탓에 비슷한 병력으로도 훨씬 좁은 전선밖에 커버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렇다는 것은 가뜩이나 불리한 양 끝단의 중대들은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더 많은 수의 적에게 협공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걸 어떻게 해서든 지원해 압박을 줄여야 했을 기병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설마 저기 누워있는 말 시체들은 아니겠지.
게다가···.
쿠스타그 연대를 무섭게 몰아붙이고 있는 부대의 머리 위에서 휘날리고 있는 군기에는 검은 독수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로이엔펠트.
지금부터 야로스와 용감한 주테르베이크의 청년들이 맞서 싸워야 할 용병대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