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 나우데사 내전
“이걸 받아 주시겠어요?”
“옛,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물건은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리타르몽 드 당세르는 자신이 섬기는 트랑카벨 가문의 장녀인 아쥬흐가 넘겨준 종이를 살핀다.
군병원 주소와 소속,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제가 신뢰하는 후배··· 의무대의 군의관이에요. 분명히 리타르몽 경의 병증에 대해서도 신경 써서 살펴 주겠지요.”
충분한 임상 경험을 쌓아 출세하고 싶어하는, 당찬 야심이 있으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후배였으니까.
그는 생뢰르반 전투에서도 적어도 수백 명의 부상병들을 살려냈다고 했다.
아군 전선 바로 뒤에서 실시간으로 질질 끌려오는 부상병들을 치료했다니, 아쥬흐라면 힘들었을 일이다.
델로나 대학 졸업 후에도 도심지의 병원에서 일했다니 이런 일상 질병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아쥬흐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고.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리타르몽이라는 이름의 장교는 트랑카벨 영지군의 선발 과정을 통과했고, 지금까지 1년 가까이 무사히 군복무를 하고 있다.
게다가 그 우수함을 인정받아 장교 특성화 과정에도 선발되었고, 실무와 이론이 병행되는 교육도 우수한 성적으로 잘 마쳤다.
이런 사람을 다소 의료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막아 버리는 것이 옳은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꼭 치료 받고, 출병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러실 수 있다면 저도 더 말씀 드리지 않을게요. 하지만 출병은 힘든 일이잖아요. 그 전 까지는, 아니 출병한 이후로도 군의관에게 진찰을 받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리타르몽의 원래 음울한 얼굴이 확 밝아진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아쥬흐는 조금 씁쓸함을 느꼈다. 이 사람은 뭐가 그렇게 기쁜 것일까.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질병을 가지고도 어떻게든 전장에 나가려고 고집을 부린다.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그것을 허락 받더니 이렇게나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이다.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다.
단지 건강만이 문제일까. 아쥬흐는, 트랑카벨 가문은 수도 없이 많은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보내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자신이, 남의 건강을 트집 잡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위가 아닐까.
지금처럼 용사들이 안심하고 전장에서 싸울 수 있도록 후방 지원이나 충분히 해주는 것이 역시 자신의 할 일 인 것 같다.
“혹시···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에 인연이 있으신 건가요?”
“아닙니다, 아쥬흐 자작영애님.”
“그렇다면 일부러 지원한 이유가 있나요?”
“그건··· 이번 출병에 차출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연대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차출이라고요?”
리타르몽의 설명은 간단했다.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는 어느정도 트랑카벨 영지군이 확장된 이후에 편성된 후발 연대이면서도, 실전경험이 가장 적은 부대였다.
한참 왕실군과 법황군 양쪽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시절에도, 후방인 로데브 강 이남을 지켰던 2개 연대 중 하나이다.
반면, 당시 함께 후방을 지켰던 제19 델레망드 보병 연대는 델레망드 삼각주 방향으로 급습해온 적과 맞서 싸우느라 처절한 혈전을 벌였었다.
이후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 역시 총사령관 아실 트랑카벨 자작의 직할군이 되어 작은 교전에 참전하기는 했으나, 실전경험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다만 그만큼 여러 차례의 대전투를 겪은 트랑카벨 영지군의 각 정규 연대들 중 가장 병력을 온존하고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하물며 병력 감축으로 인해서 여기저기 결원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으니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누구나 어느정도 예상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쥬흐 자신은 루트비히와 대화를 나누고서야 알았으니까.
그걸 확신하고 실행에 옮겼다니 훌륭한 판단력과 실행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군요··· 그렇게 이번 출병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아직 건강한 동안, 트랑카벨과 제 고향을 위해 헌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콘도티에레 각하의 지휘를 받으며 싸워보고 싶었습니다.”
“아···.”
아까 보았던 자부심의 번뜩임은 이런 생각의 발로였구나.
그나저나 콘도티에레 에트의 지휘를 받고 싶다니··· 어쩐지 공감이 간다. 분명 아쥬흐 자신도 남자였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리타르몽 경 역시 본인의 건강 상태가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셨군요. 트랑카벨은 경의 헌신을 기쁘게 받아들일 거예요. 그러니 꼭 진찰 받고 건강을 챙기도록 하세요.”
“명 받은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콘도티에레 에트를 부탁할게요.”
“옛! 목숨을 바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후후, 그 사람은 아마 그런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을 거예요.”
“예··· 주의하겠습니다.”
아쥬흐는 왠지 자신이 높게 평가받은 것 같아서 우쭐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도움은 많이 필요할 사람이니까요. 리타르몽 경 같은 분들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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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수비군을 줄이면 안 됩니다. 전시 체제를 유지하면서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적을 기다립니다. 나머지 야전군은 기동 전력으로서 대기하다가 적을 요격합니다.’
거의 성공할 뻔 했다.
‘어차피 적은 모든 요새를 포위할 수 없습니다. 요새를 포위하지 않는다면 후방 보급부대를 노립니다. 요새를 포위한다면 그때 야전군이 요새를 모루로 이용해 망치처럼 적을 내려치는 겁니다.’
작전회의에서 사령관과 다른 지휘관들을 거의 설득하는데 성공할 뻔 했다는 것이다.
‘아군이 급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룬발트가 대놓고 개입하니, 엘랑키아가 벌써부터 견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랄렌 강을 통핸 그룬발트의 지원이 없다면 전쟁은 올해 내로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출전하기 전에 있었던 이소브론 대공파, 즉 연방군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갑자기 벼락출세로 연대장이 되어버린 야로스 발렌켄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의도를 설명해려 했었다.
슈토르히 시절 비록 초급장교지만 작전회의에 여러차례 참여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당시 연대를 이끌던 콘도티에레나, 이를 보좌하던 모리츠 중대장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명령을 내리고 끝이 아니라 명령의 의도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휘하 장교들은 무조건 문자 그대로 명령을 따르는 것도 중요했지만, 다른 방식으로라도 최종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교육을 항상 받았다.
대략적이고 가장 중요한 목표를 정해두되, 그걸 실행하는 방식은 각급 부대의 판단에 맡긴다는 입장이었는지.
아직도 콘도티에레의 의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시 콘도티에레가 차근차근 설명하던 방식은 기억난다.
그걸 따라했더니, 사령부 회의에 참여한 여러 연대장들, 의원과 도시 유력자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평소 말을 잘 하는 편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마치 마술사라도 된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자기 생각대로 작전을 이끌어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아군은 적군의 거의 두 배입니다, 두 배! 굳이 수세를 고집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도시 정문을 닫으면 손해가 얼마나 나는지 아십니까?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업이 망해버리면 그 전쟁을 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빌어먹을.
결국 야로스의 논리는 현실적인 이유에 밀리고 말았다.
나우데사 인들은 지난 전쟁에서 엘랑키아의 대군을 끈질긴 지구전으로 이겨냈던 이들이다.
엘랑키아 군은 마을 하나, 도로 하나를 통과하기 위해서 싸움을 해야 했으며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기진맥진하기 일수였다.
그 전장에서 슈토르히 연대의 일원으로 함께 싸웠었으니, 야로스는 누구보다도잘 알고 있다.
당시 슈토르히 연대 역시 무리하게 나서지 않고, 철저하게 지형과 다른 아군의 방어 거점을 이용하며 지치고 분산된 엘랑키아 군만 격파했었으니.
오히려 직접 야전군을 이끌고 엘랑키아 군과 적극적으로 교전했던 쪽은 상대측의 우두머리인 비르케제 공작이다.
때로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지만, 종전되기 직전까지 전투를 멈추지 않았던 것도 비르케제 공작이고, 이소브론 대공은 서둘러 종전을 원했다.
그것이 원래 사이가 썩 좋지는 못했던 이소브론 대공과 비르케제 공작 사이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그랬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렇게 적극파가 되어 당장 결전을 벌이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비르케제 공작이 고용했든, 그룬발트에서 지원군으로 보내줬든 그로이엔펠트라는 정예 용병단이 적에게 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론델다이크 늪지대에서 벌어졌던 대참사를 이야기 해 줘도 ‘방심한 데다 기습당해서 그렇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다’라고 할 정도니까.
최소한 몇 주는 각 연대가 함께 기동훈련을 해야 한다고도 건의했지만 역시 묵살되었다. 시간은 겨우 2주가 주어졌으며, 그나마도 연대가 소집되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설득은 실패했다. 다만 당장 적진 한복판으로 싸우러 가는 것 만을 피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 아군은 비르케제 공작의 반군 편을 든 최전방 도시 부근까지 나아가 적을 견제한다.
- 4개 연대가 전위, 2개 연대는 후위에서 활동하며 필요시 집결한다.
- 적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한, 연대 단독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다소 애매한 방침 아래, 북쪽으로 행군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젠장, 저 숲이 자꾸 신경 쓰이는데···.”
행군하는 와중, 동쪽으로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진 울창한 침엽수림이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저런 나우데사 평지의 침엽수림은 줄기가 곧기 때문에 군대가 몸을 숨기기 좋았다.
이 주변은 아직 어느 쪽의 세력권이라고 하기 곤란한 지역이다.
주변에 연방군이 주둔한 작은 도시가 있기는 하지만, 확보된 것은 성채 주변 뿐이지 배후 지역 전체가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당장 론델다이크 숲과 그 주변에서 벌어진 패전 역시 예상하지 못한 위치에서 튀어나온 적에게 당한 것이었으니.
야로스가 이끄는 주테르베이크 연대는 선두 4개 연대 중 세 번째 차례로 행군하고 있었다.
이 연대는 모두 1400여 명의 보병과 200여 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야로스가 보기에는 아직 미숙해 보였지만 사기는 대단히 높았다.
특히, 전쟁 초기에 야로스 휘하에서 싸웠던 ‘야로스 부대원’들의 영량력이 대단했다.
그들은 전쟁 선배이자 영웅으로서 어딜 가든 동향 청년들에게 환영 받았고, 신이 나는 만큼 무용담에는 살이 덧붙게 마련이니까.
‘정신차려라 이 인간들아. 우리가 한 건 총 한 발 쏘고 도망친 것 밖에 없다!’
라고 말하기에는, 사격 통제도 기적적으로 잘 따라주었고 물러서는 과정에서도 침착하게 잘 따라오긴 했으니까.
첫 교전에서 자신감을 얻고 사기가 높은 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전을 얕보고 방만하게 행동하는 원인이 될까 걱정이 될 뿐···.
현재 나우데사 인들을 보면, 불과 3년 전에 엘랑키아 왕국을 상대로 싸웠던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참전했던 대부분도 요새를 지키거나 축성된 진지에 의존해 싸웠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호된 신고식을 각오해야 할 것 같아 걱정이 든다.
만약 콘도티에레였다면, 선임 중대장들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정말 전장에서는 신이나 다름 없었다. 무조건 믿고 따르고, 시킨 대로 행동하면 적어도 망할 일은 없었으니까.
물론 무조건 백전백승하며, 사상자도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 이게 이겨지네?’라고 생각하게 되는 기묘한 고양감은 아직도 기억난다.
과연 자신은 연대장으로서 주테르베이크의 청년들에게 그런 느낌을 줄 수 있을까?
연대장, 무려 연대장이다. 자신이 당시의 콘도티에레와 ‘동급’의 지위에 있다 생각하면 심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이다.
자신이 그런 책임을 맡을 깜냥은 되는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제발, 전쟁이 끝날 때가지 전공 따위는 세우지 않아도 되니, 자신에게 맡겨진 연대를 무사히 건사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러고 은퇴하여 주테르베이크 외곽의 농장에서 안락한 생활을···.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정작 알맹이라고는 없는 초보 연대장인 자신을 믿고 따르는 병사들에게 면목이 없다.
최소한 실망은 시키지 말아야 할 텐데.
쿵!
“어?”
퍼엉! 쾅!
“이거 무슨 소리지? 대포 소리야?”
펑! 퍼펑!
포성이 단속적으로 들린다. 방향은··· 정면, 아군이 행군하고 있는 방향 쪽이다. 각 연대 사이의 거리는 대략 한시간 반 정도이니, 세시간 혹은 한시간 반 정도 거리에서 들렸다고 가정해야 하겠다.
“즉시 정찰대에 전령을 보내!”
“옛, 연대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