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 나우데사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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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효오···.”
블랑독의 관리자 가문인 트랑카벨 자작가의 장녀, 아쥬흐 트랑카벨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먹 쥔 손으로 어깨를 두드린다.
그래도 오늘 봐야 할 문서들은 거의 다 봤다.
한숨을 돌리며 집무실 안을 바라보니, 여기저기 서류들이 많이도 쌓여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아쥬흐의 확인을 필요로 했던 문서이다.
집무실 탁자는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서 애썼었는데, 일에 치이다 보면 어느새 너저분해져서 괜히 속이 상한다.
살풍경한 방에 유일하게 여성스러운 것이라고는, 꽃병에 꽂힌 홍매화 뿐이다.
겨울의 끄트머리라 할 수 있는 시기에 일찍 피는 홍매화는 지금 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아쥬흐의 마음에도 들었고.
문득 예전에는 자주 집무실로 찾아오던 콘도티에레 에트가 생각난다. 그때는 항상 꽃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었는데.
콘도티에레 에트는 꽃에 대해서 상당히 박식하다. 묘할 정도로 모르는 꽃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꽃과 꽃말을 잘 아는 로맨틱한 남자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는 대륙 정 반대편에나 있을 법한 남자라고나 할까.
콘도티에레 에트가 꽃에 대해서 잘 아는 이유는 그것이 들풀이었기 때문이다.
건초를 조달하지 못하는 시기에 군마나 짐말들이 잘못 먹고 탈이 나지 않도록, 먹으면 안되는 독초에 대해 박식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요··· 그건 참 중요한 일이지요.”
아쥬흐는 어쩐지 자포자기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손가락 끝으로 불그스름한 꽃잎을 만진다.
최근, 콘도티에레 에트는 바빠도 너무 바쁘다. 생뢰르반 군을 편성하고, 요새를 새로 짓고, 동맹 가문의 군대를 훈련시키고 등등.
안타깝게도 카르카냑에는 겨울 동안 거의 와보지도 못했다.
다만 편지는 자주 써서 보냈다. 신경써서 준비한 간부 특성화 교육에 참여하지 못해 많이 아쉬운 모양이다.
···그렇게 가끔 보내는 편지에서도 계속 일 이야기, 블랑독과 트랑카벨 영지군에 대한 걱정 뿐이라니.
그는 쉬지도 않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참으로 모범적이고도 훌륭한 대리 사령관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로, 대단히.
이제 슬슬 봄이 되었으니 카르카냑으로 돌아오겠지.
하지만 또 금새 떠날 것이다. 봄은 전쟁철이니까, 국왕 폐하의 출병 요청까지 있었으니 그냥 머물 수는 없겠지.
트랑카벨 가문은 왕실을 섬기기 위해 이렇게나 노력을 하는데, 왕실은 이렇게나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 버리는구나.
괜한 심통이 나는 아쥬흐였다.
생각해보면, 주디칼리의 델로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시절, 콘도티에레 에트는 잠깐 동안이지만 자신의 개인 호위를 맡고 있었다.
당시의 어린 아쥬흐는 여유가 없는 여자아이였다.
고향에는 편찮은 할아버지와 어린 동생밖에 없다. 최대한 빨리 학위를 받아 할아버지를 진찰해야 했고, 서둘러 카르카냑으로 돌아와 가문을 운영해야 했다.
남들이 이틀 걸려서 하는 공부를 하루만에 해야 했으니까. 누구에게 마음을 가질 여유도, 곁을 내줄 여유조차 없었다.
스스로에게 그런 핑계를 대며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날의 아쥬흐는 당시의 자신이 한심하고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찾아갈 수 있다면 찾아가서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었다.
지금 아는 것을, 그 때도 알았었다면.
지금 느끼는 것을, 그 때도 느꼈었다면.
아쥬흐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어차피 머리속으로만 생각했고, 설령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어도 들을 사람도 없을 것인데.
그래도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며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영지의 사정이 나아 졌다는 것이다.
블랑독을 휩쓸었던 전란과, 바로 뒤를 이어 찾아왔던 라솔의 침공이 마무리되면서 업무의 절대량이 많이 줄었다.
게다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격무에 트랑카벨 가문의 행정조직 자체가 익숙해졌다.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관료들 덕분에 아쥬흐 본인의 업무도 경감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모험적으로 시작했던 각종 지원 사업들도 차츰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순조롭게 알아서 돌아가니 관리 업무도 줄어든다.
주디칼리에서 장인들을 채용하고 많은 투자를 했던 제식 화승총 생산량은 어느새 가문 내부의 수요를 뛰어 넘었다.
이제는 선발 사수용으로 소량 생산에 그쳤던 지발식 중화승총도 천천히 양산하고 있었다.
드 레뮤즈나 드 몽파르지에 같은 친한 가문들의 영지로 블랑독 상단의 인장이 찍힌 신품 및 중고 총기가 대량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기존에 한번도 교류가 없었던 주변의 군소 가문들이나, 드 누아 백작가를 통해 라솔 동부의 소영주들 역시 트랑카벨의 총기를 구매하곤 했다.
이는 확실히 전쟁이 마무리 된 이후, 엘랑키아 왕실에게 정식으로 인정 받아 블랑독의 관리자라는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된 덕이 컸다.
그 이후로 다른 가문에서 오는 사절이 늘었다.
대부분은 ‘국왕과 법황과 라솔 상대로 싸운 강병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가지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 트랑카벨이 승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점점 판매량은 늘어날 것이다.
총기 뿐 아니라, 영지 조병창에서 생산된 화포나 갑주, 보존식 등 군수물자는 물론이고 블랑독 상단이 기존에 취급하던 상품들도 같이 팔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화로워진 엘랑키아 남부 여기저기를 다니며, 블랑독 상단의 영업직원들이 맹활약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총기 자체 생산의 이유는 영지군의 자급자족이다. 여기서 생산량을 과도하게 늘려 가문의 본업을 무기 상인으로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디까지나 확충된 생산 라인을 돌리며 여분 생산량을 주변에 팔 뿐이지.
그리고 동맹 관계인 가문이나 장차 가까운 관계가 될 가문들, 더 나아가 엘랑키아 전체의 방어력을 키우는 것은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라고 콘도티에레 에트가 말했었지.
안전 보장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트랑카벨의 청년들이 피를 흘려야만 할 때 함께 피를 흘려줄 동맹을 찾아야만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트랑카벨 자작가는, 아롱드 할아버지 대에 전쟁을 포기하고 상업으로 성공한 가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앞장서서 무기를 팔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콘도티에레 에트는 이런 지식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군수산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하던 때, 망설임도 없이 핵심 요소를 정해주며 우선순위까지 딱딱 정리해준 것이 바로 그였다.
전장에서야 불세출의 명장이니, 누구보다 무기와 군대의 생리에 대해서야 잘 알겠지.
하지만 비 군사적인 부분, 오히려 아쥬흐나 가문의 상인들이 담당할 법한 경제적인 부분이나 문화적인 부분도 망설임 없이 해결책을 제시해오곤 했던 게 놀라웠다.
그렇게 냉철하게 행동하면서도, 콘도티에레 에트에게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냉혹함이 아닌 인간다움이다.
승리와 성공을 위한 공식을 그렇게나 철저하게 만들어 가면서, 그 와중에 희생되는 약자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잠시도 잊지 않는 것 같다.
불가피한 희생··· 이라고 변명하며 신경쓰지 않아도 될 지점에서도 눈을 피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들까지도 시야에 넣고 있다는 느낌일지.
때로는 아쥬흐 자신조차도 신경쓰지 못한 부분까지도 말이다.
그게 결과가 나쁘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기도 하고.
그런 콘도티에레 에트를 멘토로 두고 있어서일까, 아쥬흐의 사랑하는 동생이며 차기 트랑카벨 자작인 아실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었다.
아쥬흐에게 가장 소중한 남자 셋 중 두 명이 그렇다는데, 그녀로서는 온 힘을 다해 돕는 수 밖에.
다소 피곤하고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자 다소 힘이 나는 것이다.
“아쥬흐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아, 들어오시라고 해.”
“예, 마님.”
그러고보니, 오늘은 손님이 한 명 있었다.
얼마 전,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간부 특성화 교육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다. 트랑카벨 영지군의 장교이고, 출신인 가문 이름은 들어본 적은 없다.
교육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우수한 성적을 받은 이들을 포상하는 자리였는데, 유난히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단순히 외모가 눈에 띄었다는 말이 아니다. 음··· 물론 외모도 눈에 띄기는 했지만, 아쥬흐가 보았던 것은 명백한 질병의 징후였으니까.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들어온 것은 키가 굉장히 큰 트랑카벨 영지군의 장교였다.
“부름을 듣고 왔습니다. 리타르몽 드 당세르입니다, 아쥬흐 자작영애님.”
“어서오세요, 리타르몽 경.”
원래 키도 워낙에 크지만, 사이즈에 맞지 않게 커 보이는 흉갑에서 튀어나온 볼품없이 가느다란 팔다리 덕분에 더더욱 길어 보인다.
셔츠는 묘하게 짧아 비쩍 마른 손목이 드러나고, 바지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와 턱수염은 손질되지 않았고 지저분해보인다.
위생적으로 불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카르카냑의 귀족이나 장교들과 달리, 외모를 꾸미는 데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특히나 주군 가문의 일원인 아쥬흐를 만나러 오는 데도 이 모양이니, 어쩌면 꾸미는 법을 모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키가 크고 앙상하게 마랐으며, 구부정한 어깨 위로는 음울하고 인상 나쁜 표정을 한 이 남자는 놀랍게도 교관 루트비히가 인정한 가장 뛰어난 장교 중 하나이다.
정말 미안한 생각이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어두운 복도 구석에서 봤으면 놀랄 것 같은 외모랄까.
하지만 사람을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그의 가치는 두개골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있는 게 분명하니까.
드 당세르라니, 어떤 가문일까. 한번도 들어본 적은 없었고 일부러 사람을 시켜 알아보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이네요, 리타르몽 경. 이번에 제18 벨모제 보병 연대의 작전 참모로 보임되었다고 들었어요.”
“분에 넘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항상 견마지로를 다 할 생각입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아쥬흐는 시무룩한 그의 표정에서 번뜩이는 자부심을 보았다.
“그런데··· 혹시 리타르몽 경은 폐에 문제가 있지 않나요?”
“예? 어··· 제가요?”
“네. 숨소리에 섞여 들리는 소음이나 그 안색을 보니··· 평소에 숨이 차거나 고열이 나는 경우는 없으신가요?”
“아뇨, 그게··· 저는···.”
리타르몽의 얼굴이 일그러져 고개를 깊이 숙인다. 원래 구부정한 어깨가 더더욱 굽는다.
아쥬흐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잠시 기다리다가, 상대가 말이 없자 대화를 이어간다.
“저도 주디칼리에서 공부한 의사라 그렇지 않나 추측했어요. 폐가 좋지 않은 분들이 리타르몽 경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거든요.”
“저는 그냥 어릴때 조금··· 그렇습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제18 연대는 이번 출병에 차출될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리타르몽 경은 다른 부대로 전임해서···.”
“자, 자작영애님!”
두 사람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아쥬흐는 상대가 생각보다 큰 소리를 내서 놀랐고, 리타르몽 역시도 자기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왔으며 자작영애의 말을 끊엇다는 점에서 놀란 모양이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평생 이 순간만을 고대해 왔습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저 따위는 이런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트랑카벨 가문을 섬기며 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언제나 음울한 표정인 사나이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크고 또렷하며 강렬한 말이었다. 그의 얼굴에 남은 표정은 절망 그 자체였다.
···마치 아쥬흐가 죽음을 고하러 온 주신의 재판관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던 아쥬흐는 이내 평상시로 돌아오더니 작게 미소를 짓는다.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저는 혹시라도 리타르몽 경이 불편하실까 다른 제안을 드리려 한 거예요. 억지로 해임시키는 일은 없어요. 자랑스러운 우리 영지군의 장교님인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침착함을 되찾고 자세를 바로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린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키만 큰 청년의 삶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최대한 억누르려 하긴 하지만, 리타르몽의 숨소리에 섞여 들리는 색색거리는 소리와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명백하다.
어느정도 상황인지는 몰라도, 아쥬흐가 생각하기에 군무를 계속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따뜻하고 건조한 카르카냑에서 계속 요양한다면 호전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근무처를 바꾸는 것을 제안했던 것인데.
자신이 호의라고 생각한 것에 이 청년이 느낀 것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다.
자신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다만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결정을 내린 아쥬흐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넘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