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색화약의 용병대장-387화 (387/556)

40-7. 나우데사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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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스부르 요새는 내성과 외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유유히 흐르는 랄렌 강 쪽으로 불쑥 튀어 나온 강변에 서있는 거대한 규모의 외성, 그리고 강 위의 작은 섬에 좁지만 높게 솟아있는 내성.

외성과 내성을 잇는 다리는 모두 두 개가 있으며, 그 중 하나는 고대 아란 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장대한 다리의 흔적을 보강한 것이라고 한다.

다리가 어찌나 거대한지, 아치를 이룬 교각과 교각 사이의 공간은 랄렌 강을 다니는 가장 거대한 상선조차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비교적 최근에 건설된 나머지 하나의 다리는 그런 기술은 없었기에 도개교를 만들어 물길을 막지 않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아란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 지역은 완전히 버려져 오랫동안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현재의 외성 자리에는 간신히 기단부의 흔적만 남은 시가지의 폐허가, 내성 자리에는 늘어선 기둥으로 상징되는 잊혀진 옛 신앙의 성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거대한 교각만은 원래의 장려한 흔적이 남아있어 불균형한 모습이었다 한다.

어느 신을 섬기는지 모를 성소의 존재와 함께, 마귀가 만든 다리라는 전설, 주신에게 반역한 반역천사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퍼지기도 했다.

어쨌든 아란 제국 멸망 이후 버려졌던 이 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은 어느 그룬발트 계열의 소영주였고, 이후 이 지역은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변경이 된다.

작은 어촌이었던 이 지역을 그룬발트의 선제후 폴름스 가문이 발전시켰고, 랄렌 강 수운의 중심부로 만들었다.

하류의 작지만 풍요로운 국가인 나우데사와, 상류의 그룬발트 제국 내륙 지방을 연결하는 수많은 상선들의 중간 쉼터.

그리고 인근에서 산출되는 질 좋은 철광석을 실어 보 내는 무역 거점.

그 와중에 이 작은 강변 도시, ‘팔츠부르크’는 막대한 부를 창출해냈다.

신성 그룬발트 제국의 북서부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폴름스 선제후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기도 했고 말이다.

때로는 엘랑키아 내륙으로 침공하는 대군의 사령부가 되어 황제를 모시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제국 전역에서 실려온 막대한 물자가 숙적 엘랑키아 왕국으로 진격하는 5만 대군을 먹여살리기 위해 출발하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신성 그룬발트 제국에게, 그리고 폴름스의 선제후 가문에게 소중한 보석과도 같은 도시였다.

하지만 그런 좋았던 시절은 약 10년 전에 끝났다.

새로 즉위한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가 직접 이끄는 약 9천 명의 엘랑키아 왕실군은 무모하게도 랄렌 강을 향해 진격해왔다.

오래 전 마무리되지 않은 해묵은 변경 영토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지역을 통치하던 메이플링겐 공작은 즉시 가신들에게 소집령을 내렸고, 동맹 가문에 지원을 요 청했으며, 도시의 부유함을 과시하듯 용병을 동원했다.

순식간에 1만 5천에 가까운 병력이 모였고, 이는 당연히 엘랑키아의 침공군을 압도하는 숫자였다.

양측이 모두 적극적으로 전투를 원했기에, 양측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팔츠부르크가 멀리 보이는 평원에서 정면으로 격돌했다.

그리고 이 전투, 팔츠부르크 회전에서 메이플링겐 공작의 군대는 완전히 궤멸했다.

사령관인 메이플링겐 공작과 후계자를 포함한 두 아들이 모두 사망했으며, 가신단도 태반이 전사했다.

1만 5천의 병력 중, 전사가 아니라 도망치다 랄렌 강에 빠져 죽은 자들만 6천 명에 이르렀다.

상위 군주인 폴름스의 선제후나 황제가 공석인 그룬발트 제국 황실은 대응하지도 못했다.

아니, 무언가 대응하기도 전에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천 명이었던 엘랑키아 왕실군에는 후속 지원군이 계속 합류하여 숫자가 늘고 있었으니까.

폴름스의 선제후는 메이플링겐 공작령 중 랄렌 강 서쪽을 엘랑키아 왕국에 넘겨주는 조약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이 조약이 체결된 곳이 팔츠부르크로, 팔츠부르크 조약, 아니 ‘팔스부르 조약’은 엘랑키아가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새로운 영토를 얻은 엘랑키아 왕국은 이 지역에 ‘팔스부르 공작령’을 설치했으며, 평범한 강변 도시였던 팔스부르를 확장, 방어력을 강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항구 배후의 야적장이나 빈민가로 사용되고 있던 섬을 정리하고 완전한 군사 요새인 내성을 건립했다.

물론 이 도시의 원래 역할, 즉 랄렌 강 상류와 하류의 무역을 중개하고 상선들의 쉼선이 되어 주는 역할은 여전히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와중에 지불되는 막대한 관세가 엘랑키아 왕실의 금고를 채우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지금 그 무역거점 도시에서 시끄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고 나으리, 도급 일자가 정해져 있습니다요. 이 짐이 여기서 나흘이나 대기를 하게 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저희는 어쩐단 말입니까···.”

“그룬발트 간첩들이 무역품에 숨겨서 정보와 자금을 주고 받는다고 하니 우리라고 어쩌겠나! 검사가 밀렸으니 얌전히 기다리라고!”

“아이고, 아이고··· 그러면 저희는 파산합니다요!”

“어휴··· 그래도 기다리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니까? 그러니 왜 그룬발트 놈들이랑 붙어 먹어서는!”

항구 여기저기서는 길을 막는 경비병과 관리들에게 상인들이 사정하고 있었지만 통하지 않는다.

고압적으로 나오고는 있었지만 경비병들도 관리들도 표정이 좋지는 못하다.

그들에게 항구를 자주 오가는 상인들은 어쨌거나 오랫동안 일을 함께 해온 ‘파트너’들이고 때로는 ‘윤활유’로서 작은 뇌물을 받거나 향응 접대를 받기도 한 사이니까.

게다가 항구를 오가는 막대한 물류를 몽땅 조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평소보다 인원을 늘려 대응하고 있지만 전수 조사해야 하는 재고품은 점점 늘고 있었다.

때로는 강을 지나는 상선들을 모조리 불러세워 항구로 끌고 오는 동료들이 원망스러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위에서 까라면 까는 수밖에.

지금까지 복잡하고 시끄럽지만 평화로운 항구에서 으스대며 자잘하게 뇌물이나 받던 행복한 시절이 끝난 것은 분명했다.

이러한 정책이 진짜로 ‘그룬발트 간첩’을 잡아내고 그 자금을 적발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다만 한가지 효과는 확실했다.

먼저 평소라면 그냥 통과지점에 불과했으며, 가끔 들러 짐을 싣는 정도였던 항구에 배가 며칠씩 묶이는 상황이다.

물류에 시간이 걸리며, 예전 같으면 그러려니 무관세로 슬쩍 넘어가거나, 약간의 뇌물로 해결되었을 물건들에 따박따박 관세가 부가된다.

당연히 물류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그나마도 물건이 며칠씩 늦게 들어오기 시작한다.

당연히 랄렌 강 상류와 하류의 물가가 같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는 이와 파는 이 모두가 아우성치는데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물건을 구하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물자가 귀해지면 얼마 안되는 물건을 선점하여 비싸게 팔려는 매점매석에 나서기도 쉬워진다.

그게 아니더라도 일부러 물건을 제한해서 풀며 물가 상승을 유도하는 불건전한 상인들도 늘어난다.

그렇게 팔스부르의 강도 높은 검문검색은 랄렌 강 상류와 하류를 모두 분노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불편을 겪게 된 나우데사와 그룬발트 주민들은 그 분노의 대상을 찾았다.

나우데사에서는 ‘그룬발트와 붙어 먹은’ 비르케제 공작이, 그룬발트에서는 ‘평화로운 와중 괜한 갈등을 일으킨’ 폴름스의 선제후가 그 대상이었다.

만약에라도 이게 가혹한 검문검색을 명령한 팔스부르 공작의 의도였다면 대성공이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랄렌 강 상류의 그룬발트 제국 영주들이 견디지 못하고 팔스부르를 찾아왔다.

물론 나우데사의 귀족들과 상업 길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적지 않은 여러가지 서약과 탄원, 그리고 막대한 자금 제공을 대가로 임시 통행증을 받아갔다.

이미 왜곡될 대로 왜곡된 랄렌 강 수운이다.

하지만 ‘나만이 자유롭게 검문을 피해 상류와 하류를 오갈 수 있다’라고 하면?

당연히 전에 비해서도 훨씬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평소와 같은 물류 비용으로 훨씬 비싸진 물건을 내다 팔아 차익을 얻을 수 있으니까.

어쩌면 다른 급한 상인의 물건을 대신 실어다 주는 것으로 상당한 수수료를 챙길 수도 있었다.

그러니 아예 장사를 접을 게 아니고서야, 무조건 먼저 임시 통행증을 구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빨리 살 수록 이득이 나는 것이 확실한 상품이나 다름 없었다.

이러니 갈수록 돈을 싸들고 팔스부르로 찾아오는 상인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팔스부르의 금고에 쌓이는 금화의 높이도 늘어만 갔다.

팔스부르의 통치자,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이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측근들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않았다.

오로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내역을 정해 내주고, 세세한 실행은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에게 맡겼을 뿐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본질적으로 랄렌 강을 타고 오가는 물자의 양은 크게 줄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용이 증가해 최종 도착지에서의 상품 가격은 크게 올랐다.

게다가 그 차익의 상당 부분은 상인들이 아닌, 팔스부르 공작령과 엘랑키아 왕국이 가져가고 있었다. 이 돈은 분명 엘랑키아 왕국군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평범한 지방 공작에 앞서서 엘랑키아 국왕의 원수 중 하나였으니까.

게다가 목전으로 다가온 전쟁에서 적이 될, 나우데사의 비르케제 공작과 그룬발트의 폴름스 선제후를 만인의 공적으로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다만, 이 두 주체가 욕을 먹는 만큼이나, 이 모든 일을 획책한 엘랑키아 왕국에 대한 해묵은 분노 또한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엘랑키아 왕실의 충실한 신하였으며, 국왕인 다고베르 2세에 대한 충성심도 한 점 흠 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몇년 간 국왕의 행보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예 전쟁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나우데사와의 북방 전쟁을 미지근하게 끝내 버렸다거나.

법황의 이간질에 휘말려 불필요한 군대를 일으켰고, 불필요한 국내 토벌전에서 낭비한 데다가 심지어 패배까지 했다거나.

그 와중에 왕실군 병력들을 휴가라는 명목으로 오래 방치했다거나.

대체 왕도의 대신들은 뭘 하고 있길래 그런 상황을 만드는지 분통을 터뜨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려오는 소식을 들어보면 그다지 부정적인 이야기만 있지는 않았다.

초전에서 승리해 꼴도 보기 싫었던 라솔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남서 국경 지대를 잠시라도 안정시켰다거나.

반독립상였던 남부 변경 지역을 다시 복속시키고 왕국 남부의 방어를 책임지게 만들었다거나.

뼛속까지 군인인 자신이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라 인정했다.

분명 그 유능한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의 업적이겠지. 정치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 없는 아르밀 공작이지만 그것만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엽적인 일이다. 올해의 가장 뜨거운 불구덩이는 바로 이곳, 팔스부르 성이 있는 메플렌 지방이 되리라.

라솔의 전력이 대폭 깎이고 남부 방위가 탄탄해진 만큼, 국왕 폐하의 확장 정책은 다시금 시작될 것이다.

나우데사에서의 전쟁은 소꿉장난이나 다름 없었다. 그 얼간이들은 자기들끼리 10년을 싸우라고 방치해도 승패가 나지 않을 것이다.

나우데사의 머저리들은 병력을 집결시키면 부모가 모욕당한다 생각이라도 하는지, 전국에 파편화 된 소규모 부대를 뿌려 지루한 싸움을 하기를 즐겼다.

만약 아르밀 드 브라뇰 공작 자신이 총사령관이라면 무자비하게 변경 집락부터 밀어 버릴 것이다.

피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면 굳게 성문을 닫은 도시들도 문을 열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존경하는 다고베르 2세 폐하께서 좀 더 철저하게 초토화 전술을 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뭐, 악명을 조심해야 하는 군주로서 조심할 필요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현재 나우데사에는 엘랑키아는 물론 그룬발트도, 멀리 북쪽 섬나라 알디온도 개입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거기까지다.

직접 군대라도 상륙시키지 않는 한은 큰 영향은 주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유리해도 6:4 이상으로 밀어 붙이지는 못하고, 아무리 불리해도 4:6 이하로 밀리지는 않는 옥신각신 싸움이야 뻔하지.

다만 개입한 강대국들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 그 힘이 부딪쳐 폭발할 장소는 이곳이다. 팔스부르는 그 순간을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뛰어난 기사이면서 냉정한 전략가이기도 한 아르밀 공작의 계산은 대부분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나우데사의 내전이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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