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 나우데사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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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뢰르반은 지난 라솔 왕국의 침공에 맞선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이다.
양측 합치면 수 만에 이르는 대군이 격돌할 만큼 넓은 개활지가 있는 곳으로, 좋게 말하면 개활지이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땅이다.
가까이 있는 유일한 거주지이자 지역 이름의 근거가 된 생뢰르반 마을은 인구가 수십 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고.
라솔 군의 침공이 예상되는 엘랑키아 남서부 지역을 요새로 강화한다는 것은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다만 어디를 어떤 형태로 강화하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갈렸었는데, 많은 논의 끝에 생뢰르반 지역의 초원을 굽어보는 이 위치가 낙점되었다.
나름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후비조들 중 정한 거지, 라솔 왕국이 기분 나쁘라고 크게 승리한 전장 위치에 요새를 지은 것은 아니다.
아니 애초에 생뢰르반 군이라는 이름을 패배한 라솔 군인들 기분 나쁘게 하려고 정했다는 헛소문이 있는데, 아무리 라몽 드 레뮤즈 백작이라도 그 정도로 성격이 나쁘지는···.
음···.
왠지 내가 아는 라몽 백작이라면 어느정도는 그렇게 생각을 할 것 같기도 해서 완전히 부정은 못하겠다.
어쨌든 그렇다고 해서 라몽 백작이 그런 부차적인 이유 때문에 실질적인 전술적 이득까지 포기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물론 후보지가 생뢰르반으로 선정된 것은 라몽 백작의 강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긴 하다···.
으음,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말이지만.
잠시 초원길을 달려 북쪽에 이르자, 멀리서 한창 건설중인 생뢰르반 요새가 눈에 들어온다.
최신 공법으로 건설 중인 아름답고도 장대한 요새.
아직은 건설중이라 일부는 석조로, 일부는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혹시라도 완성되기 전에 실전을 치르게 될 경우를 대비한 방편이었다. 물론 흙으로 된 부분은 최대한 빨리 석조 요새로 대체될 예정이고.
인부들을 고용해 겨울 동안에도 조금씩 건설을 해오고는 있었다.
다만 건조하고 추운 겨울에는 거중기를 지탱하는 끈과 결합부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대체로 인력으로 해결이 가능한 업무 중심으로 진행했었다.
날이 어느정도 풀린 이후, 인력과 장비를 충원해 완성에는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멀리서 보면 요새는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데, 이는 요새의 형태가 땅을 넓고 깊게 판 후, 석축을 거기부터 박아 올린 형태이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요새가 주변 땅과 같은 높이의 지면에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면, 생뢰르반 요새는 넓게 판 해자 안쪽에 웅크린 형태라고 해야 할까.
때문에 높은 성탑과 망루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아 주변을 압도하는 듯한 모습은 아니다.
대신 성을 공격하려는 자들은, 성벽에 닿으려면 깊이가 7미터나 되는 가파른 비탈을 타고 내려온 다음에도 한참을 더 달려야 비로소 요새 아래쪽에 닿을 수 있다.
‘멍청한 녀석들, 성을 보기 좋으라고 짓는 놈들이 있어!’
이 요새를 설계하고 건축 책임자도 맡은 드워프 장인, 에오르크 레타일은 그렇게 말하며 분통을 터뜨린 적이 있다.
물론 때로 거대한 요새는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며, 그 장대한 형태가 주는 위압이 실제로 통치에도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으니 전혀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생뢰르반 요새의 경우는 철저하게 방어적 기능만을 우선시하는 최전방 거점이므로 외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땅을 파고 들어간 벙커와도 같은 형상을 하게 된이유는 당연히 포격에 대한 저항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포격에 내성을 키우기 위해 성벽을 낮고 두껍고 경사지게 짓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긴 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깊이 파내려가기까지 한다면 공성포병에게 상당히 까다로운 작업을 하게 만든다.
지상에서 보이는 피탄 면적이 좁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금만 멀리 날리면 요새를 넘어가 버린다.
그렇다고 거리를 짧게 잡으면 흙바닥에 박혀 버린다.
최악의 경우에는, 전방에서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아군의 뒤통수를 때릴지도 모른다는 압박감도 각오해야 하니 말이다.
그에 비해서 반격해오는 요새 포대는 지면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우월한 시야를 자랑하며 공성포를 노릴 수도 있고.
거기에 완벽한 별 모양의 성형 요새 수준은 아니지만, 성벽을 기어 오르는 자들을 최소 2방향 이상에서 쏘아대는 십자포화로 제압하도록 세심하게 설계된 구조는 전통적인 공성 역시 잘 견딜 수 있으리라.
에오르크 드워프 영감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최신 공법의 요새가 확실하다. 일부러 트집을 잡을래도 잡을 게 없네.
요새라는 하드웨어 만큼 중요한 것이 이를 지키는 소프트웨어, 즉 수비군이다.
생뢰르반 요새는 근본적으로 1개 연대가 1년 동안 농성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말하는 1개 연대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트랑카벨 정규 연대, 혹은 드 레뮤즈 정규 연대를 말하는 것으로 1200명에서 2000명 정도이다.
방어에 필요한 최저선의 병력은 3개 중대로 설계되었으며, 억지로 밀어 넣으면 약 5천 명 까지도 입성이 가능하기는 하다.
다만 이런 경우 비교적 넉넉하게 만든 성벽 안쪽 공간과 보조 성벽길에 병사들로 가득 차긴 하겠지만.
기왕 짓는 김에 더 크게 하자는 안도 물론 있었다. 3개 혹은 5개 연대가 주둔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안인데, 요새가 너무 크면 오히려 비울 때가 문제가 된다.
상시 할당할 수 있는 전력과 비축 물자를 고려해 이 정도로 정해졌다. 몇 개 연대를 상시 배치하는 것은 누가 봐도 무리였으니까.
한편 평지에 요새를 하나 새로 짓느니, 지방도시를 성벽으로 둘러싸 요새화 하자는 의견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반대했다.
건설 기간이나 필요 자원 조달도 문제일 뿐더러, 마찬가지로 제대로 지키려면 주둔군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요새는 아무리 막강해도 그 자체가 움직일 수는 없으므로, 만약에라도 적이 우회해 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다.
게다가··· 너무 안전한 도시에 안주한 나머지 방어 전략이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룬발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최근 작은 패배를 겪기는 했으나, 여전히 막강한 전력을 가진 야전군이 재정비를 위해 어느 요새화 된 도시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요새를 적이 포위해버리는 바람에 다시는 나오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로 속절 없이 말라가다가 항복했다.
너무 크고 안전한 요새는 덫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다. 야전군 하나를 그런 식으로 잃어버렸으니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었고.
이런 점을 고려한 규모가 현재의 생뢰르반 요새이다.
포위하는 데는 최소한 서너 배의 적이 필요할 테고, 본격적으로 공격하려면 훨씬 많은 숫자가 필요할 것이다. 막대한 희생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위협적인 생뢰르반 군 본대가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고, 혹시라도 이를 이기더라도 드 몽파르지에 공작의 서부군도 거리가 멀지 않다.
라솔이건 누구건, 공격측으로서는 상당히 골칫덩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방치하자니 후방에 연대급 적이 활동하게 되는 것이고, 포위해 고립시키자니 그만한 병력이 묶여 낭비되고 만다.
그리고 평시에는, 이곳이 엘랑키아 남서부에 펼쳐진 경계망의 핵심이 된다.
전방에서 모인 모든 정보는, 한 두 단계를 거쳐서 모두 생뢰르반 요새로 모인다.
그러니 상당히 성실함과 책임감이 필요한 자리가 될 것이다. 전투 업무를 부차적으로 두더라도 원래 정보 업무는 힘든 일이니까.
요새 방위사령관은 군 내부에서 서열도 상당히 높게 지정되었는데, 아직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차츰 적합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
지난 전쟁을 함께 했으니 드 레뮤즈 가문의 가신들은 제법 만나보았지만, 그 외의 가문은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내가 심장을 멈추었던 청년 카렐 드 상포리앙이 속한 드 상포리앙 백작가라거나.
겨울 동안은 각종 동원 시스템이나 편성, 여러 가문에 주어질 각종 책임과 한계 등에 대한 매뉴얼을 만드느라 정말 너무 바빴다.
이런 쪽으로는 손발이 잘 맞는 첼레스티나가 함께 있었다면 훨씬 수월하게 했겠지만··· 첼레스티나는 지금은 카르카냑에서 바쁘다.
간부 특성화 교육에도 부교관으로 참가하고, 선발 사수 교육도 책임지고 있고, 지난 전쟁 이후 규모가 늘어난 트랑카벨 포병군 교육도 담당하고 있으니까.
하긴, 슈토르히 시절에도 첼레스티나는 신병 담당이었지. 사람 보는 눈은 기가 막히고, 잠재력을 끌어 내는 것도 훌륭한 다재다능한 아가시니까.
···어째 신병 군기 담당은 루트비히였지만, 첼레스티나를 더 무서워하는 신병들이 많긴 했더랬지.
그래도 매주 첼레스티나가 보내오는 편지, 절반은 보고에 가깝고 절반은 횡설수설 잡담인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는 모양이다.
세가지 교육을 함께 진행한다는 것은 정말 보통일이 아닐 텐데.
특히 첼레스티나처럼 성실한 교관은, 단순히 맡은 훈련이나 강의를 진행하고 끝이 아니라 배우는 훈련생들 개인의 특성을 기억해두니까 말이다.
아무튼 보고를 종합해보자면, 내가 없는 동안에도 트랑카벨에서는 훌륭한 재원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모양이다.
이들이 활약할 일이 아예 없도록 평화가 지속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절대로 그럴 것 같지는 않으니 참.
기왕이라면 가능한 한도 내에서는 쳐들어온 놈들이 기겁을 할 정도로 정강한 군대를 만들어 둬야지.
나는 그렇게 잡다한 생각을 하며 한창 건설중인 생뢰르반 정문으로 통하는 다리를 건넌다.
깊이가 7미터나 되는 남달리 깊은 해자 위에 걸쳐진 3개의 다리,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정문 다리이다.
이 세개의 다리가 아니라면 해자를 기어 내려가 밖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쪽문을 통해 오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폭이 제법 넓은 정문 다리를 제외하면 나머지 두 다리는 수레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그러니 물자 보충이나, 급한 경우 중대급 부대의 출입에 쓸 수는 있겠으나 공격자들이 이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무 좁아서 제대로 된 공성병기를 옮기는 것은 불가능일 뿐더러, 혹시라도 보병이 진입한다고 해도 세 방향에서 집중사격을 당해야 하는 판이니까.
음, 생각해보면 이런 것도 순수 군사 목적의 요새라서 가능한 방식이다. 평소에 민간인들이 오가는 도시라면 통로를 이렇게까지 줄이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이 요새는 순수하게 전쟁을 위한 건축물이다. 들어오는 것도 나가는 것도 불편해도 상관 없었다.
성문을 지나는데 한참 비계를 세워 두고 작업 중인 인부들이 보인다. 일단 형태부터 잡고 보다보니 후속할 일거리가 많은 모양이지.
“에트 참모장님!”
말에서 내려 요새 내부로 들어가려는 참에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인멜츠 경?”
“전령이 이쪽으로 오신다고 하길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참모장.”
“아, 그러셨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인멜츠 역시 드 레뮤즈의 군사 고문이자 측근으로서 바쁘디 바쁜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나처럼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었을 텐데.
그런 아인멜츠가 직접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려나?
“라몽 백작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시급히 논의할 내용이 있습니다.”
“백작께서요?”
“예. 얼마 후 왕실군이 출병하기로 하면서, 우리 생뢰르반 군에도 병력 요청이 왔습니다.”
“갑자기 출병이요! 어디로 말입니까?”
“나우데사의 내전이 격화되었습니다.”
나우데사의 내전이 격화되었고, 그룬발트에서 개입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아인멜츠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나쁜모양이다. 그룬발트는 대놓고 정예 용병군을 파견했고, 준비가 안된 나우데사 연방군은 삽시간에 붕괴한 모양이다.
아니 이 인간들은 겨울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우데사는 북쪽이라서 더 추울 텐데.
그나저나 출병이라니··· 지난 전쟁 때 서부군의 지원을 받았으니 완전히 손 놓을 수는 없지만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인 신생 사령부인데!
이번에는 느긋한 전쟁 준비는 물 건너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