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나우데사 내전
아쥬흐와 루트비히는 논의를 이어간다.
두 사람 다 이유는 살짝 다르지만, 콘도티에레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콘도티에레에게 또 하나의 부담을 안기고 싶지 않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이제 와서는 콘도티에레의 최종 판단 없이 트랑카벨 영지군을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도 대리 사령관이라는 직위 자체가 군사적 판단을 맡긴다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판단을 맡기더라도, 보다 편하게 선택지를 고를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우선 왕실로부터 전달된 ‘출병 요청’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왕실에서 내려온 요구는··· 소집령이 아니라 출병 ‘요청’이군요.”
“맞아요.”
소집령은 종군의 의무가 있는 영주에 대한 징집령이라고 할 수 있다. 군주로서 신하에게 요구하는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요청은 말 그대로 요청이다. 장차 있을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을 구성하는 군주로서 신하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다.
전자는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최소한 영지를 빼앗기거나 가주가 투옥될 정도의 중죄이다. 반역에 준하는 잘못이기 때문이다.
허나 후자는 어디까지나 요청이니 종군의 의무는 없다.
실제로 트랑카벨 가문과 블랑독의 다른 영주들은 왕실에 대한 병력 동원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유는 매우 당연하게도, 지금 콘도티에레가 정신없이 바쁜 이유인 신생 생뢰르반 군사령부에 병력을 보내고 유지하는 것으로 그 의무를 갈음하기 때문이다.
봉건의 피라미드 관계는 군주의 신하에 대한 일방적 착취 관계가 절대 아니다.
만약에라도 명분 없이 그런 짓을 했다가는 봉신들에게 ‘반역이지만 반역이 아닌 반역’을 저지를 빌미를 주고, 군신관계가 어그러져 엘랑키아 자체가 무너지리라.
이 명분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을 제어하는 안전선이 되기도 한다.
가령, 작년까지만 해도 충돌했던 왕실과 블랑독 지방이 끝장을 보지 않아도 되었던 것도 명분 때문이며, 빠르게 화해하고 관계를 정상화한 것도 명분 때문이다.
결론은, 이론상으로는 트랑카벨 가문이 왕실의 요청을 반드시 받아들이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거절하기에도 마음이 편치 않네요.”
“저는 평생을 병영에서 살아 와서, 궁정의 규범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저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네, 국왕 폐하게 이렇게까지 나왔는데요···.”
병력 요청의 행간을 살피자면, 이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부탁한 것이다. 무릎을 꿇는 정도는 아니지만, 고개를 숙이는 정도는 된다고나 할까.
최근 여러가지 일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은 지방의 일개 자작 가문,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베르마유에서 찾아온 사자가 직접 왕명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수도 있다.
물론 아쥬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변경의 찬밥 신세가 아닌, 존중받는 봉신단의 일원이 되었다는 느낌은 확실히 받았다.
다 떠나서 오로지 트랑카벨과 블랑독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냉정하게 생각해보아야 했다.
“루트비히 경, 만약에 왕실군이 나우데사에 출병하게 되면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실 수 있나요?”
“엘랑키아 왕실군의 재출병이라···.”
루트비히는 지난 북방 전쟁에서 슈토르히 연대를 이끌고 엘랑키아의 침략군과 싸웠었다.
그러니 어떤 점에서는 왕실군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외부인일지도 모른다.
엘랑키아 왕국은 원래 강국이다. 국토는 넓은데다 비옥하고, 마치 날때부터 강인한 기사로 태어나는 듯한 군사 귀족 가문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
그런 와중에 국왕이 직접 뽑아 보낸 정예 군단이니, 원래라면 소국인데다 연방 정부의 권한도 부족한 나우데사가 당해낼 리 없다.
다만 좁은 국토를 가득 채우다시피한 요새군과 복잡한 지형이 엘랑키아 기사들의 활약을 방해했고, 간신히 대등하게 싸웠다는 느낌이다.
물론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패배했고, 국토의 일부를 할양하는 강화조약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게다가 이번에는 나우데사 전체가 일치단결해서 엘랑키아를 상대로 싸우던 북방 전쟁과는 상황이 다르다.
현재 내전중이고 외세가 개입 중이다. 엘랑키아의 나우데사 장악은 신성 그룬발트 제국도, 바다 건너의 알디온 왕국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엘랑키아와의 전쟁을 각오하고 대군을 보내 도와줄까?
고민을 해보지만 그렇지는 않으리라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국왕이 직접 나선 엘랑키아의 정예는 돈과 물자를 얼마를 대 준들 상대할 수 있는 정도의 강함이 아니다.
“그룬발트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나우데사는 엘랑키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역시 그렇겠지요···.”
루트비히 자신이 그룬발트 출신이라 잘 안다. 지금처럼 황제도 없이 선제후들이 각종 이해관계로 다투는 와중에는 결코 엘랑키아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동상이몽인 선제후들을 하나로 묶을 사건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말이다.
···엘랑키아가 그룬발트의 본토를 침공한다던가 하는.
“아마도 엘랑키아 왕실에서는, 우리 트랑카벨 가문의 직접적인 조력이 필요한 건 아니겠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쥬흐 양.”
얼마 전까지 사납게 싸웠던 지방 정권이 왕실에 복속되어 국왕의 출병에 지원군을 보낼 정도가 되었다··· 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리라 생각한다.
그룬발트와 같은 외국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북부 귀족에 대한 상징성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한편으로는 병 주고 약 주냐는 분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섬기기로 결정한 이상 토를 달고 싶지도 않다.
당장 트랑카벨 가문이 받을 왕실의 호혜 문제가 아니다.
생뢰르반 군의 편성은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한 대비다. 향후 반드시 왕실과 북부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올 것이다.
‘열 명에게 마음의 빚을 안겨두면, 셋 쯤은 내가 필요할 때 도와주더구나. 그 중 한 명은 친구가 되고 말이지. 남는 장사가 아니겠느냐?’
언젠가 할아버지인 아롱드 트랑카벨 자작이 했던 말이다.
참고로 아롱드와 친구가 되었던 그 ‘한 명’이 다름아닌 콘도티에레였으니, 이건 남는 장사 정도가 아니었다.
“그럼 일단 왕실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는 전제로 이야기를 해 봐요. 루트비히 경의 조언이 더더욱 필요하겠네요.”
“기꺼이 돕겠습니다, 아쥬흐 양.”
다소 이유는 다르지만, 이 두 사람은 콘도티에레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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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들 집합!”
“집하압!”
“저기 숲 끝쪽에 나무 보이지? 저기서 반대편, 저쪽 개울까지 선을 긋는다! 알겠나?”
“옛!”
“2개 중대가 선두, 1개 중대가 후위로! 침착하게 훈련한 대로 하자. 알겠나?”
“옛!”
야로스 발렌켄드는 부대로 돌아가는 장교들을 보며 혀를 찼다.
모든 게 혼란스럽다.
혼란에 빠진 민병대는 행군 종대에서 횡대로 바꾸는 간단한 기동조차 못하고 헤매고 있다.
장교들도 정신을 못 차리니 소대와 소대가 뒤섞이고 중대의 지경선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어느 서늘한 새벽. 론델다이크 숲 부근의 늪지대에서, 야로스는 휘하 병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들이 상관인 오란덴 남작에게 받은 명령은 ‘늪지대 건너편의 아군을 구원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야로스는 일단 여기서 멈추고 전투 대형을 갖추는 것을 선택했다.
딱히 오란덴 남작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아직 불만이 많은 병사들이 종군을 거부했기 때문은 아니다.
몇이나 되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구할 예정’ 이었던 아군이 죄다 늪지대 밖으로 튀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악! 으아아아!”
“도망쳐! 흐으으으···.”
“살려줘, 살려주세요, 제발!”
최소한 수백 명. 늪지대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야로스의 부대가 대기하는 방향으로 도망병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도망가! 끝장났어!”
“흐아아아아, 엄마! 엄마아!”
흐트러진 대열을 마구 뚫고 지나가는 이성을 잃은 도망병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울부짖거나, 찢어져 누더기가 된 옷을 펄럭거리거나, 전부 다이거나 했다.
어찌나 급하게 도망쳤는지 대부분은 무기도 없었고 옷도 벗겨져 반 벌거숭이가 된 자들도 있었고 늪지대에 빠져 진흙투성이가 된 자들도 있었다.
“길을 비켜 줘! ‘손님’들은 보내줘라!”
야로스의 병사들은 도망병들을 막는 대신, 빨리 뚫고 지나가라고 길을 내 주었다.
동료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는 병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눈동자가 흔들린다.
이건 좋지 않다. 공포는 전염되기 쉬웠다. 야로스는 차라리 적이 빨리 모습을 드러내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다.
저 빌어먹을 안개! 날이 좀 풀려서 살만해졌다 생각했더니 저주받을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탕! 타탕! 탕! 탕!
멀리 늪지대 안쪽에서는 단속적으로 총소리가 들린다. 별 일이 없다기에는 너무 많았고, 전투중이라기에는 너무 적었다.
야로스의 머리속을 온갖 부정적인 예상이 뒤덮는다. 대체 저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봐! 이봐, 대체 무슨 일이지?”
“끝났어! 그룬발트 놈들! 몰살당했다! 으아아아아!”
참다 못해 지나가던 장교를 붙잡아 말을 들어보려 했으나, 눈이 뒤집힌 장교는 뜻 모를 소리를 횡설수설하더니 몸서리를 치며 멀어져갔다.
···늪지대 너머에 무슨 지상지옥이라도 펼쳐진 건가?
빌어먹을, 나우데사의 전쟁은 이런 게 아니잖아.
서로 눈치보면서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밀어 붙이고, 적당히 물러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평화로운 전쟁’을 했잖나.
숲을 빠져나오는 도망병들은 잦아들었지만, 안개는 잦아들지 않는다. 도망칠 놈들은 다 도망쳤나?
아우성치던 도망병들이 멀어지자 숲속은 기괴하게 조용해졌다.
숲 너머에서 들리던 총소리도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고요해졌다. 고요해서 더 무섭다.
“으, 으아아!”
“살려줘어어!”
아직 끝이 아니었다. 안개와 나지막한 잡목숲 너머에서 몇 명의 도망병들이 또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도망병 뿐이 아니었다.
“끄허억!”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손이 도망병의 머리를 잡아채고, 사정없이 목을 긋는 모습이 보인다.
맥없이 쓰러진 도망병의 몸 아래로 시뻘건 피의 웅덩이가 번져간다.
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피와 화약 연기를 뒤집어쓴 시커먼 얼굴에 허연 눈동자가 희번뜩 거리는 것이 정말 악마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악마는 아니다. 저들은 명백히 인간이다.
게다가 혼자도 아니다. 비슷한 복장을 한 자들이 뒤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공포에 딱딱하게 굳은 병사들 눈에는 안개 속에 몸을 숨겼던 죽음의 사자처럼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이!”
“명령 없이 절대 사격하지 마!”
“훈련을 기억하라! 우리는 상승의 야로스 부대다!”
“예··· 예엣!”
상승의 야로스 부대라니···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게 부대 기강 유지에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팔아먹을 수 있었다.
적과의 거리는 100여 미터,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최소 수십 명. 모두가 격렬한 전투를 뚫고 온 모습이다.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방금 엉망진창으로 박살나 도망치던 아군을 갈아버린 건 저들이 분명했다.
완전히 무너진 상대를 일방적으로 추격하다가 갑자기 대열을 갖춘 부대, ‘상승의 야로스 부대’가 등장하자 조금 놀라 전열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제발 그냥 가라, 제발 그냥 가라···.’
바람을 속으로 주문처럼 왼다. 왼편을 보아도 오른편을 보아도, 누가 보아도 상승의··· 아니, 주테르베이크 민병대는 전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가지런하지 못하고 삐뚤빼뚤한 대열, 공포에 질려 허리를 뒤로 뺀 병사들의 자세, 허옇게 질린 얼굴까지.
그래도 명색이 전열을 갖춘 밀집 보병대다. 이미 전투와 추격전에 지친 산개 대형의 적에게는 상극이나 다름 없다!
그러니 지금은 일단 물러나서 다음을 기약···.
“저, 적이 온다!”
“옵니다, 대장님!”
빌어먹을, 야로스의 간절한 소원은 배신당했다.
이쪽 부대 꼴이 엉망인 것을 눈치챘는지, 어설프게나마 대열을 정돈한 적이 전진하기 시작한다.
“사격준비!”
“사격준비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