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나우데사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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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이소브론 대공을 믿고 따를 수 없소!”
“그래도 대공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얼마인데···.”
“그러니까 가서 물어보자는 게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 복무하기로 서약을 한 몸인데···.”
“반역을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지 않소!”
야로스 발렌켄드는 눈 앞에서 벌어지는 휘하 병사들의 혼란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의 커리어는 조금 잘못된 방향이기는 했지만 잘 풀리고 있었다.
비록 작은 승리였지만, 세 번 연거푸 승리했다.
요새를 하나 함락했고, 준비된 방어선을 하나 격퇴했으며, 행군중이던 적 중대 하나를 기습해서 모두 포로로 잡았다.
여기까지 들으면 대단한 전공을 세운 상승의 지휘관이라도 된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게 대단할 것 없었다. 마치 몇 년 복무 경력은 쌓았지만 실상은 허당인 용병 지원자들이 과장해서 말하는 딱 그 수준이랄까.
요새 공격의 경우, 참호를 늘려가며 포위만 하고 있었는데 딱 타이밍이 맞아 떨어졌을 뿐이다.
참호선이 화승총 사거리에 도달하고 다음 날, 요새에는 백기가 올라왔다.
나중에 요새 함락 후, 1개 중대와 함께 점령지 조사를 맡았던 야로스는 요새 내에 곡식 한 톨 물 한 모금 남아있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민병대는 정말 분기탱천하여 기분만으로 요새를 습격했던 것이고, 아마도 실제로 요새를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예비 총탄도 없이 공격을 시작했던 야로스의 주테르베이크 중대 역시 도찐개찐이었지만 그래도 운 좋은 도찐개찐이었다.
그리고 방어선 격퇴 역시 어설프게 숲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방어선이랍시고 차리고 있었던 상대파 민병대를 후방에서 기습했을 뿐이다.
경비조차 세워두지 않고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도 오지 않는 개활지 반대편을 노려보던 민병대는 후방에서 총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오자 삽시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교전다운 교전은 전혀 없었으며, 아군 피해는 부상 일곱 명이 전부였다. 그 중 두 명은 비탈을 뛰어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다리를 다친 것이었고.
마지막··· 중대를 통으로 포로로 잡은 건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디 가서 자랑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올 겨울 들어 눈이 가장 많이 온 날이었다. 정찰대에게도 거점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지 말라고 엄명이 내려질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순찰 중이던 그의 중대는 얼어 죽기 직전에 적병 대열을 발견했고, 무기를 회수한 후 주둔지로 돌아왔다.
포로 호송이라기 보다는 인솔에 가까웠다고나 할지.
이 추운 날씨에 무릎까지 눈이 쌓인 설원에서 길을 잃고 하루 종일 시달린 적병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 무리의 동상환자가 포로 목록에 추가되었다.
야로스 입장에서는 슈토르히의 옛 용병 동료들을 만나면 뭐 승리했다고 자랑하기도 그런 사건들이다.
하지만 병사들에게는 승리는 승리였다. 결과가 좋았다 뿐이지, 상황이 나빠지려면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세 차례의 승리가 이어지는 와중에 아군 피해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주테르베이크의 억센 농부 출신 병사들은 야로스를 숭배하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하던 와중에 일단 세 차례나 승리하고 다수의 포로를 잡아 체면을 차린 그의 상관, 오란덴 샤도 비존테 남작 역시 기뻐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소 경력이 왜곡되고 있었고, 기대했던 안락하고 평온한 삶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나름 커리어가 하나씩 착착 쌓여가고, 수하들에게도 상관에게도 찬사를 받는 삶은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전쟁 중이지만, 아직 전투 다운 전투는 벌어지지 않는다. 서로 기세만 올릴 뿐,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단순하게 겁쟁이들이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승리하고 싶다는 절박함이나 이유가 보이지 않는 상황.
이런 수준에서 적당히 전쟁이 마무리 된다면 어떤 점에서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게 불과 나흘 전의 일이다.
“야로스 대장!”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던 병사들이 야로스를 부른다. 보급품 상자 위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그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병사들의 대표단으로 보이는 청년 세 명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하급 장교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하지만 한심하다고 혼내지는 않는다.
이들 또한 다소 출신이 좋거나 대공가와 인연이 있을 뿐, 본업이 따로 있는 소시민들일 테니까.
전쟁이 직업이었던 전직 용병인 자신과는 다르다. 이들에게 같은 눈높이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저희는 이소브론 대공께 진상을 확인하기 전에는 더 이상 싸울 수 없습니다! 만약에 대장님이 우리를 막으신다면···.”
“내가 왜 자네들을 막겠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주테르베이크의 자유민들인 자네들을 나는 막을 수 없다고 말했네. 다만 그 전에 한가지 제안을 해도 되겠나?”
“제, 제안이라니 어떤 것인가요?”
나우데사라는 나라의 상황이 이렇다.
연방 정부부터가 일곱 도시의 연합체이며, 각 도시는 수많은 자유민들의 연합체이다.
귀족의 수는 적고, 사실상 농노인 예속민의 수도 적었으며, 자유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다 부유한 자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민들의 목소리가 큰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대공의 군대에서 복무하기로 서약한 이상, 내년까지 종군할 의무가 있기는 했으나···.
지금 문제는 이소브론 대공이 연방을 대표하며 나우데사를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병사들이 의심하는 판이라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의혹이 돌고 있다는 것은 나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군무를 이탈한다면 이는 반역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대장···.”
“만약에 저런 소문 전체가 대공의 반대파 측에서 저지른 농간이라면 어쩔 텐가? 적의 선동에 놀아난 반역자가 되어도 상관 없는가?”
“그건···.”
상대의 의견을 어느정도 긍정하면서도 일반론을 강하게 말하자, 분노한 상태였던 병사들이 풀이 죽는다.
그 동안 병사들과 관계를 잘 챙겨 와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병사들의 분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점도.
평범한 봉건 군대와 달리, 병사 개개인의 의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용병단에서도 이런 종군 거부 사태는 종종 발생한다.
슈토르히에서는··· 흠, 아직 없었던 것 같지만.
“내 제안은 이렇네. 이런 상황이니 더 나아가 진격하거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겠네. 하지만 자네들은 이소브론 대공의 수하이기에 앞서서 연방의 군인이니, 이 거점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네.”
“....”
“잠시 이 곳을 지키면서 상황을 살피도록 하자. 나 역시도 대공 전하와 오란덴 남작께 자네들이 불안해하는 이유에 대해 전하도록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더 궁금하거나 불만 사항이 있으면 이야기하게. 함께 전하도록 하지.”
한 번 불만을 터뜨리고, 나도 불안함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전하자 부대 내 온건파의 목소리가 커진 모양이다.
다행히 부대가 공중분해되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병사들 불만이 폭발 직전이라고, 바로 대응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이라고 보고를 올려야겠다.
하지만 최근 이소브론 대공의 행보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누가 봐도 외부에서 뿌린 것이 분명한 악성 선전이 나우데사 전역에 퍼지고 있는데, 어떤 대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로스 자신은 이소브론 대공과 직접 대화한 적은 없지만, 대공의 개인 호위대인 만큼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는 없지 않다.
분명 대공은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인간이다. 먼발치에서만 봐도 평소 하고 다니는 모습이나, 호위대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만 봐도 말이다.
하지만 최근 도는 악성 소문처럼, 정말로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 전투의 승패를 조작하고 영토의 일부를 알디온에 팔아 먹으려 할 정도로 악질일까?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주변의 측근들까지 많은 무리가 전부 한통속일 것이라는 건 말이다.
야로스가 생각하기에, 의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보냈던 것이 최악의 한수였다. 다들 의심하듯 진짜로 의회 점령이 목적이었다면 몰랐을까.
괜히 의심만 당하고 반대파에게 공격할 거리만 만들어줬으니 말이다.
지금 나우데사에서 가장 큰 계파가 이소브론 대공의 계파이며, 반대파의 우두머리는 비르케제 공작이다.
그런데 최근 두 사람 모두 어디 숨어있기라도 한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어설픈 전쟁은 대체 누구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수상한 생각이 너무 가지를 뻗어가기 전에 자른다. 겨우 중대급 지휘관인 자신은 까라면 깔 뿐이지.
“자네들도 돌아가게. 병사들 통제 잘 하되, 너무 심하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불만 말하는 것 까지 터치하지는 말게.”
“알겠습니다, 대장님.”
자신을 보는 젊은 하급 장교의 표정이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년의 표정인 것을 보고 진저리를 친다. 너무 신뢰 받고, 너무 기대 받으면 뒤가 안 좋은데.
과연 콘도티에레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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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랑키아 왕국의 재상, 뮈르텔 드 생프랑보는 또 늦은 시각에 왕궁의 복도를 빠르게 걷는다.
최근에는 가급적 자는 국왕을 깨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보는 즉각적으로 알리지 않으면 안되는 정보이다.
아니, 이전 어전회의에서 국왕이 직접 들어오는대로 전해달라고 했던 정보이다.
“오셨군요, 재상.”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엘랑키아 국왕 다고베르 2세는 졸린 눈치가 아니다. 편한 복장이기는 했지만 재상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깨어 계셨습니까, 폐하?”
“왠지 왼쪽 어깨가 쑤셔서 말이지요. 이런 날은 무슨 일이 일어나더군.”
국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왼쪽 팔을 크게 돌리며 고개를 꺾어 뚜둑 소리를 낸다.
그래 이런 사람이었지. 뮈르텔이 신하로서 섬기는 군주는 묘하게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전장에서건, 궁정에서건.
“보고는··· 역시 나우데사에 관한 보고인가요?”
“정확합니다, 폐하. 지금 나우데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의 배후에 그룬발트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흐음···.”
뮈르텔은 방금 사무실에서 짧게 요약한 보고서를 왕에게 넘긴다.
당연히 국가와 국가 단위의 공식적인 지원은 아니었다. 다만, 그룬발트에 거점을 둔 일부 상단과 나우데사 북부 도시들 사이의 무역에서 이상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한 거래에서는, 북부 특산의 최상품 청어가 평균가의 600배가 넘는 가격으로 팔렸다.
또 한 거래에서는, 유리 공방에서 만들어진 다색 꽃병이 평균가의 500배가 넘는 가격에 팔려나갔고.
“...철저하게 하려고 했으면 이런 흔적도 남지 않게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나요?”
“장부를 이중으로 조작하고 길드에 보고를 숨기기는 했습니다만···.”
“결국 소문은 다 났다?”
“예, 폐하.”
조심하는 티를 내기는 했으나, 굳이 주변 상인들을 통해 알려질 수 밖에 없는 수단을 거쳐 막대한 돈이 그룬발트에서 나우데사로 움직였다.
이건 사실 숨길 생각이 없었다는 이야기.
엘랑키아에 대한 도발이다.
“여기에 더해서 말입니다, 폐하. 나우데사에는 이소브론 대공에 대한 고약한 소문이 익명의 투서를 통해 돌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내용인가요.”
일단 질문은 하지만 정말 의문형은 아니다. 대충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니까.
“전쟁에서 일부러 졌다, 베르시 반도를 알디온에 할양하려고 했다, 의회를 해산시키려고 했다, 이런 내용입니다. 혹시 자세한 보고가 필요하시다면···.”
“아닙니다. 뭐 누구나 지어낼 수 있을 뻔한 이야기겠죠?”
“예. 한가지 보고드릴만한 사항은, 그 자료 출처중에 그룬발트 황실에서 수집한 것으로 보이는 종이가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도 그룬발트에서 뿌린 내용이군요.”
이소브론 대공은 극도로 탐욕스럽고 자기 보신에만 철저한 인간이다. 도저히 인간 대 인간으로 호감이 생기는 자는 아니었다.
허나 그만큼 황금을 모으는 재능도 있었고, 그렇게 긁어모은 부를 적절하게 풀어 영향력 하의 도시를 발전시키고 부하들을 충성하게 할 줄도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엘랑키아와 손을 잡은 것은 단순히 뇌물 때문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그게 나우데사를 현상유지시키는 가장 좋은 선택이었으니까.
애초에 주전파에 힘이 실려 엘랑키아와 불리한 전쟁을 시작도 하지 않았더라면, 국경 영토를 뜯길 필요도 없었겠지.
아쉽게도 짧은 평화였다.
“왕실군의 상황은 어떤가요, 재상?”
“겨울 동안 충분히 쉬면서 재편성 중입니다. 봄에는 전에 없이 강건한 군대가 되겠지요.”
항상 전쟁을 걱정하고 말리는 입장이었던 뮈르텔도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엘랑키아 입장에서는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