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2. 고요함
###
옛 카르카냑 성주 공관, 현재는 트랑카벨 영지군 사령부로 사용되고 있는 옛스러운 건물에서는 ‘간부 특성화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거대한 방 한가운데에는 길이가 몇 미터나 되는 거대한 탁자 위에, 몇가지 지형지물이 그려진 식탁보만큼이나 커다란 천이 놓여있다.
그게 실제로 깨끗하게 세탁된 식탁보를 재활용한 천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 탁자의 양쪽에는 각각 5명의 트랑카벨 영지군 장교들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싸듯, 수십 명의 남자들이 둥글게 둘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전한 최후방, 그것도 적이 있을리 없는 한겨울이건만 그들 모두는 제복에 투구를 제외한 갑옷까지 챙긴 차림새이다.
덧문이 닫혀있기는 하지만 난로가 없는 실내인지라 온도는 상당히 싸늘하다.
가만히 있으면 추울 법도 한 날씨지만 탁자를 둘러싼 열 명의 남자들은 열기로 가득한 얼굴이다.
뚫어져라 테이블 위를 쳐다보고 있으며, 낮은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옆의 사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다음 3분!”
마치 죄인에게 판결을 알리는 판사의 목소리처럼, 엄숙한 목소리가 선언하듯 울린다.
그러자 양측의 각각 다섯 명의 장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몇 명은 종이를 꺼내 무언가 적기 시작하고, 간결하지만 격렬하게 의견을 나눈다.
“마을 뒤편에 보병을 조금 더 증원하면 어떨까요? 결국 청군이 언덕을 우회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마을을 통과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마을까지도 우회해서 측후방을 노리게 된다면···.”
“그럼 내선의 이점을 이용하죠. 그 때는 측면을 따라 길게 선을 긋고 지키면 됩니다. 기병이 우회한다고 해도 소수가 아니겠습니까?”
“으음, 그럼 좌측면은 그렇게 지키도록 하도록 하지요. 주공은 우측에서 시작되고 있으니까.”
“그럼 그렇게 건의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전장은 아니다. 식탁보를 재활용해서 만든 커다란 간이 지도 위에 십수 개의 나무토막이 병력을 상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장교들의 태도는 매우 진지하다.
설령 눈 앞에 있는 것이 나무를 조각해서 만든 상징물 따위가 아닌 실제 군세였다고 해도, 이만큼 진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연대장··· 아니 사령관님, 좌측에서는 이와 같이 건의를 드리려고 합니다. 추가 보병 부대를 마을에 이처럼 배치하여···.”
“예비 기병대의 위치는 어디요?”
“이쪽과 이쪽, 그리고 이쪽입니다. 각자 담당 영역에서 중대장 판단 하에 행동하도록 자율권을 부여했습니다.”
“괜찮은 것 같군. 이대로 합시다.”
“옛, 알겠습니다.”
그들 다섯 명의 장교들은 각각 사령관과 각 측익 지휘관, 그 참모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의 대화는 내용이 진지하고, 말투도 절도가 있었지만 가능한 목소리를 낮춰서 소근대듯 진행되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방 한 가운데의 탁자, 아니 ‘전장’ 건너편에 있는 다른 다섯 명에게 들리도록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론, 함께 트랑카벨 자작가를 섬기는 친애하는 동료들이다. 하지만 이 탁자 위의 전장을 사이에 둔 상황에서는 ‘적’이니까.
실전에서도 그렇지만 ‘적’에게 정보를 주기 싫은 것은 당연하다.
이쪽 청군 진영에서 그렇듯, 반대편의 백군 진영에서도 소근거림이 계속되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눈길이 때로는 탁자 위의 작은 전장을, 때로는 전장 너머의 상대 진영을 훑는다. 어떻게 해서든 정보를 추가로 얻고 싶은 것일까.
“곧 작전회의가 마감됩니다!”
청군과 백군을 지휘하는 각각 다섯 명의 트랑카벨 장교들 외에, 탁자 주변에는 또 다른 다섯 명이 더 있었다.
그들 중 네 명은 ‘진행 요원’ 역할을 맡은 슈토르히 연대 소속의 용병들이다. 각자 긴 막대기를 들고 서 있었는데, 막대기에 끝에는 마치 넉가래의 축소 버전처럼 작은 가로목이 붙어있었다.
그들은 모의전에 참여한 장교들 만큼 진지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작은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아까부터 상황을 재판관처럼 ‘선언’하고 있는 사람은 슈토르히 연대의 선임 중대장 루트비히 아린 폰 자이트리츠였다.
그는 이 모의전의 심판이며 진행자이다.
“작전회의 끝! 명령서 제출!”
각 진영에서 한 명 씩, 몇 장의 종이를 심판 루트비히에게 제출한다.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종이에 쓰여진 내용을 확인한 루트비히가 종이 몇 장을 순서대로 나열하더니, 하나씩 선언하기 시작한다.
“백군, 2연대와 5연대 마을 북동부 방향에서 접근!”
“백군 2연대 5연대, 마을 북동부에서 접근!”
루트비히의 선언을 복창한 슈토르히 진행병들이 작은 넉가래를 이용해 능숙하게 전장의 ‘현황’을 ‘반영’하기 시작한다.
“청군, 7연대 마을 후방에서 진입!”
“청군 7연대 마을 후방 진이입!”
그렇게 차근차근 명령서를 하나씩 읽는다.
이 모의전의 배경인 탁자는 전장.
그 위에 놓은 청색과 백색으로 칠 된 나무토막들은 양측의 병력.
각각 다섯 명의 장교들이 주고받아 결정한 내용을 종이에 적어 심판에게 제출하는 행동은 병력에게 내리는 지령이다.
심판은 양측이 해당 국면에서 내린 명령서들을 취합,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 지시를 내리고 진행병들이 ‘현황’을 전장에 반영한다.
가로목에 밀린 백색 나무토막이 작은 숲을 지나 나지막한 건물들이 있는 마을로 진입하다가 마을 위치에 있던 청색 나무토막에 살짝 부딪친다.
교전이 벌어진 것이다.
탁자 위의 전장에서야 그저 나무토막이 서로 부딪치는 둔탁한 작은 소리가 울렸을 뿐이나,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머리속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공격측 보병 대열이 마을에 접근하자, 마을에 숨어있던 방어측이 사격을 개시한다.
공격측은 대응사격을 하는 한편, 빠르게 거리를 좁혀 마을로 진입한다. 마을을 둘러싼 담벼락을 타넘고 골목과 골목에서 백병전이 시작된다.
조용하던 마을 주변이 차츰 전투의 소음으로 가득해진다. 공격자도 방어자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아 양측의 사상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여기 참여한 이들의 절대 다수는 실제로 전장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았거나, 심지어 본인이 겪어보기도 했다.
그러니 이들이 방금의 선언을 듣고 그런 광경을 상상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백군 11연대가 북북서 방향으로 속보로 이동.”
“백군 11연대 북북서로 속보 이동!”
그렇게 양측의 작전행동이 종료된다.
노심초사 진행병들의 손 끝에서 움직이는 나무토막, 아니 자신의 휘하 병력들을 지켜보던 장교들이 탁자에 바짝 붙어서서 상황을 살핀다.
작전회의를 마치고 심판에게 명령서를 제출하는 시점에서, 상대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각자 번갈아가며 자신만의 턴을 가지는 장기와 같은 보드게임과 다르다. 이 모의전은 양측이 동시에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이 동시에 수행되고 있었다.
그러니, 명령을 내린 당사자들이 그 결과가 가장 궁금한 것은 당연했다.
“역시··· 상대가 마을로 진입하고 있군요. 숫자가 1.5배 더 많은데 지킬 수 있을까요?”
“심판의 판단을 기다려야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다음 국면에 만회가 가능할 겁니다. 예비대를 일부러 배치하지 않았습니까?”
“으음, 그렇지요, 우리 병사들을 믿어야지요!”
장교들이 초조하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동안, 심판 루트비히의 눈이 침착하게 전장을 조망한다.
마지막으로 명령서를 다시 확인하며, 양측 장교들의 의도가 심판인 자신의 해석대로 적절하게 반영되었는지를 살핀다.
지금 그는 이 전장의 모든 권한을 가진 신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모의전 한 번 하는 데엔 상당한 시간과 자원이 들어간다.
그러니 아주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 그가 데리고 온 진행병들은 모두 똑똑하고 숙련된 자들이라, 내려진 명령을 모두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이제는 판결의 시간.
양측의 명령이 모두 반영되었고, 전장의 병력들이 충돌을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전장에서는 승패가 갈려야 한다.
루트비히의 두뇌는 아까부터 혹사당하고 있었다. 탁자 위의 모든 상황, 현재와 과거를 기억하고 있어야 했고 미래를 예상해야 했다.
그것은 이 작은 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오로지 심판의 주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로 대단해보이지 않는 보드게임이나 다름없는 모의전을 아무나 주관할 수 없는 것이다.
갑자기 밀리던 쪽이 분기해서 접근해온 상대편을 몽땅 썰어버렸다거나, 유리하던 쪽이 갑자기 존재하지도 않는 적에 놀라서는 우르르 도망쳐 버렸다거나.
실제로 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런 수많은 경우의 수 중, 무엇이 전장에 적용이 될지는 오로지 심판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의전은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과정이 아니다.
실전이라면 당연히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거의 모든 것을 잃는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모의전은 그게 아니다.
종합적으로 각 국면에서의 상황 판단과 지휘를 평가한다. 오히려 불리한 국면이기 때문에 기발하고 훌륭한 대응과 지시가 나올 수 있는 법이다.
뭐 그런 안전장치가 있다고는 해도, 그리고 심판이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불합리하다는 인식을 줄 수는 없었다. 슈토르히 연대의 선임 중대장으로서, 전쟁의 명가 자이트리츠의 이름을 이은 자로서.
그리고 존경하는 콘도티에레의 측근으로서 부끄러운 이름으로 언급이 될 수는 없으니까.
“교전 판정 시작!”
머리속에 전장의 모습을 그려 넣고 전투의 진행 사항을 모두 결정했다. 전투를 지휘하는 열 명의 장교들은 물론, 주변 수십 명의 참관인들도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남쪽 전장에서, 청군의 기병은 보병의 견제 사격에 돌격을 실패, 하지만 피해는 경미!”
“어어··· 이럼 안되는데···.”
“됐어! 이겼어!”
판정이 하나 나오자 실내가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워진다. 청군의 주공이 초반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쪽 전장에서, 청군의 보병은 수적 우위와 기동성을 활용, 2미터 정도 백군을 밀어내고 돌파구를 여는 중!”
“밀어 붙인다··· 할 수 있어.”
“이런, 역시 측면 방어를 준비해야 했어!”
나지막한 언덕의 능선을 낀 마을을 둔 전투는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전군의 절반 이상의 교전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서로 대화를 나누는 참관인들의 웅성거림도 커진다. 아직 전투는 초반이고, 크게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다.
수십 명의 논의는 수십 갈래의 예상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이런 엄숙하고 진지한 모의전이 아니었다면, 동네 주민들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는 장기판이었다면 모두가 한 마디 쯤 훈수를 놓았겠지.
“중앙 능선부, 백군 1연대가 총격을 가했으나 그 피해는 경미!”
“이러언, 좀 더 잘 하지 않구!”
하지만 이 자리에서의 판단은 오로지 루트비히의 몫이다. 심판의 선언이 계속 이어진다.
간부 특성화 교육에 선발된 인원은 모두 56명. 중대장이나 연대 참모급 이상의 장교, 혹은 진급을 예정한 인원들이다.
이들의 선발 과정은 여러가지 판단이 개입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트랑카벨 장교 집단의 질을 높이는 한편 양도 늘리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56명의 중견급 이상 장교들이 한꺼번에 일선을 떠나 교육받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전방과 후방의 각급 부대는 큰 문제 없이 운용되고 있어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아무리 비전투기간인 겨울이라고 해도, 그만큼 대체 인력이 갖춰지거나 부장급들이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겨울에서 초봄에 이르는 약 100일은 각종 커리큘럼으로 가득했다. 신체적으로 괴로운 훈련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체력이나 정신력으로는 버티기 힘든 과정일 수도 있었다.
이론 교육은 큰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검증 과정으로 모의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모의전은 자이트리츠 전쟁관에서 배워 온 것이다. 루트비히는 처음 아버지의 강권으로 전쟁관에 참여한 여섯 살 이후, 못해도 수십 번은 모의전을 경험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애들 장난이나 다를 바 없는 모의전이 이 빡빡한 일정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과정에 넣었다.
마지막까지 망설였으나, 콘도티에레도 동료 선임 중대장인 모리츠도 대찬성이었다. 분명 좋은 효과가 있을 것이라면서.
최소한,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은 거둔 것 같다.
또한 트랑카벨 영지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56명 이외에, 우호 가문인 드 레뮤즈와 드 누아 백작가, 거기에 더해 드 몽파르지에 공작가에서도 객원 참여 인원을 2명씩 파견했다.
지빌링엔 연대와 네그라타 연대에서도 객원 인원을 참여시켰기 때문에 실제 인원은 훨씬 많았다.
이론과 실기가 뒤섞인 강행군에 몇 명이나 남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단기 벼락치기 교육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도 아직은 미지수였다. 그런 불안함이 루트비히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하지만 콘도티에레가 확신을 가지고 주도한 일이라 생각하면, 그저 따를 뿐이다.